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26-29) 불신자를 부끄럽게 만드는가?

조회 수 970 추천 수 28 2007.07.03 20:3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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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기독교 복음은 처음부터 끝가지 인간의 죄의 문제와 연관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또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사단에게 빼앗겨 죄악으로 더럽혀진 영혼을 깨끗케 하여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로 그것도 하나님께서 직접 바꾸는 작업이 구원입니다.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보는 복음은 필연적으로 현실세계가 나아지는 표적을 찾는 자에게는 거리낌이 되며 정신세계가 넓어지는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는 미련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런 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 초대교회에 모인 자들의 면면은 본문에서 말하듯이 주로 가난하고 무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이상하지 않습니까? 가난할수록 현실의 형통을 더 바라고 무식할수록 지혜를 구하는 것이 상식이며 또 실제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와 지혜를 결코 약속하지 않는 기독교에 왜 그런 자들이 몰린 것입니까? 그들이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해도 속으로는  여전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부와 지혜를 구했던 것입니까?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들어졌기에 영적으로 아주 신령하고 품성도 거룩할 수 있었습니다. 죄로 타락하여 세상 신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광채가 그 마음속에 비치는 것을 막고 있어 그 본래의 형상이 어그러져버렸고 그 후 참으로 복잡하고도 모순 된 존재로 변했습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동물과 다르게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지정의가 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동물도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분명히 지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두 가지 목적으로만 그 지정의를 사용하게끔 창조 되어졌습니다. 동물 스스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지정의를 종합해서 운용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지정의를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종합하여 운용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갈매기는 조개를 공중 높은 곳에서 딱딱한 바위에 여러 번 떨어트려 그 껍질이 깨어지게 합니다. 높은 데서 떨어트리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지성이며 까서 먹고야 말겠다고 여러 번 시도하는 것도 상당한 의지력입니다. 그러나 생존과 번식, 이 두 가지 목표는 갈매기 속에 본능으로 이미 내장된 것이지 따로 자신이 선택한 사항이 아닙니다. 갈매기가 조개를 따선  불쌍해서 자기가 굶는 한이 있어도 살려주는 법은 절대 없지 않습니까?  

스스로 지정의를 종합 운용하는 능력이란 다르게 말해 인격입니다. 그런데 지정의를 운용하므로 당연히 지정의 너머에 있어야 하고 또 그래서 지정의가 인식할 수 없으므로  영혼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말하듯이 자신의 감정, 지성, 의지와 다르게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정의와 상관없이 그것들을 종합 운용하는 인식할 수 없는 힘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 내면의 힘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하면 영혼이 되며 인간관계에선 인격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이루려면 지정의에만 의지해선 안 됩니다. 예컨대 찬양 부르니까 가슴이 뜨거워지고, 성경 읽으니까 뭔가 깨우침이 있는 것 같고, 봉사 열심히 하니까 보람이 있는 것만으로 그분과 교제가 이뤄졌다는 보장은 없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지정의만으로도 종교 생활은 얼마든지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이루려면 반드시 신자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하나님 쪽으로만 자신의 지정의 전부를 종합적으로 운용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 그분이 너무나 좋아서, 그분이 아니고는 내 삶이 아무 것도 아니며, 한 순간도 제대로 가치 있게 살 수 없음을 절감하기에 그분 자체를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인간 존재의 전부가 오직 그분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그분의 영과 항상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지정의의 중심에서 그 셋을 통괄하되 그 영역을 초월한 한 인격이 절대적으로 거룩하며 실재하는 하나님의 인격과 순간순간마다 교통하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의 생존과 번식뿐만 아니라 그 모든 행동, 말, 사고가 그분에 의해 그분을 위해서 그분의 힘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중심에 모셨기에 찬양, 기도, 말씀, 예배를 절로 하고 싶어지지 그것들을 했기에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파스칼이 말했듯이 오직 하나님 것으로만 채워져야 할 그분을 위한 그분이 만들어 놓으신 공간이 따로 있습니다. 그 공간이 채워지려면 현실이 형통하고 내면이 지혜로워지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곳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형통해지고 지혜로워진다 해도, 하나님을 모르는 자를 그렇게 해줄 리는 없기에 이는 이미 구원 받은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지만, 채워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고 말씀으로 믿음이 굳어져도 그분 당신을 소망하는 대신에 표적과 지혜가 우선 목적이 되어선 그 영혼이 갈급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이 주로 모였다고 해서 그들이 결코 표적과 지혜를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이 땅에서 헐벗고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을 주로 돌보아주었고 또 그런 자들이 먼저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절대로 그들이 그 섬김에 지정의적으로 감동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외적 형편과 정신적 각성과 관계없이 예수님으로 인해 스스로는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았던 영혼의 바로 그 부분이 충만해짐을 체험했기에 예수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중심에 그분을 모셔드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고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동물과는 전혀 다른 참 인간답게 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구제소도 아니요 부자들의 경연장도 절대 아닙니다. 오직 그 영혼이 가난해져 예수님 없이는 자기 인격의 파탄 상태가 영원히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절감한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인격이 파탄 상태에 이른 자가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지각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십자가  보혈로 씻음을 받아야만 합니다.

