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3:42,43)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목사들

조회 수 1109 추천 수 53 2007.03.27 19: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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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나갈쌔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행13:42,43)



어떤 교회에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서로 사랑하라”는 동일한 내용을 매주 반복해 설교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신자들이 “목사님 왜 같은 내용의 설교만 계속하십니까? 언제부터 새로운 설교를 할 계획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의 대답인즉 “여러분들이 서로 확실히 사랑할 때까지 계속할 것입니다”였습니다.

한국의 한 대형교회와 권위 있는 기독교 기관의 공동 주최로 신학생들의 설교대회를 개최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물론 설교란 목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며 또 교회 성장의 결정적 요인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 이유를 여럿 들 수 있지만 우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인간이 심사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부적절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설교란 인간이 자기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해 준 진리를 성령의 인도에 힘입어 인간은 단지 대언(代言)하는 것입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들이 아주 잘하는 일인 양 작금 교계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일도 본을 보여야 할 두 권위 있는 기관에서 주관하니까 평신도나 불신자들에게는 도리어 잘하는 일로 비춰질 것입니다.  

신자가 주일 설교를 듣는 것은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거의 유일한 신앙 활동인 신자도 솔직히 꽤 많습니다. 스스로 기도하고 말씀 보는 일은 전무(全無)하고 오직 설교를 통해서만 신앙을 키웁니다. 그렇다면 목사는 주일 설교에 생명을 걸어야 하고 정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를 온전히 담아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성공한 설교를 현실적으로 판단할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말하자면 비록 잘못이긴 하지만 만약 설교대회를 연다면 그 심사할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본문처럼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고 청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 임의로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연거푸 들어도 싫증나지 않고 오히려 계속해서 더 듣고 싶어져야 합니다.    

그럼 바울은 대체 어떤 내용(13:17-41)으로 설교했습니까?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섭하신 내용입니다. 특별히 모세의 율법과 대비해 십자가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성경에 예언한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죄에 빠진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음을 선포하면서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요컨대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에 힘 입어라고 했습니다.

가뜩이나 따분해질 수 있는 설교인데도 또 듣기를 청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가장 관심이 많고 갈급해 하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설교를 통해 해결 받고 싶었던 절실한 과제는 바로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매일 죄를 짓기에 그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해결 받을 길이 없습니다. 당연히 영혼의 안식은 실종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이 가장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에 관한 설교를 다시 듣기 청한 자들을 성경이 구태여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성실히 준수하고 죄를 안 짓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그랬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예컨대 매주 “서로 사랑하라”는 설교를 들어도 실제 그 실천은 너무 힘들다는 것을 절감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교인들은 믿음이 성숙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생활이 너무 바빠서 주일예배 외에는 성경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설교에는 반드시 성경 진리의 정수가 흘러넘쳐야 합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은 인류가 어떤 상태에 있었기에 예수님이 꼭 오셔야만 했던가에 대해 밝혀놓은 책입니다. 신약은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일과 그것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설교도 오직 십자가 복음만 증거 해야 합니다.

물론 어떻게 하면 죄를 안 짓고 선하게 살 수 있는지에 관해 설교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엄격히 따져 말하면 사람들이 선하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몰라서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초등학교 1학년용 도덕교과서만이라도 정확하게 지키면 성자를 넘어서 천사라고 칭송 받고 심지어 교회에 나올 필요조차 없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선하게 사는 것을 모르는 데 있지 않고 아무래도 선하게 살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또 그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했거나(불신자의 경우), 잠시 멀리하고 있기(신자의 경우) 때문일 뿐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이 선하게 사는 것도 자신의 의지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간섭에 의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하나님과 그 독생자 예수님에 관해 설교해야 합니다. 바울의 설교도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고 또 설교 후에도 율법을 잘 지키라는 말 대신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목사님들도 신자들이 다시 듣고 싶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신자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현실적 형통의 복을 받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꿔 말해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고 싶어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은혜는 십자가를 통해 신자를 의롭게 만들어 영생을 주시는 은혜였지 현실에서 형통하는 은혜는 아니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는 인간은 갈급하고 허망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형통하려고 교회에 나오는 그것조차도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단지 현실에서 형통해져야 자기 인생에 참 위로와 평강이 임할 것 같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형통해져도 갈급하기는 마찬가지일 뿐 아니라 타락한 이 세상에선 절대로 형통이 평생 계속될 수 없습니다.

현대 교회 신자들의 착각은 현실적으로 형통하면 영적인 위로도 함께 임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의 착각은 죄와 죽음을 선포하면 신자들이 싫어해서 다음 주부터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다른 이야기는 몰라도 십자가 사건은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모든 문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고는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만이 인간에게 참 평강과 참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설교는 반드시 죄와 죽음과 하나님의 상관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그 관계는 골고다 언덕에서 시작하여 그곳에서 끝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 설교대회에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다툰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이야기를 하는 자가 일등이어야 합니다. 대신에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 지에 주목한다면 인간의 테크닉을 따질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진리를,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 받은 목사가,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혀 전하고, 듣는 자도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도 오직 성령님께 의지할 뿐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인간이 점수 매길 수 있다는 발상부터 비기독교적입니다.

문제는 아주 간단합니다. 목사부터 예수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하지 않으면 자연히 예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현대 교회 설교의 문제는 오히려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감동을 줄 수 있는지”에만 주목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목사를 통해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고 이미 의인이 된 자는 그리스도를 닮아 더 자라게 만드는 역사입니다. 감동은 금방 없어지지만 변화는 그 바뀐 상태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요컨대 설교에서 십자가 예수가 빠진 것이 문제이지 내용과 방법을 조금 개선한다고 올바른 설교가 결코 되지 않습니다. 예수 없이 감동만 주는 설교는 혹시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킬지 몰라도 진짜로 거듭난 십자가 군병은 오히려 줄게 만들 것입니다. 예수 이야기는 주일마다 아무리 반복해도 사람들은 또 듣고 싶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니 신자도 매주 죄와 세상과 사람들 앞에 져서 넘어지는 일이 너무나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3/28/2007

김형주

2007.03.28 01:49:10
*.173.42.18

아멘!!!

조인구

2007.03.28 02:43:22
*.91.50.82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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