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19:9-14) 엘리야가 범한 진짜 잘못은?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9-14)
목숨을 건지려 도망가는 엘리야.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갈멜산에서 대결해 완벽하게 승리한 후에 광야로 도피한 사건은 익히 알 것입니다. 지금껏 교회에선 그가 너무 큰 승리를 맛보았기에 그 반작용으로 곧바로 극심한 영적 침체가 찾아왔다고 배워왔습니다. 실제로 19:4절도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같이 믿음이 연약한 신자도 죽고 싶다는 말은 불신앙에서 비롯된 너무나 불경한 말이라 대놓고 입 밖에 함부로 내지 않습니다. 아무리 먹고 마실 것 없는 뜨거운 광야라고 해도 이제 겨우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육체적으로 죽을 지경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과 혼자 상대해 빛나는 승리를 거둔지 며칠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앞뒤로 잘 살펴보면 갈멜산 대결에 모든 힘을 쏟아 붓고 나서 탈진했을 가능성보다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생기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반드시 성경본문과 앞뒤 문맥 안에서 찾아야 하는 또 다른 좋은 예입니다.
우선 이세벨의 사자가 엘리야를 찾아와 내일 이맘때에 반드시 죽인다고 통보했습니다.(19:2)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냥 군대를 보내서 체포하고 처형하면 되는데 하루 전에 미리 통보했습니다. 그 동안 공포에 질리는 고통을 당해보라는 잔인한 심보입니까?
그 만큼 이세벨이 이스라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엘리야가 아무리 도망가본들 독 안에 든 쥐 꼴이라는 자신감의 표출입니다. 거기다 네를 죽이지 않으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다고 선언했습니다.(19:2) 네가 바알 선지자와 대결해서 승리했을지라도 아직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세벨은 자기 신의 이름을 걸었습니다. 네가 죽던지 내가 죽던지 사생결단을 하자는 것입니다. 신들의 대결을 한 번 더 해보자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럼 여호와가 이세벨과의 대결에서 질 것이라고 겁을 먹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 대결을 먼저 신청했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숫자까지 지정했습니다.(18:19) 여호와가 앗세라 신과 대결에서 진다고는 엘리야로선 아예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엘리야로선 이세벨이 이렇게까지 세게 나온다면 이차 대결에서 이겨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기를 체포해서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고 있었습니다. 이세벨은 남편 아합 왕을 뒤에서 조종했고 남편보다 더 포악했습니다. 아세라 선지자들 힘을 합쳐 엘리야를 저주케 하면서 그 신의 제물로 바쳐서 반드시 끔찍하고도 잔인하게 죽일 테니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우상 신에 바쳐지는 죽음이 얼마나 잔혹한지 알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거룩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결코 그런 수치를 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 일까지도 막아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폭군이라도 어쨌든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과 왕비입니다. 바알 선지자와 첫 대결의 의미는 엘리야가 삼 년의 기근에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아합 왕을 도와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이세벨과 대결에 대해선 그런 긴급하고 정당한 이슈가 없는데다 여호와의 계시도 아직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다 이세벨에게 내일 끌려가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19:3)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단 자기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간 것입니다. 영적 탈진에 빠져 도망한 것이 아니라 살려고 도망간 후에 우울한 증세가 찾아온 것입니다. 큰 승리 뒤에 따라오는 반작용이 아닙니다.
