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지 환난이 아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성경을 변조하는 신자
대체적으로 한국인들은 이성적이라기보다 아주 감정적인지라 논리적이지 못하다. 토론에 대한 훈련은커녕 일상적인 대화법에 대한 교육마저 받은 적이 거의 없다. 여간해선 상호간의 의견 차이를 좁혀 최선의 결론을 도출해 내지 못한다. 오직 이기는 데만 관심을 두기에 상대의 의견이 다를 수 있음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잘못은 상대방이 말한 핵심 주제와 전체 문맥의 흐름은 완전히 무시하고 일부 표현만 문제 삼는 것이다. 거두절미하여 서로 말꼬리 잡기 시합을 벌린다. 거두절미(去頭截尾)란 말 그대로 머리를 자르고 꼬리마저 잘라 대체 원래 형태가 무엇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는 처음 논쟁했던 주제는 온 데 간 데 없고 전혀 엉뚱한 것으로 죽기 살기로 치고받게 된다. 마지막까지 논리적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큰소리만 치면 승자가 된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는데도 바로 이런 몹쓸 거두절미 습관이 나타난다. 하나님 말씀을 보는데 감정이 격앙해지거나 누구와 싸워서 꼭 이기겠다는 목표도 없는데도 그러하니 참으로 이상하다. 거두절미해서라도 논쟁을 꼭 이겨야겠다는 것은 무조건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심보다. 성경을 거두절미함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겠다는 뜻이다.
그런 거두절미의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본문이다. 정말 이 말씀의 앞과 뒤가 잘리어 나간 채 가르쳐지고 있다. 바로 직전 직후의 구절마저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당연히 본문이 포함된 문맥의 주제와는 전혀 다른 뜻이 되었다.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인 성경과는 별도로 기독교라는 종교 울타리 안에 떠돌아다니는 인간의 말이 되어버렸다.
흔히들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나님이 신자에게 현실에서의 고난을 허락하시되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세기로만 주신다는 것이다. 그마저도 신자의 인내력에 한계가 닥칠 때쯤에는 그 환난에서 구원의 길을 확실히 열어주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자는 어떤 환난이 닥쳐도 잘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해결해주신다는 뜻이다.
언뜻 보면 정당한 해석인 것 같다. 또 아주 은혜로워 믿음을 견고케 하는 데에 큰 유익이 되는 말씀으로 여겨진다. 신자로선 어떤 환난이 닥쳐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불신자가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약한 환난을 미리 골라서 붙여주시고 또 잘 믿고 기도하면 탈출구도 빨리 열어주시니까 말이다.
이 해석은 엄밀히 따져 거두절미한 정도도 넘어섰다. 아예 자의적으로 성경 말씀을 변조한 것에 해당된다. 신자들이 피할 대상으로 여기는 환난, 고통, 슬픔, 질병, 실패, 등등의 단어는 본문에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분명히 ‘시험’이라고 했지 ‘고난’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험 대신에 고난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가르치고 이해한다.
가르치는 자는 고난 중에 있는 불신자나 신자들에게 어떻게든 위로와 축복만 약속하여 자기 교회로 교인을 많이 끌어 모으려는 의도다. 또 그런 가르침을 아무런 검토 묵상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니 스스로 그렇게 해석하는 교인들이 어쩌면 더 문제다. 신앙을 오직 복을 얻는 수단 아니면 힘든 일에서 벗어나는 진통마취제 정도로만 생각한다는 반증이다.
환난과 시험은 다르다.
본문이 포함된 전체 문맥의 뜻이 무엇인가? 그리 크게 볼 것도 없다. 바로 앞뒤의 구절부터 따져보자. 바로 앞에는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2절)는 말씀이 있다. 신자의 상태가 지금 어떠하다고 하는가? 선 줄로 생각하고 있으니, 서있는 모습이 곧지 않을 수는 있지만 신자는 분명히 서 있다. 또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니까 최소한 넘어진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환난과는 거리가 먼 상태다.
