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출석중단이유(3)-스스로 알아서 천국을 찾아가라.
(의심 3) 천국 문만 열어놓은 하나님인 것 같다.
그리고 저에게 하나님 이라는 분은 그저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나머진 네가 알아서 해라" 며 팔짱끼고 내려다보기만 할 뿐, 자기 죄 때문에 부딪치고 깨지고 쓰러지며 사는 인간들을 구경하다가 죽으면 심판대 앞에서 법대로 처벌하는 신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문은 나 하나님이 열어놨으니 이제 나머지는 인간인 너희들이 알아서 천국 문까지 좁은 길 타고 알아서 가라고 방치하는 거죠.
(변증 3) 기독교의 하나님은 점수 채점관이 아니다.
저는 서른세 살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까지 지독한 안티크리스천이었고 형제님이 질문하신 내용 이상으로 기독교에 대해 반발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한 후로, 특별히 성경을 제대로 배우고난 이후로는 제가 가졌던 의심과 불만이 아주 불합리했고 사실은 그 자체로 모순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형제님이 지성적이지 못하고 어리석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제 경우에 정작 비평해야 할 대상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다는 뜻입니다. 그 동안 기독교 외부에서 주어들은 표피적인 지식들이나 제가 갖고 있던 선입관과 편견에 따라 정당한 비판이 아닌 악의적인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 고유의 경전이 있듯이 기독교도 신구약 성경 66권이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한 내용을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럼 그 신앙이 잘못이라고 따지려면 성경의 이런저런 내용이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틀렸다고 말해야만 건전한 비평이 됩니다. 바꿔 말해서 형제님이 갖고 있는 모든 의문들이 성경의 진리를 오해했거나 미처 몰랐기 때문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구원은 “예수님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천국 문을 열어놓고 사람들더러 스스로 알아서 좁은 길을 걸어가라고 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본인이 직접 밝히신 구원의 길인데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중생의 역사를 일으켜 주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니까 너무나 힘든 구원의 길을 인간이 알아서 걸어오도록 방치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37-40)
주님은 오히려 당신께서 구원을 책임져주시고 마지막 날의 부활까지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것” 즉,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대속의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인간의 죄 값을 완전히 다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천국 문까지 좁은 길을 타고 가는 것은 이미 예수를 믿어서 제자가 된 자들이 필연적으로 걸어가야 하는 인생길입니다. 구원 얻은 후의 신자의 현실 삶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실제로 초대교회 신자들이 다 그랬습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형통과 안락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보장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심판을 받게 되는 죄의 본질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윤리적 종교적 죄를 짓는다고 심판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최초 인간 아담 부부에게 주신 선악과 금령의 의미도 그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한 것이 단순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에 심판을 주시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아담더러 동산의 모든 것을 임의로 처분해도 되지만 주인이신 하나님이 따로 있다는 사실만은 절대 잊지 말고 항상 당신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이 선악과 금령의 뜻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에덴을 독차지하여 자기 멋대로 살고 싶어졌습니다. 인간인 자신을 하나님보다 위에 올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자 오히려 죄책감 수치심 공포심만 생겼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됨으로써 영적인 죽음을 맞은 것입니다. 스스로 그 죄를 없애려 무화과 잎 치마로 가려봤지만 전혀 효력이 없어서 숲속으로 자꾸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실을 다 알고도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선악과 금령을 어긴 형벌이 영적죽음을 뜻하지 육체적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가 아담이 숨은 곳으로 먼저 찾아와서 네가 무슨 잘못을 범했느냐고 따지지 않고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창3:9) 아담이 숨은 곳을 다 아시고 찾아온 것이므로 그 장소를 묻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는 아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가 내 사랑의 품을 벗어나는 순간 네가 지금 절감하고 있듯이 불안하고 두려울 뿐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네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서 빨리 당신의 품 안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담과 이브는 잘못을 서로 떠넘기기 바빴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직접 지어 그들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구원을 예표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최초부부도 오직 당신의 은혜로 구원해주었습니다.(창3장을 다시 참조하십시오.)
최초 구원부터 인간에겐 아무런 공적이 없고 자격도 전혀 되지 않는데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벗어난 자리에서 다시 그분의 자녀의 자리로 되돌려주는 것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해주십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외면 배척한 죄에서 구원 받는 것입니다. 과부가 바늘로 자기 허벅지를 찔러가며 욕정을 누르며 극복해내는 것처럼 윤리적 죄들을 힘겹게 이겨내어야 구원 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 공적이 없고 자격이 안 되는데도 구원을 주었다는 것은 구원 후에도 여전히 윤리적 종교적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된 그 관계는 변경 취소가 절대로 없기에 언제든 어떤 죄를 지어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부모 쪽에서 가식을 내치는 법은 없으며 잘못한 자녀가 용서를 빌면 언제든 용서해주듯이 말입니다. 나아가 신자가 된 후에 그런 윤리적 죄들을 스스로 이겨내기가 힘에 겨우니까 말씀과 기도라는 수단을 주신 외에 성령님이 내주해주셔서 도와주십니다.
“자기 죄 때문에 부딪치고 깨지고 쓰러지며 사는 인간들을 구경하다가 죽으면 심판대 앞에서 법대로 처벌하는 신”은 다른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신입니다. 평생토록 선행을 많이 한 자만 천국을 보내주는 구원입니다. 그런 신은 점수만 매기는 채점관에 불과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인간을 온갖 죄 속에 던져두고 손을 놓고 방치한 신입니다. 그런 신은 신으로서 행한 일이 하나도 없기에 믿고 따를 의미와 가치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직접 죄인을 구원하러 이 땅에 내려오셔서 모든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셨기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믿음으로서 하나님을 다시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형제님도 성경을 다시 잘 공부하셔서 예수님의 은혜가 심령 가운데 임하여서 하나님을 다시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8/10/2021)
Yeon님 제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들이 많아서 답변이 상당히 지체되고 있어 죄송합니다. 실은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정말 진지하게 제 답변과 관련 글들을 천천히 묵상하면서 꼭 읽어보시라는 뜻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주신 질문들 하나씩 끝까지 답변 올릴 테니까 잊지 않고 읽어봐주시기 원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