광야로 들어간 것도 순전히 추격대를 따돌려 일단 목숨부터 건지고 보자는 의도였습니다. 들어가면 생존하기도 너무 어려운 곳이라 군대들도 섣불리 따라올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온갖 장비를 갖춘 군대는 이동이 더딜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 광야를 벗어나는데 무려 사십일이 걸렸습니다.(19:8)
모세처럼 되고 싶은 엘리야
문제는 엘리야가 살려고 도망 가놓고 겨우 하루 만에 하나님더러 목숨을 앗아가라고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영적으로 탈진하거나 목이 타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물을 전혀 안 마셔도 사흘은 버팁니다. 엘리야는 하룻길 도망가면서 틀림없이 계속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세벨과 다시 대결할까요? 이번에도 완벽한 승리로 이끌고 끝까지 저를 지켜주실 것입니까? 하나님 이 나라를 우상숭배의 죄로 타락시키는 사악한 아합과 이세벨을 아직도 심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 묻고 또 물었으나 응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광야를 벗어나면 당장 이세벨에게 잡혀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직 까마귀를 시켜서 먹을 것을 갖다 주기 전이라 사십일을 견디어서 시내 산의 온전한 피신처인 굴(9절)까지 갈 수 있을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을 것 같으면 차라리 지금 하나님이 데려가주었으면 좋겠다고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탄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너무나 정미한 기록인지라 항상 그러하듯이 전후 문맥을 잘 살피면 엘리야가 죽고 싶었던 진짜 속내를 스스로 밝힌 부분이 나오는데 19:4를 다시 보십시오.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무엘, 삼손, 여호수아, 아브라함, 특별히 모세 같은 위대했던 믿음의 종들에 비해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죽고 싶다는 간구는 “그들처럼 큰 승리를 하고 싶은데 왜 하나님 지금 침묵하고 있습니까? 그럴 양이면 차라리 저를 데려가십시오.”라는 원망 아닌 원망의 뜻을 표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가 영적으로 탈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은 영적으로 충만해져서 이세벨과 대결에 나서고 싶은데도 하나님이 그 간구에 응답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한 셈입니다.
그가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받은 호렙산의 굴을 최종 목적지로 삼은 것도 하나님이 자기도 모세 같은 능력 있는 선지자로 세워주길 바랬기 때문일 것입니다. 애굽에게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모세처럼 바알과 아세라 우상 신들과 사탄의 종 아합과 이세벨에게 연전연승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간구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단순히 까마귀만 보내어 먹을 것 마실 것만 공급해주셨습니다. 여전히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계시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연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를 해주셨으니 스스로 죽을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십일을 홀로 광야를 쓸쓸히 통과했습니다.
그 동안에도 틀림없이 엘리야는 하나님과 씨름했을 것이나 여전히 딱 부러진 응답은 없었습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완전 금식을 사십 일을 두 번이나 행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겐 완전 금식이 아니라 그나마 연명할 수 있는 연단을 통해 그를 낮추고 또 낮추시려고 계속 침묵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80년의 기나긴 침묵을 통과시킨 후에야 출애굽 구원자로 세운 것에 비하면 사실상 연단도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목적했던 도피처이자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 따지고 싶은 장소인 호렙산의 굴에 도착했는데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11,12절)
바람과 지진과 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했다고 성경이 세 번이나 강조한 것은 엘리야가 그렇게 기대했지만 그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후에 호렙산에서 여호와는 우레, 번개, 빽빽한 구름, 나팔 소리 가운데 모세 앞에 강림했고 마지막에는 불로 인해 온 산이 크게 진동했기에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서 근처에 가지도 못했습니다.(출19:16-18) 그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여호와를 만났던 모습처럼 그분을 만나서 계시를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모세처럼 되겠다는 나쁘게 말하면 일종의 영적 교만 내지 시기에, 좋게 말해 영적 열정에 빠져있었고 그 점을 하나님이 꿰뚫어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눈 두 번의 질문과 답변
주목할 사항은 하나님이 자기가 기대한대로 임재하지 않았음에도 엘리야는 그분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굴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바람과 지진과 불을 보낸 후 두 번이나 하나님은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9,13절)고 똑같은 질문을 그에게 던졌습니다.
엘리야의 두 번째 대답은 첫 번째 답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람 지진 불 속에도 여호와가 안 계셨고, 두 번째 질문에선 미세한 음성으로 물었지만 전혀 깨우침이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0,14절) 그는 분명히 스스로 하나님께 열심이 유별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큰 능력만 주시면 지금 당장 이세벨과 싸우러 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왜 죽게 내버려두느냐고 따졌습니다.