바로 뒤에는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14절) ‘그런즉’이라는 접속사는 바로 앞의 진술에 따라 어떤 관계로든 이어지는 내용이라는 뜻이다. 본문을 흔히 이해해 왔던 방식으로 이 구절을 환언(換言)하면 이렇게 된다. “믿음으로 환난을 이겨내거나 기도 열심히 해서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열어 주었으니까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잘못된 성경해석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겠는가? 방금 굳건한 믿음으로 환난을 피했는데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하니 전혀 논리가 맞지 않는 말이지 않는가?
결국 본문의 ‘시험’이라는 단어를 현실적인 어려움에 아무리 적용해보려 해도 도무지 앞뒤 가 연결되지 않는다. 물론 성경이 때로는 이중, 삼중의 다른 뜻을 드러낼 수 있으며 또 한 구절만 따로 떼어서 신앙생활에 적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 문제이지 본문처럼 성경이 말하는 바와 완전히 달라진다면 분명 잘못된 것이다. 행간, 암시, 상징, 예표, 비유 등등의 뜻을 넓게 헤아려 삶에 적용할 때에도 성경에 일관된 원리와 문맥 전체의 대의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한다.
‘시험’의 헬라원어도 신약성경에 모두 죄와 연관해서 21회 사용되었다. 신자를 죄로 빠트리는 내외부적인 -죄의 본성과 세상과 사탄의 방해- 유혹, 하나님이 신자의 믿음을 테스트 혹은 연단하는 일, 신자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자기 의를 앞세우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일등의 용례로만 발견된다. 물론 신자로 죄를 이끄는 내외부적 유혹 가운데는 현실적인 고난도 일부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지금껏 이해해 왔던 하나님이 고난 자체를 약하게 혹은 피할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와는 전혀 별개다.
본문의 바로 앞뒤 구절이 공통적으로 ‘그런즉’이라는 접속사를 사용했다. 따라서 저자는 10:1-11까지의 진술을 바탕으로 12절의 권면을 하겠다는 것이다. 또 그 12절을 부연해서 더 자세히 설명한 것이 13절이다. 나아가 13절의 진술을 바탕으로 14절 이하의 권면이 성립된다는 뜻이다.
먼저 신자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여야만 할 때 즉, 서있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란 어떤 것인가? 바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를 “우리의 거울”(6절)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조상들이 모세에게 속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과 음식을 먹고 마시었는데도 저희의 다수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던 일을 되풀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하나님의 큰 이적으로 애굽에서 구원되었다. 또 광야에서도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구름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는 큰 은혜를 누렸다. 애굽의 고기 가마 곁처럼 세상 쾌락은 없었지만 먹고 마시는 데에 핍절하지는 않았다. 이방 족속의 공격이나 도적 떼의 습격도 없었다. 절실히 구원을 갈구해야 하는 때는 애굽에서 노예로 비참하게 살 때였지 광야에 나선 지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악을 즐겼고(6절), 우상숭배를 했고(7절), 이방 여인과 간음했고(8절), 주를 시험했고(9절), 하나님에게 원망하여(10절),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의 구원을 맛보고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시니 더 이상 정죄가 없다고 기고만장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무조건 자기들 편이라고 착각하고 교만, 방자해진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 했어도 그중에 다수가 자기 죄로 인하여 오히려 심판 받았다. 이런 선례가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11절)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너희도 선 줄로 생각될 때에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럼 시험의 뜻이 무엇인가? 죄악에 빠트리려는 도덕적, 종교적, 영적 시험이다. 현실적 환난이나 실패가 절대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아무 어려움이 없을 때에 더 시험에 잘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복 주시는가보다 여겨질 때에 실족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죄지으면 신자의 구원이 취소되는가?
이 진술이 구원 받은 신자라도 죄를 지으면 그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출애굽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양의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서 죽음의 사자가 건너뛰었다. 인간의 공적과 선행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다. 또 그 백성이 갈라진 홍해 사이를 건넜고 뒤따르던 애굽 군대는 수장되었다. 구원 얻은 신자는 그 믿음을 고백하고 이후의 인생을 주님께만 헌신하겠다는 세례 의식을 받아야 함을 상징한다. 바울이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1,2절)라고 말한 대로다.
