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기독교의 구원을 얻는 데는 인간의 자격과 공적이 전혀 요구되지 않고 오직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너무 포괄적으로 정의(定意)되고 있습니다. 즉 십자가 구속의 교리를 알아서 믿기만 하면 구원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를 감당하고 죽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지성적 동의(awareness)와 이제 그 예수를 믿기로 다짐하는 의지적 결단(acceptance)이 합친 정도를 두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성령의 간섭 없이도 이뤄질 수 있습니다. 구원은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한 죄인이 자신의 지정의적 영역 내에서 단순히 생각으로 구원을 얻으려 결단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게 믿으려 결단한 것으로 구원이 된다면 그 믿음은 구원을 이뤄낸 인간의 공적이 되어버린다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구원에는 하나님이 한 죄인의 영혼에 직접 간섭한 사건이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믿으려고 결심한 것이 믿음이 아니라 이미 믿어지게 된 것을 알게 된 것이 믿음입니다. 전자는 영적 체험의 유무와 상관없이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단순히 객관적으로 인정한 것이라면 후자는 그 진리가 자신의 주관적 체험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성령이 인간의 영을 먼저 변화시킨 일이 반드시 있은 뒤에 사람이 자신의 그 변화를 감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구분이 정확하게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영의 변화라도 인간은 결국 지정의적 차원에서만 인식할 수 있기에 마치 스스로 믿은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영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구원이지만 주관적 체험을 통해 이뤄지므로 본인은 분명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나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품성이 갑자기 거룩해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예수님, 인간, 인생에 대한 관점이 변화 이전과는 정반대가 됐다는 것을 압니다.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천하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철저한 자각과 함께 그런 자신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대신 죽이셨다는 사실이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어집니다. 또 다시 말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사실을 믿으려 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알고 찾아오셨고 그분만이 베풀 수 있는 사랑으로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어떤 형태로든 생생한 체험을 통해 확신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내가 그분을 영접하려 결단하기 이전에 그분이 나를 먼저 영접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사랑 앞에 온전히 항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새롭게 이어질 자신의 인생에 예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아무 의미와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만이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궁극적인 능력이자 근원임을 알기에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예수님을 증거하며 성령님의 인도만 받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또 실제로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는 행동이 뒤따르게 됩니다.
요컨대 구원을 얻는 참 믿음에도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믿음의 결단은 필연적으로 따르지만, 그 이전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구속의 진리가 자신의 생생한 체험이 되어서 아무 의심 없이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바꿔 말해 구원을 얻은 자는 믿어보려는 노력 내지 결단을 되풀이 할 필요나 이유가 전혀 없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아직도 내가 이 모양인데,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데, 내가 제대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 또 하나님이 이런 나를 용납해 주실까?”라고 의심하거나 죄책감에 빠지는 것은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서만은 결코 뛰어난 영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 인간적, 종교적 겸손이긴 해도 엄밀히 말해 하나님 앞에선 지독한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도덕적 정화 노력 혹은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해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에도 혹시 이런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완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과연 이런 나를 받아 주실까?”라는 의심은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나 같은 천하의 죄인도 용서하고 사랑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와야 온전한 믿음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너무나 놀랍고 신기해야(amazing grace)만 믿음이 제대로 출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유일한 것은 “예수님만이 자신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때뿐만 아니라 구원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정말로 연약하고 부패한 자라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님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기에 주님을 닮아가는 일도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인식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도덕적 종교적 결단과 실행이 아무리 고상하고 신령해도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은 절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결코 신념이 아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자연적으로 의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믿으려 노력하고 결단하지 않지 않습니까? 자식은 부모가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무 교육을 받지 않고도 저절로 알기에 한 치의 의심 없이 부모를 믿고 그 뜻대로 행동하는 법입니다. 신자는 아이가 부모 곁에 있으면 안락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기에 부모 곁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려 노력해야 합니다.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아무리 그런 노력에 찬 물을 끼얹는 것 같을지라도 새롭게 믿으려 노력할 필요 없이 주님의 십자가만 다시 바라보면 됩니다. 바울처럼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주님을 부모처럼 믿기만 해도 그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5/2/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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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사랑합니다.
목사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