당연히 교회는 문벌, 부귀, 명예, 학식을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비천함, 가난함, 무식함, 교양 없음으로 사람이나 하나님의 동정을 사거나 그분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개선하려 모이는 곳도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 부르심을 입었기에 그리스도에게만 모든 찬양과 감사와 경배를 돌리는 곳입니다. 이제는 예수에 속했기에 세상의 어떤 조롱과 멸시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음도 무릅쓰며 십자가 은혜만 사모하며 기꺼이 모이는 곳입니다.

나아가 신자가 자랑하지 않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자들을 택해서 세상에서 그 반대에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하나님은 신자로 그들보다 더 지혜롭고, 더 강하고, 더 귀하고, 더 행세하고, 더 있게 만들어서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들 또한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더 형통하고 지혜롭다고 해서 시샘은 할지언정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부끄러워진다는 것은 자신이 소유한 것의 가치가 다른 사람의 그것에  너무 못 미친다고 여겨져야만 생기는 감정입니다. 언제든 자기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비슷해지거나 금방 추월할 수 있다고 믿는 일로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는 법입니다.  

불신자들은 십자가 복음이 형통과 지혜와는 거리가 멀다고 이미 거부한 자들입니다. 또 그런 부분을 찾고 구하는 데에는 선수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런 면에서 신자보다 열등하다고 여겨 부끄러워할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에 모인 신자들이 도리어 불신자보다 자기들이 형통과 지혜에 월등해져 그들로 부끄럽게 여기게 만들어 달라고 열심히 구하지 않습니까?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신자를 보고 하나님이 부끄럽게 여길까 두렵지도 않는가 봅니다.

하나님이 불신자들더러 부끄럽게 여기게 하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형통과 지혜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 생각 자체를 부끄럽게 여겨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이 파탄 상태가 되었고 영혼이 부패되었기에 동물처럼 생존과 번식만을 목표로 사는 방식이 얼마나 인간으로서 부끄러운지 알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동물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는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인간은 동물보다 조금 더 고급한 지정의를 갖고 있어서 더 고급한 생존과 번식을 누리는 존재라고 굳세게 믿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짐승에서 진화된 존재가 인간이지 창조주가 당신의 형상과 닮게 만든 거룩한 존재라는 생각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신자가 그런 불신자를 부끄럽게 만들려면 참 인간답게 살고 있는 모습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길 말고는 없습니다. 전인격을 동원해 동물과 다르게 이 땅의 반대편, 즉 영원한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을 향하는 불타는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형통과 지혜가 많든 적든, 특별히 그것들이 모자랄 때에 그것으로 인해 전혀 영향 받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을 두었기에 하나님에게는 오직 경배와 찬양으로 사람에게는 온유와 사랑으로만 대해야 합니다.  

아니 이미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예수 믿기 전에는 빈 채로 있던 그곳에 성령님이 내주해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죄성과 욕심과 게으름이 그렇게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신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다시 져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이 신자를 볼 때는 자기들이 사는 방식과 생각하는 근거가 너무나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나아가 자기 존재 자체가 예수를 알지 못하면 썩어져 영원토록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찔림을 주어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내면에 오직 예수를 향한 불타는 중심이 있습니까? 그래서 세상 사람으로 부끄럽게 만드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신자로 시샘 내게만 하려고 표적과 지혜를 구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라도 거꾸로 그들을 시샘내면서 자신은 오히려 부끄럽다고 여기지는 않는지요?

7/4/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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