그러나 구원은 반드시 하나님과 신자와의 일대일 개인적인 관계에서만 발생한다. 한 공동체 집단으로 일시에 구원이 일어나는 법은 절대 없다. 시쳇말로 마누라 치맛자락 붙든다고 천국가지 못한다고 하듯이 부부라도 영원한 운명이 갈리는 것은 각자와 하나님간의 문제다.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노예로 묶여 있던 한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 앞에 완전히 겸비해져 엎드려야만 한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추하고 더럽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진정으로 자각하고 고백해야 한다.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일련의 전체적 모습은 구원의 과정을 상징하는 것은 분명히 맞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하나님 앞에 각자 철두철미 죄인임을 고백한 적은 없다. 홍해를 건넌 직후에 미리암의 소고에 맞추어 하나님을 찬양한 일은 있다.(출15장) 분명 위대한 권능을 민족 전체가 체험한 대로 찬양하며 경배 드렸다.
그러나 성경에는 출애굽으로 전백성이 다 구원 받았다는 확정적인 진술은 없으며 오히려 아니라고 이해되는 표현이 더 많다. 그들 가운데 성령의 간섭으로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겸비해진 자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 숫자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본문만 해도 우리 조상들이 다 “모세에게 속하여”라고 하지 않는가? 만약 “하나님에게 속하여”라고 했다면 전부가 구원 받은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기지만 말이다.
참으로 놀랍지 않는가? 이것만 보아도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너무나 정미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지 않는가? 바울이 “모세에게 속하여”라고 의도적으로 기술했다면 이미 성령이 그의 생각을 주장하신 것이다. 그게 아니라 먼 훗날에 이렇게 해석되리라고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그런 진술을 했다 쳐도 더더욱 성령의 인도이지 않은가?
우리가 출애굽에서 배울 것은 어린 양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는 결코 구원 받지 못한다는 원리다. 또 구원 받았어도 이 땅에선 불신자와 함께 섞여서 광야 같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영원한 본향에 대한 소망을 갖고 그곳을 향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구원 받았는지 또는 구원 받고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지 여부는 전혀 문제 삼을 필요 없다.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악을 즐겨하고, 우상숭배 하고, 이방인과 간음하고, 주를 시험하고, 주를 원망하는 것들은 정말 구원 받은 신자라면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구원 받으면 죄를 전혀 안 짓는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이 악을 “즐겨한다”고 표현했지 않는가? 스스로 즐기며 고의로 줄기차게 악을 범했던 자들만 멸망 받았다. 광야를 사십 년간 방황만 하다가 가나안에 입경하지 못한 자들 중에는 그렇지 않고 진심으로 주께 항복하여 구원 받은 백성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만이 아시는 개인적으로 은밀히 이뤄지는 일이다. 고린도전서 10:1-12가 구원 받은 신자의 구원도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 내지 변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선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표현부터 그런 뜻을 함의(含意) 한다. 서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서있지 않고 곧 넘어질 것이라는 가능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란?
오히려 본문이야말로 취소될 수 없는 구원을 더 확증하는 뜻이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찬찬히 따져 보기로 하자. 우선 본문에서 말하는 ‘시험’의 뜻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범죄로 이끄는 환경과 세상 사람들의 유혹과 신자 본인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과 외부로부터의 사탄의 방해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즐기고, 우상숭배하고, 간음하고, 주를 시험하고, 주를 원망했던 것들이 바로 시험에 빠진 결과다.
본문은 또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할 것이 없다”고 한다. 이중 부정의 표현법을 사용했으니 긍정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 어떤 시험을 당해도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험을 이겨내는 힘이 신자가 믿음이 좋아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깊이 알아서가 아니다. 헌금 많이 하고 교회 봉사를 성실히 했기 때문이라는 뜻도 전혀 없다.