선악과 금령을 어긴 아담이 까닭모를 수치심과 공포심에 사로 잡혀서 무화과 나뭇잎을 만들어 입고는 동산 깊숙이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어들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서 본문과 동일한 방식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나님이 숨어 있던 그들에게 먼저 오셨으니 그가 어디 있는지 모를 리 없습니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도 묻지 않았습니다. 이미 어떻게 된 사정인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셨습니다. 굳이 “네가 어디 있느나?”라고 물은 뜻은 간단한데 풀어쓰면 이렇게 됩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곳이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지 않느냐? 왜 엉뚱한 곳에서 그것도 숨어 있느냐?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내 사랑의 품 안이다. 네가 선악과를 먹는 순가 정녕 죽음이 임한다고 그렇게 강조했지 않느냐? 지금 네가 부끄럽고 두려운 까닭이 바로 나를 등졌기 때문이다. 내 품을 벗어나는 순간 그 어디든지 죽음뿐이라는 것을 이제 실감하겠느냐?” 엘리야에게 던진 하나님의 질문도 그와 같은 뜻입니다. “네가 어째서 지금 여기에서 이러고 있느냐?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센케비치의 유명한 소설 쿼바디스에 나오는 설화를 잘 아실 것입니다. 폭군 네로가 순전히 자신의 광적인 예술 취향대로 로마를 새로 건설하려고 큰 불을 질렀습니다. 대화재의 원인이 황제에게 있다는 소문이 돌고 백성들이 반기를 들 움직임을 보이자 네로는 예수 믿는 신자들이 불 질렀다고 거짓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로마 시민들이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한데다 화마를 피해서 로마를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도 로마를 벗어나 한참 피난가고 있는데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 쿠오바디스”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아무 말씀 없이 로마 쪽으로 향해 걸어갔습니다. 화마와 박해에 시달리는 당신의 백성을 구하러 가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기 목숨만 건지려고 양떼를 버린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음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아와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서 그 죄를 깨끗이 씻어주셨습니다. 그 후에 내 양떼를 먹이고 치라고 당부하신 말씀대로 로마에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강한 바람, 불, 지진에도 강림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모세 같은 선지자가 되겠다는 엘리야의 개인적 욕심이 틀렸다는 뜻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이세벨이 아무리 온 군대와 온 이방 선지자들 다 동원해서 날뛰어도 너를 절대 대적할 수가 없으니 아무 염려 말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더러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한 뜻을 알기 쉽게 풀어쓰면 이렇습니다.
“네 소명과 사역을 다시 확인하러 올 필요 없다. 내 권능을 다시 얻으러 올 이유도 없다. 내가 너를 선지자로 세웠을 때부터, 아니 그전에 너를 택하여 나의 종으로 준비 훈련시킬 때부터 일순간도 너를 떠난 적이 없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도 너와 함께 한다는 뜻이지 않느냐? 네가 평생을 두고 헌신할 것은 오직 내가 네게 맡긴 소명이다. 내 품을 떠나지만 않고 쉬지 말고 기도하면 내 뜻을 분별하고 나아가 그 뜻대로 준행할 힘도 내가 넘치도록 공급해 줄 것이다. 네 혼자 살려고, 그것도 모세처럼 세워달라고 하면서 찾아왔지만 그 사이에 내 백성들이 얼마나 이세벨에게서 핍박을 당하고 있는지 아느냐? 네가 그러고도 이곳에 한가하게 있을 참이냐?”
너무나 어리석은 엘리야
이제 엘리야가 정작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점차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항상 함께 했다는 진리를 몰랐던 것입니까? 설령 영적으로 탈진했다 쳐도 엘리야가 그 간단한 진리를 모를 리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답을 찾을 때는 그 결론을 유심히 살펴야 합니다. 그 결론은 엘리야가 하나님께 따져보려고 제기한 의심과 원망에 대한 당신의 최종적 답변이므로 오늘날의 신자들도 반드시 붙잡아야 할 절대적 영적 진리가 됩니다.
