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기적(2) -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155)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마14:13-21)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거의 모든 신자가 간과하는 사항은 도시락을 한 개 바친 소년이 받은 복이 여전히 한 개뿐이었다는 점이다. 믿음이 좋아 자기 가진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다 받쳤더니 수 천, 수 만 배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니다. 공동체 전체적으로는 그런 복을 받은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바친 그 본인이 엄청난 보상을 받았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네 복음서가 다 기록한 유일한 기적이기에 성경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상당히 중요하고 풍부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신자가 그 풍부한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대박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 기억한다. 거기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다르게 생각하는 측면도 많다. 여러 오해 가운데 하나는 제자들의 믿음을 아주 야박하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이성적 판단이 나쁜가?
제자들이 사람들로 밥을 사먹도록 돌려보내려 했다는 것부터 문제 삼는다.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그 수많은 사람을 어떻게 먹일 수 있겠는지 반문했다고 해서 예수님의 능력을 불신했다고 탓한다. 스승은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고 고군분투했는데 반해 제자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자기들 편안함만 추구했다고 비판한다.
당시에 밥 한 끼 굶는 것은 예사였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도중인지라 더 그랬다. 요즘도 수련회 마지막 날의 한 끼 정도는 금식하는 것으로 마치지 않는가? 날이 어두워져 무리들이 배고플 것이므로 집회를 마치고 빨리 밥 먹게끔 조치를 취하자고 제자들이 먼저 제안했었다.
제자들은 무리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았다. 요즘 같은 야간조명 시설도 없는 터였다. 그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들의 이성을 동원하여 최적의 판단을 하였고 또 그대로 말한 것이다. 아무런 도덕적 하자가 없었다. 구태여 믿음과 연결시켜 따질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신자가 지정의를 사용하여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그에 입각해서 행동하는 것을 종종 믿음이 없거나 적다고 비판하는 경우를 본다. 인간 이성을 믿음에 마이너스 작용만 하는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처음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을 때는 한 죄인의 지정의를 넘어선 영적 차원에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간섭이 일어난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이해가 되지 않던 십자가의 진리가 어느 순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싫던 예수가 특별한 이유 없이 좋아진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 바로 이성적 차원과는 무관하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를 믿은 후에는 신자는 자신의 지정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지금 현재도 아무 생각 없이 설교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솔직히 지난 설교를 듣기 전까지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도시락 하나를 바친 소년이 받은 것도 단지 하나 뿐이었다는 사실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럼 믿음이 없었거나 적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믿음을 너무나 강조하다보니 이성적 판단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함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성과 믿음
인간의 지정의는 하나님이 주신 너무나 좋은 선물이다. 이성 자체는 선하고 의로운 것이다. 그 이성을 잘못 적용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단적인 예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먹고 마시는 차원에 국한시켜서 현실적으로 대박 같은 축복을 받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또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뜨겁고도 강한 믿음만 가지면 그런 기적을 누릴 수 있다는 헛된 소망과 기대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믿음이 이성과 모순 상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혜라고 인간의 지정의는 무시하고 독단적, 강압적, 일방적으로 베풀어지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신자의 제한적인 이성을 충분히 아우르는 것이지, 그것과 별도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동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신자가 자신의 이성을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지혜에 부합되도록 올바르게 세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 또한 당신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는 가치관에 따라 자기 이성을 활용하는 신자에게 더 많은 은혜와 권능을 베푸신다. 정확히 말해서 그런 신자라야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더 깊이 깨닫고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신자의 가치관을 당신 중심적으로 세우고 또 그에 따라 지정의가 움직일 수 있도록 당신께서 간섭하고 역사하신다.
불신자들이 아무리 풍족하고 호사스럽게 살고 있어도 허무하고 갈급한 이유가 그들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 가운데 검소하고 절제하며 사는 자도 많다. 심지어 무소유의 미덕을 실천하는 자도 있다.
대신에 그들의 지정의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의도와 목적대로 정돈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예로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무엇을 한들 참 만족을 느낄 수 있겠는가? 정작 문제는 신자마저 불신자 시절의 습성이 남아서 이성과 믿음을 온전히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르신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그것과는 다르고 높다고 선언한다. 이사야서의 후반부인 40장부터 66장까지는 당시로선 미래에 오실 메시아인 예수님이 수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올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 주 내용이다. 인용한 구절의 문맥상의 뜻도 그래서 구원의 길이 율법을 준행한 인간의 공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짧은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을 동원해서 잘 따져 보라. 그 동안 무엇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높고 크니까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와 다르니 높고 크다고 말한다. 순서 하나 뒤바뀐 것 같아도 그 안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실감하겠는가?