대신에 하나님이 신자더러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있도록 두 가지 방안을 동원했다고 한다. 첫째는 신자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고 한다. 신자의 믿음 수준과 그 변화된 품성에 맞추어 주위 시험과 유혹의 강약을 그분이 조절해 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자가 게으르거나 죄의 본성에 못 이겨 시험에 넘어갈 즈음에는 하나님이 피할 길을 내사 신자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신자가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까지 하나님이 세밀하게 간섭하신다는 것이다. 너무나 놀랍고 은혜로운 진술이지 않는가? 하나님이 신자가 감당도 못할 죄의 유혹에는 절대 빠지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당연히 구원 받은 이후에 짓는 죄로 인해 그 구원이 취소될 리도 전혀 없지 않는가? 아직도 무슨 뜻인지 잘 실감이 안 날 것이다.
바울 사도가 이 말씀 앞에 신자의 경계로 든 출애굽의 경우를 다시 살펴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다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했다. 광야에서 굶겨 죽이려고 애굽에서 구출해 냈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만나만 먹다보니 고기가 먹고 싶다고 원성이 자자했다. 하나님은 그럴 때마다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어 그 불평의 근거를 제거해주셨다.
바꿔 말해 자기 백성들이 먹고 마실 것이 없어서 당신을 경배 못하겠다고 핑계되는 일은 다 막아주셨다. 흔히 하는 말로 사흘 굶어 남의 집 담장 넘지 않을 자 아무도 없다고 한다. 성인군자라도 도무지 먹을 것이 없으면 도적질이라는 죄에 빠지게 된다. 다윗이 사흘을 굶어서 부하들과 함께 성막의 거룩한 떡을 먹었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광야에서 죄를 지을 가능성을 다 차단해 주셨던 것이다. 시험을 피할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물론 그 반대로 너무 흥청망청 풍부해서 당신을 경배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에는 전혀 걱정 없고 사방 대적도 막아 주시되 곤핍한 광야 길을 가게 하셨다. 하나님과만 교제, 경배, 동행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그 이전부터 노예생활의 불만이 폭발하기 전에 구원하셨고,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와서 자칫 다시 노예로 돌아갈 뻔 했을 때도 바다를 가르셨다.
한 마디로 출애굽과 광야 길을 지나는 이스라엘에겐 감당치 못할 시험이 전혀 없었다. 나아가 백성들이 힘들어, 사실은 지루하고 지친 것에 불과하지만, 감당치 못할 즈음에는 피할 길마저 주셨다. 다시 강조하지만 현실적 환난에서 피할 길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들로 굶겨 죽이려 광야로 내몰았을 리는 절대 없지 않는가? 대신에 우상의 제국에서 노예 생활했던 자기 백성이 이제 모든 세상 세력과 죄악의 시험을 이겨내고 당신만 섬길 수 있기를 바랐고 또 그에 가장 적합한 훈련 코스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다른 말로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저지른 죄악들은 절대 짓지 않았어야 할, 아니 정확히 말해 얼마든지 짓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이 그 큰 기적으로 건져 주었으니 무엇이든 자기들 요구는 다 들어주어야 한다고 착각한 것이다. 비스듬히 한 발로 흔들거리며 서 있는 줄도 모르고 넘어지지 않는다고 믿은 것이다. 아니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는 일에는 사실상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결국 광야에서 멸망당한 자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온전히 믿은 자가 아니었다. 확실한 구원을 받은 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죄를 지어 하나님께 벌 받아 멸망했다고 구원 받은 것이 취소된 것이 아니다. 취소될 구원 자체가 없었다. 홍해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 전체가 애굽의 노예생활이라는 현실적 곤경에서 구출 받은 것뿐이다. 영원한 운명이 갈라지는 영혼의 구원은 여전히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이뤄진다. 멸망당한 이들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보다는 우상과 세상과 죄악과 사탄에 붙어 있었던 자들로 입술로만 주여, 주여 했던 것이다.