이 사건은 알다시피 칠천 명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를 남겨두셨다는 것으로 끝납니다.(18절) 이세벨이 엘리야가 사라진 사십일 동안에 틀림없이 적극적으로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를 더 많이 강요했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들이 신자들에게 네 주인이 황제냐 그리스도냐 목숨을 걸고 택일하라고 강요했듯이 말입니다. 그 엄청난 독재와 핍박 가운데도 주님은 칠천 명의 순전한 신앙을 가진 자들을, 주의 일을 할 종으로 당신의 품 안에 숨겨서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것도 전혀 모르고 하나님께 두 번이나 “오직 나만 남았다”고 항변 아닌 항변을 했습니다. 결국 그의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불만은 왜 나 혼자만 일하게 버려두느냐는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을 혼자서 한 번은 상대했지만 두 번은 너무 버겁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책임지려니 외롭고 신도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심령 깊숙이 숨겨져 있는 진짜 불만까지 아시고 시원하게 해소해주었습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연약한 인간인지라 그가 현재 처한 형편과 그로 인한 감정의 기복과 흔들리는 믿음 등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선지자로써, 아니 한 사람의 성도로서 결정적인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혼자였고 혼자서도 충분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고 끝까지 혼자여야 한다는 너무나 간단한 진리를 잠시 잊은 것입니다. 주의 종이란 어차피 혼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곳에 있느냐는 꾸중 아닌 꾸중은 구태여 여기까지 올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처럼 네 혼자서도 얼마든지 이세벨을 상대할 수 있다, 네가 아니면 내가 다른 이를 시킬 수도 있고 심지어 내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 내게는 내가 맡긴 일에 충성하는 단 한명의 종이라도 충분하다. 너는 사람이 많아야 내 일을 더 크게 잘할 줄 기대하느냐? 내가 너에게 그렇게 시시한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하나님은 칠천 명을 남겼다고 격려하기 전에 먼저 엘리야더러 에후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행할 일을 지시해주셨습니다.(16절) 광야 사십일 간 앞으로 어떻게 사역해야할지, 이세벨을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어떻게 대적해야 할지에 대해 묻고 또 물은 것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늙어서 힘이 빠진 선지자가 외롭지 않게 동역자는 물론 후계자까지 지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기도로 후원할 자들과 실제로 당신의 일을 그와 함께 할 자들을 미리 다 마련해두셨던 것입니다.
좁고 협착한 길을 가야 하는 신자
믿음의 일생을 혼자서 걸어야가하는 것이 엘리야와 오늘날의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모든 신자는 세상에서 혼자만 부름 받습니다. 마누라 치맛자락 잡고 따라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더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하나님입니다. 주님의 나라 가는 날까지 혼자서 외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신자의 정체성이자 소명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고 가르쳤습니다. 신자가 걸어가는 생명의 길은 찾는 자가 적다고, 쓸쓸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고 편하고 풍요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지만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신자 앞에 생명과 죽음의 두 가지 길이 양쪽으로 나눠져 있고 신자는 그 중에 생명의 길로 들어섰기에 평생 죽음과 마주칠 일이 없다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길에서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현실의 삶에선 두 길이 함께 섞여 있고 그 방향만 정반대입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서울 지하철역의 계단에서 출퇴근길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출근과 퇴근 인파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숫자가 얼마 안 되기에 계단을 오르든 내리든 엄청나게 힘든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불려 나왔습니다. 세상의 나라의 소속은 아닙니다. 사탄이 미혹 조종 농간하는 흑암과 죄악과 죽음의 나라 백성에서, 하나님이 완벽한 선으로 거룩하게 통치하시는 빛과 의와 생명의 나라 백성으로 그 신분은 분명히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현실의 삶에선 일생 동안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직장을 가지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아이들 뒷바라지 하며 세상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좁고 협착한 길이란 다른 모든 사람이 편하고 풍부하고 안락해지는 길이라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길이 아니라고 하면 절대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러시아워의 인파에 휩쓸려도 자기가 가려는 목적지가 분명하면 절대 반대 방향으로 가지 않듯이 말입니다. 