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고전4:8-10)
불신자 시절에 저는 사도 바울의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에 그의 회심은 제 믿음을 견고케 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최악의 예수 반대자를 최상의 예수 찬성자로 만들었고 또 그로 하여금 예수 믿는 진리의 핵심을 다 저술케 하셨습니다.
또 그런 저작을 위해서 하나님은 미리 그를 택하여 모든 필요한 교육을 받고 종교적 체험을 겪게 했습니다. 당연히 그의 서신서는 너무나 논리 정연하고 예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과 뜻이 그의 품성과 기질 안에 그대로 녹아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 내 분쟁에 휩싸여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특유의 표현법으로 권면하고 있는 본문도 마치 그의 육성으로 직접 듣는 것 같습니다. 먼저 그 분쟁을 왕 노릇하는 것에 비유하여 칭찬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반어법(反語法)으로 통렬하게 야단치고 있습니다.
왕 노릇의 뜻은 ‘쉬운 성경’ 번역으로 보면 이해가 더 빠릅니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이미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없이도 이미 여러분은 왕 노릇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 노릇 할 수 있도록 차라리 여러분이 진짜 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컨대 왕이 아니면서 왕처럼 행세했다고 합니다.
분쟁을 왕 노릇에 비유한 것이니까 먹고 사는 것이 풍족하고 화려한 뜻과는 거리가 멀다고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온전히 성숙하지 못하면서 은사가 많이 나타나니까 아주 경건해진 양 착각한 것입니까? 물론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맥상의 주제인 교회 분쟁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왕은 매사를 자기 임의로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마찬가지로 교인들이 그렇게 했기에 분쟁이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도들 없이 왕 노릇 했다고 합니다. 만약 자기들이 그곳에 있었더라면 절대 벌어질 수 없고 또 벌어져선 안 되는 사태라는 것입니다. 제 삼의 사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바울과 아볼로 지지파로 각기 나뉘어져 서로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특정 지도자를 앞세워 분쟁이 벌어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해당 지도자를 거의 신격화할 때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지도자 없이도 그랬다면 누군가가 지도자의 지시를 받아 대리인 행세를 했거나 아니면 자신이 그 지도자 수준에 도달했다고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아볼로가 전자를 행했을 리는 없고 또 바울이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라고 지적한 것을 보면 그들 거의 모두가 후자의 행태를 보였던 것입니다.
이제 왕 노릇한 것 즉 분쟁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바울과 아볼로를 하나님 대신의 자리에 세웠고 나아가 자신들이 그 대리인을 자처했으므로 자신들마저 신격화한 셈입니다. 또. 두 사도는 그렇게 하라고는 단 한 번도 가르친 적이 없었으므로 교인들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임의로 판단하는 엄청난 교만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상대방이 잘못되었다고 정죄하는 오만불손한 태도마저 나타냈습니다.
바울과 아볼로가 있었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이유는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신자에겐 오직 성삼위 일체 하나님만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요점은 신자는 절대 어떤 누구(아무리 신령한 사도라도)도 아닌 그분의 뜻에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할 수 있도록 차라리 여러분이 진짜 왕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사도의 본심이 아님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 반대 의미로 통렬하게 풍자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착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정말 왕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곰곰이 따져보라는 설명을 덧붙인 것입니다.
“미말에 두어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하며 후욕과 핍박과 비방을 당하여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는 왕을 너희가 도대체 본 적이 있느냐? 사도인 우리가 왕이 아니라 진짜 왕이 따로 있고 그분이 우리를 이렇게 했지 않느냐? 그런데 우리의 가르침을 받은 너희들은 오히려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한 척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너희가 왕이냐?”
바울의 논리의 예리함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후욕을 당해도 그 사람을 축복하고 핍박을 당해도 참고 비방을 당해도 그에게 권면하는 왕을 너희가 세상에서 단 한 명이라도 보았느냐? 정말로 우리를 추종하려거든 너희도 우리와 똑 같이 해야 하지 않느냐?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 편하고 배부르게 앉아서 서로 자기를 자랑하고 상대는 헐뜯고 있으니 도대체 너희들이 하는 짓은 논리적으로 따져도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지 않느냐?”
그럼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 논리의 예리함을 자랑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도 왕 노릇한 셈이 됩니다.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그들을 깨우치려는 것입니다.
“너희들 착각대로 우리가 왕이라면 도대체 세상 왕으로선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느냐? 핍박하는 자를 오히려 권면하고 축복할 수 있게 된 연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느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성도의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은 오직 그분을 따르는 것이지 않는냐? 언제 어디를 가도 머리 둘 곳이 없되 오직 우리 자신은 낮추고 죽여서 절망에 빠져 있는 죽어가는 영혼은 높이고 살리는 일을 해야 하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의 하는 짓을 보라. 동일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입술로는 고백하면서 스스로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되었네? 왕 되신 예수님은 외면하고 너희가 스스로 높여 왕이 되어 있구나? 그런 복음은 절대로 없다. 당신을 따르려면 날마다 십자가에 죽으라는 것 외에 그분이 가르친 것은 없다. 너희가 미혹된 영혼에 새 생명을 전하기 위해서 찌끼 같이 되어 미말에 서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느냐? 그렇지 않고는 전 우주의 유일하신 왕이신 그분을 따르고 그 왕국을 기업으로 받는 길은 절대 없다. 세상 사람이 다 가는 넓고 편안한 길과는 정반대의 좁고 협착한 길을 그것도 사람들의 핍박을 거스르고 오히려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가야한다.”
바울의 이 책망이 당시 고린도 교회에만 해당되는 말입니까? 오늘날의 교회를 본 그에게서 우리가 과연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을까요? "너희가 우리가 다 죽고 없어져도 왕 노릇은 아예 하지 않는구나. 교회 안에는 오직 사랑의 섬김만 있구나. 또 정말 머리 둘 곳 없이 미말에서 주님만 따르면서 만물의 찌끼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구나. 그러면서도 오히려 핍박한 자를 권면하고 축복하니 너희야 말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도다. 정말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애끓는 심정으로 눈물 흘리며 고린도서를 기록했던 보람이 있구나.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이신 그분께만 경배와 찬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리기를 소원한다.”
8/7/2007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은 이가 적음이니라. (마7:13~14)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십니다. 아멘!!!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아니함이요. (요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