하나님의 높으심은 당연히 그분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뜻한다. 하나님의 크심을 하나님의 다르심보다 앞에 두고 이성을 작동 판단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 왜 이 간단한 문제조차 해결해주지 않습니까? 제가 얼마나 오래 동안 간절하게 기도했습니까? 이 심한 불경기 가운데도 힘에 넘치게 헌금했고 일부러 짬을 내어 열심히 교회 봉사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툭하면 이런 식의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의심이 생기고 또 쉽게 제거할 수도 없다.
그분이 그저 크기만 했지 나와 다르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기 때문이다. 신자라면 당연히 환난에서의 시급한 구원은 물론, 큰 비전을 품고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뜨겁게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고 완벽한 다른 계획이 있을 수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믿음의 출발은 하나님이 크시다보다는 오히려 다르다는 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적 하나님이다. 그 말은 인간도 절대적으로 인간일 뿐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에게는 한 가지 경우에도 수백만 가지 방안이 가능함을 인정하는 것이 바른 믿음이다.
우리 눈에는 사방이 완전히 막혀 출구가 전혀 없는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수백만의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다. 아니 신자가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수록 더 오묘하고 신기하고 풍성하며 유익한 길이 준비되어 있다. 정말로 보잘 것 없이 초라한 여건 가운데도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은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드러난다.
우리가 기도하는 그대로 하나님이 꼭 이루주신다고 믿고 죽기 살기로 기도하면 어떻게 되는가? 너무나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가능성을 한 개로 묶는 셈이다. 하나님이 더 완전하고 풍성하게 당신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수백만 가지 은혜를 신자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해 그만큼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의 확률은 낮아지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수백만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이를 서로 다르게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은혜를 베푸신다. 이 지구상에 그 사람 단 한 명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대우하신다. 특정 신자가 주변 여건이 이전과 하나 변화되지 않은 채 이미 겪었던 일과 동일한 사건에 처해도 그 은혜는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제한 받을 수 없는 존재다. 완전히 자유로운 유일한 분이다. 자유라고 해서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분의 지정의는 절대로 뒤죽박죽으로 작동하지 않으신다. 100% 완벽한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에 바탕을 두고 역사하기에 완전히 자유로운 분이다.
완전히 자유로운 예수님
완전히 자유로운 하나님의 증거를 예수님에게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한 문둥병자가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마8:3)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하면서 고쳐주셨다. 말하자면 피부가 썩고 짓물러 고름이 줄줄 흘러도 전혀 개의치 않고 손을 갖다 대셨다는 뜻이다.
당시 문둥이는 어느 누구도 상종(相從)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동을 할 때는 “leper”(문둥병자)라고 큰 소리를 쳐서 사람들로 미리 피하도록 해야 했다. 율법에서도 공동체에서 격리시키라고 명했다. 그 격리는 치료와 전염방지의 목적이었을 뿐임에도 유대인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취급했다. 구원의 가능성이 아예 제로라고 여겼던 것이다.
“손을 내밀어”라는 표현은 전혀 망설임 없이 손을 쭉 뻗었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피하는 문둥이에게 그랬다. 문둥이 입장에선 그런 대우는 이전에나 앞으로나 예수님이 유일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문둥병을 고치는 능력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식은 죽 먹기에 불과했다.
그분에겐 다른 인간과 전혀 다른 면이 있었다. 인간에겐 눈 닦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는 성품이었다. 하나님만이 갖는 무한하고 일방적이며 영원히 변함없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푼 것이다. 그분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성령의 은사와 권능에 사로 잡혀 있었다.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오직 하나님 그분의 것이었다.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로선 자기에게 직접 손을 대는 스킨십 교제는 생전 처음 겪는 것이었다. 생애 최초로 다른 사람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는 사랑을 받은 것이다.
반면에 회당에서 손이 마른 자를 고쳐줄 때는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법을 동원하셨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마12:13) 손이 굽어서 펴지지 않던 자를 향해 단지 말씀 한마디로 명했다. 손을 끌어당기거나,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회당 안에 모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안식일 계명을 위반하는 현장을 잡으려고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환자를 고쳐주는 것이 옳은지 물어본 직후였다. 그러자 주님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도 건져주는데 양보다 사람이 더 귀하지 않느냐 반문하면서 치료해준 것이다. 단 당신의 손발은 가만히 그대로 둔 채로 즉, 안식일 노동의 계명을 전혀 범하지 않은 채 완벽하게 낫게 하셨다.