세상 사람처럼 부정 부패 불법 사기 거짓 탐욕으로 자기만을 위하는 인생은 절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혼자 뭐가 잘났느냐 온갖 비방 멸시 핍박이 따르고 소위 왕따가 되어도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쿼바디스 소설에서 주님께 환상을 통해 계시 받고 로마로 돌아가는 베드로가 어떠했겠습니까? 로마에서 탈출하는 인파에 휩쓸려 제대로 전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탈출해 나오는 사람들로선 베드로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을 넘어 미쳤다고 여길 것입니다. “거기는 지금 불바다요 들어가면 죽는데 왜 들어가려는 거요, 예수 믿는 신자들은 사람들이 보이는 대로 잡아 죽여요.”라고 간곡히 말렸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가야하기에 간 것입니다. 자기 양떼를 치고 먹여야만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이 자기보다 앞서 로마로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자는 맡은 직분만 다르지 다 같은 주의 종들입니다. 신자들이 걸어가는 길은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모든 신자는 좁고 협착한 길을 따라 머리 두고 제대로 쉴 틈 없이 외롭고 고달픈 길을 걸어가야만 하고 평생이 그러합니다. 신자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여기거나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구원 받았는지 여부부터 의심해봐야 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신자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합당한 종교를 골라서 내 성품을 조금 의롭게 가꾸고 주위에 불쌍한 사람들 조금 도와주는 정도가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새롭게 주신 영원한 참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짓 생명을 거짓 되게 꾸미면서도 거짓인 줄 모르는 사탄에 미혹된 영혼들에게 진짜로 인간답게 살고 죽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동역자를 반드시 붙여 주시는 하나님
엘리야가 혼자서 갈멜산에서 사백오십 명의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도랑의 물을 핥았다고 성경은 표현합니다.(18:38) 성경이 참으로 정미하고 재미있지 않습니까? 순간적으로 물이 완전히 증발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나무를 때서 그러려면 몇 시간이 걸러야 합니다. 이는 누가 봐도 하나님이 내린 불이라는 것을 부인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백성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고 고백했습니다.(18:39) 또 그 고백을 들은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를 하나도 도망가지 못하게 심판하라고 명령했고, 백성들은 그 명령대로 기손 시내까지 쫓아가서 바알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평소에는 아합과 이세벨의 폭정에 박해 받으며 숨소리도 못 내고 숨어 있던 하나님의 숨겨진 칠천 명과는 별개의 백성들을 여호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미 첫 대결에서도 엘리야는 혼자가 아니었고 하나님은 혼자 일하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무리 거창한 일이라도 시작할 때에는 믿음에 헌신된 혼자라도 충분합니다. 그런 한 명의 정말로 헌신된 순종이 보이면 주님은 반드시 믿음의 동역자들을 붙여줍니다.
그런데 정말로 기억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이세벨이 엘리야가 도망간 사이에 갈멜산 대결에서 바알 선지자를 죽였던 백성들을 가만히 두었겠습니까? 틀림없이 다 잡아서 죽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네가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던 진짜로 엄청나고 심각한 의미를 아셔야 합니다. “네가 그 모든 사람을 죽인 것이다. 네가 얼마나 큰 잘못을 범했는지 알겠느냐? 네가 그곳에 끝까지 남아서 함께 죽으려 했다면 내가 바람 지진 불을 얼마든지 동원해주었을 것이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에게 주신 계시는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외롭고 고달픈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로마의 핍박을 받았기에 숨어서 예배 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로마의 박해는 예수님 돌아가신 후 약 30년이 지나서야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들이 왕따를 기꺼이 당한 모습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이방인 귀족과 왕족들이 자기들이 부리던 종들과 함께 예배보고 교제하며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그들이 속한 사회에선 그런 자들을 보고 미쳤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비방했을 것입니다. 종들도 그렇습니다. 귀족과 왕족은 오히려 복수할 대상인데 여전히 그들의 발을 씻어주며 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었습니다. 노예들 사회에선 그러는 신자노예들의 심사를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거룩한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주님이 부활하신 그 다음날 주일에 예배를 드리니 여호와께 거역하는 이단 중의 이단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신자들을 거룩한 율법을 거역한다고 정죄하고 유대교에서 파문 출교하고 유대사회에서 추방 퇴출시켰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 누렸기에 로마 왕족이나 귀족이 자기들이 부리던 노예를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번듯한 예배당 없이도 모이기만 하면 함께 찬양하며 성경을 상고하며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귀족들이 먼저 믿은 종들에게 자기들 가정사 부부 문제에 관한 고민과 아픔까지도 나누며 기도를 받고는 함께 눈물도 흘렸습니다.