오늘 날에도 마찬가지다. 기도원에서 기도하여 암이 나은 후에 교회는 출석한다. 마치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맛본 것 같다. 그럼에도 끝까지 하나님은 기도하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분으로만 믿는 경우가 많다. 물론 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을 배우지만 단지 교리로 받아들일 뿐이다. 자신의 영적 실체를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겨 바라본 체험이 없다. 정말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럽고 추한 죄인이었음을 고백한 적도 없다. 버러지에 불과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뿐이라고 갈망한 적이 없다. 그저 기도하여 암이 나았고 교회에 나와 시키는 대로 따르니 자기가 선 줄로만 여긴 것이다.
구원에서 성령의 역할
기독교에서의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 선물이다. 신자는 구체적으로 감지하지 못하지만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으로 일어나는 영혼의 거듭남이다.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하고 구제와 선행에 열심이라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다고 얻는 것도 아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단지 수혜자로 동참할 뿐이다. 또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 받은 당신의 백성에게는 성령님을 평생토록 내주케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범죄로 유혹하는 시험에서 지켜 주신다는 의미가 단순히 외적 환경을 바꾸어서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예수 믿은 후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불신자 시절의 나쁜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고 죄에 빠질 기회도 하나님이 막아주시는 체험도 자주 하게 된다.
그럼에도 천국가기 전까지는 신자는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어도 세상에서 함께 살아야 하기에 시험에 빠질 기회는 항상 있다. 인간은 외적인 환경과 아무 상관없이 즉, 부유하든 궁핍하든 죄를 짓게 마련이다. 그래서 성경도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후5:22)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이 성도를 시험에서 막아주시는 또 다른,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하고도 자주 사용하시는 방식은 따로 있다. 무엇보다 구원 받은 성도에게 내주하는 성령이 신자의 품성을 서서히 바꾸어 준다. 아니 그 이전에 예수를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처음 영접할 때에 이미 급격한 변화가 성령에 의해 일어난다. 사탄과 사망과 죄악에 묶여 있던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과 생명과 의를 소망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A. W. 토저는 “거듭났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기에 누가 내게 그것을 말해 줄 필요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신자가 중생의 구체적인 과정은 잘 인지할 수 없지만 구원 받은 이후에는 자신이 이전과 완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이전의 삶이 너무나 헛되고 헛된 것이었음을 절감한다.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 없었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아무도 강요 권면하지 않아도 저절로 고백하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없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절망으로 끝났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구원의 은혜 앞에 감사하며 엎드리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이전과 같은 세상 쾌락을 쫓으며 죄악에 빠진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아쉬움과 미련이 전혀 없다. 정말 예수님을 닮아가며 그분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고 싶다.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소명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갖고 헌신 실천하려 한다. 물론 때로 죄에 빠지고 옛 본성이 나타나긴 하지만 고의로 계속해서 즐기려 들지는 않는다.
다른 말로 신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함으로써 어떤 시험이라도 이겨낼 능력을 이미 갖게 된 것이다. 말씀과 기도라는 절대적인 영적 싸움의 무기도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어지간한 시험은 신자 스스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말씀과 기도로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다. 그럼에도 현실의 여건이 너무 어렵거나, 주위 사람과 사탄의 방해가 격심해지거나 하면 하나님이 신자더러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신다. 하나님은 그 이전에 각 신자의 믿음의 분량에 맞추어 죄악, 세상, 사탄이 시험하도록 허락하신다. 욥의 경우에는 그 분량이 역사상 가장 컸던 예다. 간혹 신자 스스로 게을러지거나 죄에 빠진 줄 모를 경우에는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죄에서 빠져나오도록 이끌어 주신다.
바울 사도가 어떻게 권면했는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다르게 나눠주신다면 시험도 그에 맞게 각 자가가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실 것 아닌가? 또 본문은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10:14)는 권면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구원 받은 신자에게 죄악의 시험까지 막아주신다면 우상 숭배할 이유나 근거가 전혀 없지 않겠는가?