무작위적이 아닌 하나님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다른 말로 복음서 기적들도 단순히 당신의 큰 능력을 발휘해 엄청난 축복을 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은혜를 베푸셨던 것이다. 그 사람에게 가장 적합하고 유익할 뿐 아니라, 당신의 당신 되심을 가장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말이다.
오병이어 기적도 고유의 유별난 은혜가 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말씀 한 마디로 바비큐 통닭이나 스테이크를 배불리 먹이거나, 호텔 뷔페처럼 성찬을 근사하게 차려 놓거나, 우주인이 먹는 알약 같은 것 하나씩을 나눠줄 수 있는 분이다. 아예 그 한 끼를 금식기도 시간으로 선포하면서 “허기가 사라져라!”고 명할 수 있었다. 그분은 사람들로 아무 것도 먹지 않고도 포만감을 느끼게 하고 더 건강하도록 만들 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똑 같이 도시락 한 개씩 나눠 먹게 했다. 당시 사람들이 당시의 상황에서 당신에 대해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당신께선 인간과는 전혀 다르고 또 그래서 크신 분임을 충분히 깨닫게 하려는 뜻이었다.
하나님에겐 모든 이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동일한 은혜가 없다는 것은 당신의 은혜는 결코 무작위적(random)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 자리, 그 때, 그 경우,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하고 가장 유익한 사랑을 베푸신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축복하는 순서, 방식, 장소, 사람, 시간, 등은 당신의 완벽한 디자인에 따라 이뤄진다. 시작에서 과정을 거쳐 결과까지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단 한 치의 오류가 없다.
그 은혜가 각기 다르다는 것은 신자 인생의 365일이 절대로 같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하루도 동일한 날이 없다. 내일은 오늘보다 높은 것이 아니라 다르다. 다르기에 그 은혜가 더 새롭고 풍성해지는 것이다. 정교하고 완벽한 계획에 따르기에 그 결말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반드시 드러난다. 신자에게도 절대적 선이 되기에 환난 중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환난 또한 그분의 완벽한 계획 가운데 포함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하나님이 나를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동행하시는데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최소한 손해 볼 일은 절대 없을 것 아닌가?
너무나 치사한 인간들
그런데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쳐주자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마12:14) 오직 자기들 자존심과 체면이 훼손되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도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따를 뿐 아니라 백성들의 본이 되어야 할 지도자들이 평생의 불치병을 치료해 주는 의로운 자를 도리어 살인하려 들었다.
회당에 그 병자가 와 있음을 바리새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또 예수님이 오시면 당신의 성품상 안식일임에도 그를 틀림없이 고쳐 주리라 예상했다. 예수님께 올무를 씌울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미리 공모했던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추악하고 부끄러운지, 거기다 어리석기까지 한지 예수님과 너무나 대조된다. 주님은 그들의 음흉한 계교를 다 아시고 손도 꼼짝하지 않고 말씀만으로 고침으로써 그들의 함정을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었지 않는가?
인간이 이렇게 치사하고 추한데도 그 죄 값을 감당하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 짐작하겠는가? 이 땅의 그 어떤 것으로도 그 거리를 메울 수 없다. 하나님은 각기 다른 기적에 각기 다른 은혜를 베푸실 만큼 인간과는 다르신데, 그 다르심의 실체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확연히 드러내 보이셨다.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직접 그 몸으로 설명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제발 알아먹으라는 뜻이었다. 이성을 동원하여 따지고 또 따져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해서 높으시다는 것은 불신자, 아니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지금껏 그분의 높으심만 붙들고 믿음을 키우라는 권면만 들어왔다. 그래서 믿음이 자랐는가? 기도가 응답이 척척 되었는가? 큰 비전을 품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영광을 실제로 보았는가?
또 만약 이런 질문에 선뜻 “예!”라고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서 여러분의 믿음이 없는 것인가? 약해진 것인가? 그 답은 “아니다.”이다. 단지 하나님의 다르심을 모르거나 잊고 있을 뿐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하나님의 다르심에 대해서 생각하기 싫었던 것이다. 내가 원하는 내 길과 내 생각대로 반드시 기도가 응답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한 것이다.
올바른 믿음이란?