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자는 세상 사람과 교회는 세상 어떤 공동체와도 반드시 달라야 합니다. 조금 선하고 의로운 정도가 아닙니다. 출발지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고 가는 방향이 다르며 당연히 그 도착지가 반드시 다릅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예수님께만 미친 자들이 모여서 예수로 인해서만 미쳐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예수님과 한분만으로 기쁨과 생명이 풍성히 넘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이천년 전의 초대교회 교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완전히 미쳤습니다. 그러니까 네로 황제 이후로 격심해진 박해 때 산 채로 맹수 밥이 되거나 화형에 처해지면서도 찬송을 부르며 기쁨과 감사 가운데 죽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는 것은 스승을 세 번 부인한 자신에게 너무나 과분한 영광이라고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전해지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믿는 신자들을 잡아 죽이는 불타는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자기 양 떼만이 아니라 불신 세상에도 끝까지 오직 자신부터 낮아져서 십자가에 죽는 모습으로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본문의 엘리야도 당연히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도행전 2:47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선언합니다. 신분 외모에 차별 없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삶에서도 신분 외모 차별하지 않고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신자들이 세상 속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생활을 했으므로 온 사람들이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볼 수 있었고 또 그래서 그들을 칭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신자들이 세상 앞에 소금과 빛으로 서있으니까 날마다 사람을 하나님이 더해주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악한 세력도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신자는 어차피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의 길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도 못하고 싫어하다 못해 미워합니다. 예수 말고 구원의 길이 없다고 하니 보수꼴통이 되었고 배타적인 종교라고 이미 점 찍힌 상태입니다. 그래도 전해야하고 우리의 생명의 길,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으려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단순히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멸망으로 걸어가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외에는 인간에게 어떤 소망도 위로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우리의 지난 삶을 통해 철두철미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나고 가슴 가득히 기쁨이 충만히 차오르기 때문입니다.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주님이 충만히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단 명의 미혹된 영혼이라도 주님 사랑으로 섬기며 십자가 복음을 순전하게 전하면 반드시 주님이 남겨두신 동역자를 한 명씩 붙여 주십니다. 엘리야가 갈등하고 주님께 따져 물었던 모든 숙제를 주님은 다 해결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아합 왕조를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그 일을 맡을 자까지 세워주겠다, 칠천 명을 붙여줄 테니 외로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죽기를 소원하고 하나님더러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간구한 것마저 하나님은 들어주었습니다. 그것도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있는 채로 하늘로 데리고 갔습니다. 너무나 세밀하신 하나님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맹수 밥이 되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영적 생명은 더 아름답게 산채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평생을 외롭게 걸어가야 하는 신자들에게 이런 영광을 주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당신의 독생자까지 우리를 위해 아까지 않고 내어주신 분입니다. 어찌 신자와 교회들이 원색적 개혁적 십자가 복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외롭다고 힘들다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혼자만의 굴로 피신해 들어갈 수는 절대 없습니다.
11/17/2019
너무나 힘이되고 격려가 되는 설교 글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지난 토요일과 주일(11/16 & 17)에 아리조나주 피닉스시 소재의 아르케처치에 사경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평소 해오던 민수기 강해 대신에 그곳에서 주일 예배 때에 전한 설교말씀을 조금 보완해서 올립니다. 엘리야의 광야 피신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에 본 사이트에 올리는 것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꼭 읽어보시길 강추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