주기도문의 가르침
이제 신자가 자기 믿음을 활용하고 가꿔나갈 가장 확실한 방안이 나온 셈이다. 예수를 믿었으니 하나님이 모든 일에서 구원해주실 것이므로 무슨 소원이든 기도하여 해결받자는 식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죄악을 막아주시긴 하되 신자의 연단과 성숙을 위해 감당할 만큼은 허락하신다. 그럼 무엇보다 그런 시험을 잘 감당하는 데에 믿음이 동원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하라고 했는가?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뤄지기를 간구하라고 했다. 그 다음에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며 또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시험에 들지 말고 악에서 구해달라고 해야 한다. 마지막에 기도한다고 해서 의미가 가장 약한 것이 아니다. 절대 잊지 말고 기도해야 하고 또 그 기도를 하지 않으면 기도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신자의 인생을 책임진다면 신자는 자신의 성결을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힘든 고난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는 시키지 않아도 잘 한다.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끌 수 없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기 때문이다. 정말 간절하고도 끈질기게 기도한다. 또 관련되는 말씀을 보며 믿음을 키우며 인내도 잘 한다.
그러나 과연 이런 기도를 하는 신자가 얼마나 있는가? “정말로 저는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바꿔지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답게 살고 싶습니다. 당신의 의로운 일을 하고 싶습니다. 당신 뜻대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저의 형편이 부유하든 궁핍하든 어떻게 되든 저를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게 해주십시오. 이제 저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보길 소원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에 거한다는 것은 당신의 계명을 지키고 당신이 가신 길을 따라 가며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산다는 것이다. 죄악과는 거리가 멀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다.
나아가 진리를 알면 진리가 자유케 해준다고 한다. 진리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알면 즉,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달으면 자유케 된다. 예수 믿었으니 이제 하나님이 모든 환난에서 지켜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뜻은 오직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죄에서 자유하게 된 것이다.
바울이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의 신분과 특권을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6:6,7, 10,11)
하나님이 사탄과 죄악의 힘을 완전히 무력화시켜서 신자가 죄를 전혀 짓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묶고 있던 죄와 사탄의 사슬을 예수님이 십자가로 완전히 끊고 신자의 속에 성령님을 내주케 해주셨다. 거기에다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시므로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죄를 이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아주 힘든 시험은 피할 길도 열어주신다고 했지 않는가?
이제 남은 것은 신자가 자신을 예수에게 온전히 드려 그분의 의의 종이 되는 것뿐이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6-18) 예수님을 알고 소지하면 죄를 짓지 않는 대신에 선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예수 믿었다고 환난에서 자유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감당할 만한 어려움만 허락하고 그것마저 피할 길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죄에서 자유케 되고 의의 종으로 헌신하려고만 하면 정말 아무 제한 없이 얼마든지 무한대로 가능케 해주신다.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를 수 있는 자유와 권세와 심지어 능력도 함께 받았다. 최소한 죄의 유혹을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신자에게 아직 옛 본성의 잔재가 남아 있고, 말씀과 기도에 등한히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자꾸 잊기 때문이다.
불신자 집안에 시집간 신자 며느리
완전 불신자 집안에 시집간 신자 며느리는 시댁으로부터 온갖 말 못할 심한 구박을 받는다. 교회 출석부터 금지 당하고 우상숭배를 강요당하며 툭하면 비방과 멸시를 받으며 심하면 현실적 어려움도 겪게 만든다. 당하는 며느리로선 너무나 힘든 환난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를 하나님이 주신 감당할만한 환난이며 또 그 환난에서 피할 길도 주신다고 간주하는 며느리라면 어떻게 기도하겠는가? 당연히 어서 빨리 이 환난이 끝나게 해달라고 할 것이다. 자신이 잘 참을 수 있도록 믿음과 인내력을 키워 주시고 무엇보다 환난의 세기를 줄여 주며 언젠가는 핍박이 그치고 시댁도 예수 믿게 해달라고 할 것이다. 초점은 자신이 당하는 환난의 약화, 중지, 그래서 자신의 구원에 있다. 시댁은 환난의 가해자며 자신은 환난의 피해자일 뿐이다.