다시 말하지만 믿음이란 하나님은 인간과 너무나 다르기에 그분에게 수백만 가지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분은 도무지 수치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신 분이다. 이 진리가 단순히 입에 붙은 공치사가 되어선 안 된다. 그분의 길이 나의 길과 수백만 가지 이상으로 다르기에 계속 그분의 길이 무엇인지 따져 봐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내신 그 사랑의 깊이, 높이, 길이, 넓이를 헤아리고 또 헤아려야 한다. 내 삶의 세밀한 구석까지 어떻게 그 사랑이 작용하고 있는지 이성을 동원해서 잘 살피고 분석해야 한다. 그 각기 다른 은혜에 대해서 신자도 각기 다르게 반응해야 한다. 불신자 시절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앞으로 자기 인생에 각기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 요컨대 내 비전을 하나님의 힘을 빌려 실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갖고 계신 비전이 내 삶과 존재와 일생을 통해 온전히 실천되도록 내 모든 이성을 동원해 반응해야 한다.
인간이 지정의 한계에 갇히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죄도 아니다. 인간이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모르고 자기 이성으로 자기 일을 해결하려는 것이 나쁜 것이다. 신자의 경우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자기 이성으로 고안한 한 가지 길만 고집하고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다. 그것도 믿음이 좋고 뜨겁다는 미사여구로 포장해서 말이다.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 있던 제자들의 경우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소년이 바친 도시락 한 개를 주님이 순간적으로 2만 개로 바꾸어 주리라고는 기대와 추측은커녕 꿈도 꾸지 못했다. 제자들이 그 전에 여러 번의 기적을 경험했어도 각기 다 다른 내용이었고, 지금도 전혀 새로운 상황이었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18절)는 스승의 말을 들었을 때에 비로소 뭔지 모르겠지만 어떤 일을 도모하실 모양이라고 막연히 예상을 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가 이만큼이나 된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다. 제자들이 어렴풋이나마 예수님이 뭔가를 일으킬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한 것 자체가 아주 좋은 믿음이다. 예수님이 갖고 계신 수백만 가지의 가능성에 대해 자기들의 생각을 오픈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뭔가 분명히 오묘하고 엄청나면서도 선한 일이 지금 일어날 것이라고 설레며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또 그 일이 최소한 자기에게 절대로 손해가 아니고 도리어 유익이 될 것이라고는 믿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 무엇보다 주님이 오묘한 결과를 100% 도출해 내실 분이라는 사실만은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누구에게 은혜를 베풀지 구체적인 사항만 몰랐을 뿐이다. 참 믿음이란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 마음의 상태다. 주님의 선한 열매는 분명히 열리고 자기에게도 좋아질 것이 틀림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의 믿음은 어떤 수준인가? 우리가 미약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크다는 사실만 끝까지 붙든다. 그럼 문제되는 것은 하나뿐이다. 언제 내 요구대로 이뤄줄지 그 시기다. 기도 응답될 때까지는 자나 깨나 초조하게 염려할 뿐이다. 반면에 자기가 요구하는 시기와 방식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엄청나게 은혜를 다 베풀었거나 베풀고 있다는 사실은 도무지 알지 못한다. 굳센 믿음만 붙들었지, 이성의 분별력은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를 알겠는가?
하나님의 크심보다 다르심부터 믿는 신자는 다르다. 사전에 미리 예상, 기대, 판단할 필요가 전혀 없다. 아무리 나름대로 잘 예상했어도 완전히 무용지물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수백만 가지 가능성을 어떻게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다 추정할 수 있겠는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분이 어떻게 다를지 전혀 모르고 상상조차 빗나가기에 더더욱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소원하는 모든 것을 두고 뜨겁고 간절하게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 단 그 결과는 주님께 온전히 맡기면서 말이다. 이번에는 대체 얼마나 오묘하며 위대하고 아름답고 풍성하며 유별난 방식으로 내게 은혜를 베푸실지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그 온전한 드러나심을 끝까지 기다리면서 말이다.
11/25/2012 남가주가스펠 교회 주일 설교
이성을 꽁꽁 묶어놓고선 무조건 기적만 바라며 기도했던 일, 또 그 이성으로 제 자존심과 체면만 세우기 급급할 때가 많고요, 그래서 뒤죽박죽되어진 생각들로 참으로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말씀을 읽으며 이성을 하나님의 맘을 헤아려 알아가는데 사용하고 말씀에 자꾸만 적용하여서 제 구미에 맞는 것만 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같은 모습에서 이젠 벗어나 모든 상황 속에서 아버지의 역사하시는 부드럽고 아름다우신 손길과 눈길을 늘 느끼길 소원하며 기도하는 자로 자라가길 원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