반면에 그런 상태가 하나님이 주신 감당할만한 시험이며 정 힘들면 피할 길도 주신다고 해석하는 며느리라면 어떻게 기도하겠는가? 어떤 핍박을 받더라도 자기까지 함께 저들을 미워하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해달라고 할 것이다. 그들을 오히려 주님의 사랑으로 품고 용서하며 섬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자기가 흥분하여 다른 사람에게 분풀이 하지 않게끔 하나님이 막아달라고 할 것이다.
핍박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죄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간구는 이미 그 고난은 아무 문제가 아닌 상태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고난에는 초점이 가있지 않다. 자신이 현실적으로 후패하든 상관이 없다. 그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 시험도 하지 않는다. 핍박이 단지 제거해야 할 고난이거나 자신이 끝까지 지고 갈 십자가라고만 여기면 믿음을 인내력의 수준으로 저하시킨다. 반면에 단지 시험일뿐이라고 여기면 그런 힘든 가운데도 자신의 성결과 하나님의 뜻에 더욱 관심을 쏟게 된다.
어느 경우든 시댁이 예수 믿게 해달라고는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자칫 자신의 고통을 끝낼 목적으로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자신의 고통은 이미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오직 그들의 구원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시댁에서 겪는 매사를 자신부터 죄에서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측면에만 관심을 두고 그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된다.
다른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자는 사업에만 정신 팔린 불신자 남편이라고, 사춘기라 반항하는 자녀도, 교회 안에 아무래도 좋아할 수 없는 신자라도, 자신이 감당할만한 시험이기에 하나님이 붙여 주신 것이라는 철저한 인식부터 있어야 한다. 본문을 시험이라고 바로 해석 적용한 결과다.
대신에 그들에게서 당하는 고통부터 빨리 없애주고, 내가 원하는 대로 그들이 바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심지어 자기를 미워하는 신자가 벌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본문을 문맥과 상관없이 한절만 따로 떼어내어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시험’을 ‘환난’으로 바꾸어 해석 적용한 결과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1:12) 시댁의 핍박을 단순히 환난이라고 하면 이 구절도 그들과 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참아내는 것만으로 복을 받게 된다는 뜻이 된다. 성경은 분명 죄악에 대한 시험을 참으라고 했다. 또 주님을 진정 사랑하는 바탕에서 시험을 이겨야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했다.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스라엘 선조들은 환난에만 관심을 두고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시댁의 핍박을 환난으로 간주해 참기만 하려는 신자 며느리도 하나 다를 바 없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長成)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3-15) 하나님은 친히 시험하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감당할만한 시험을 허락만 할 뿐이다. 대신에 시험은 전부 자신의 욕심과 세상의 악과 사탄의 방해에서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오직 성숙을 위한 연단일 뿐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구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眞理)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6-18절) 하나님께로는 오직 좋고 온전한 것만 온다고 했다. 그분이 주시는 어떤 연단도 신자에게 좋고 완전한 것이다.
또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진리의 말씀 즉, 십자가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낳으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6,7)
심지어 우리가 시험에 져도 된다. 또 다른 피할 길이 있지 않는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9,10) 신자의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시기에 죄를 짓더라도 회개케 하시고 심지어 회개를 잊거나 모르고 있더라도 그분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대신 발하신다. 구원 받은 신자가 죄를 즐기며 줄기차게 고의로 동일한 죄를, 그것도 하나님께 거역하는 죄를 범할 수는 없다. 최소한 그 죄를 가슴을 치며 회개는 하게 된다.
요컨대 신자가 정작 염려하고 간절히 기도할 주제는 환난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시험을 물리치고 죄에서 자유케 되는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온전케 되며 의와 선을 행하는 데에 무제한으로 자유케 되려고 간절히 소망하고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신자가 이미 충분히 그럴 수 있도록 감당할 만한 시험만 허락하고 또 정 어려울 때는 피할 길도 주신다고 하지 않는가? 대체 우리는 왜 그럴 수 없는가? 두 가지 이유뿐이다. 우리가 너무나 게으르거나, 십자가 복음의 참으로 놀랍고도 귀한 권능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6/22/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