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기적(3) - 지금도 참된 오병이어를 체험하라.
마태복음강해 (156)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마14:13-21)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렘브란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그림의 가장자리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고 전해진다. 자기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라는 의미였다. 이처럼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나 성경의 기사로만 머물지 않는다. 신자의 개인적 체험으로 다가온다. 살아 역사하는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나 그 인생이 뒤집어짐을 경험한다. 그 후 자신의 삶의 유일한 소망이 예수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된다.
성경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 독자라면 렘브란트처럼 기록된 모든 사건에 참여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살펴보고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예외는 아니다. 21세기의 최첨단 과학 시대에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단순히 가능성만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렘브란트처럼 이천 년 전 그 때 그 현장에다 자신을 대입시킬 수 있다.
오병이어 기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러려면 무엇보다 예수님이 도시락 한 개를 갖고 어떻게 2만 개로 바꾸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예수님이 축사하자마자 떡 다섯 개의 이만 배인 십만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만 배인 사만 마리가 산더미 같이 쌓인 것은 아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이 줄지어서 군대에서 배식하듯이 받아먹은 것도 아니다.
물론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도록 비디오로 촬영하듯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니다. 그 구체적인 상황은 아무도 모른다. 문자적 설명이 없을 때는 행간(行間)의 의미를 추적해야 한다. 또 그런 추측이 가능할 수 있는 힌트를 성경은 상당히 제공하고 있다.
우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19절)라고 말하고 있다. 넓적한 떡을 피자 조각 자르듯이 뗀 것이다. 그러나 떡 한 개를 이만 조각으로 즉, 부스러기 가루를 나눠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 언제 2만 명이 다 받아먹겠는가? 또 먹고 배가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추측 가능한 가장 타당한 방식은 떡 한 개를 피자처럼 12조각으로 나누면 한 조각이 금방 완전한 새 떡으로 커지고, 또 그 새 떡을 12등분하면 한 조각이 다시 온전한 하나의 떡으로 변하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 혼자서 떡 떼기를 십만 번이나 반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화처럼 손이 선풍기 돌듯이 빨리 움직이면 그 모양도 이상하고 곁에서 떡을 받아 나누는 자도 그래야 한다. 예수님은 대량으로 카피해내는 자동기계처럼 기적을 베푼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6절)고 명하셨다. 그런데 열두 제자들이 떡을 나누려 해도 여전히 한 사람당 10만 번(떡 다섯X2만)의 1/12 즉 만 번 이상을 떼어야 한다. 이 또한 거의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많은 사람이 짧은 시간 내에 함께 식사를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합리하다.
성경은 당시를 “저녁이 되매 .... 이미 저물었으니”(15절)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고 기도하러 혼자 산에 올라갈 때도 “저물매”(23절)라고 설명한다. 저녁을 두 번 맞아 마치 다른 날 같지만 하루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대인에게 저녁을 둘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서너 시경에 어스름해지는 것이 첫째 저녁이고, 완전히 해가 져서 컴컴해지면 둘째 저녁이었다.
말하자면 그 많은 사람들이 첫째 저녁과 둘째 저녁의 사이인 한두 시간 안에 식사를 다 마쳤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제자들뿐 아니라 그 무리들도 기적에 동참시켜야만 가능한 일이다. 제자들이 떡을 떼서 열두 사람에게 한 조각씩 주면 그 조각이 완전한 떡으로 커지고, 또 그 사람이 떡을 떼서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그 조각이 큰 떡 조각으로 변하는 일이 연속적으로 반복해서 일어난 것이다. 궁금해서 한번 계산을 해봤다. 열둘의 5제곱이면 248,832가 된다. 한 명이 떡 하나를 열두 조각으로 나누는 일을 4-5번만 하면 그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온전히 하나가 되는 축제의 현장
이제 여러분이 그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고 가정해 보라. 내 옆 사람에게서 떡 한 조각을 받아들었더니 금방 크게 변하고, 그것을 내가 열두 조각으로 나눠서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더니 동일한 일들이 일어났다. 그 자리에 있는 2만 명 전부가 그런 기적을 일으키는 자로 동참한 것이다. 얼마나 신나고 감격적이었을까?
맨 끝에 위치한 자들도 그 떡을 받아먹으면서 또 떼었을 것이다. 더 이상 떼지 않아도 되는 줄은 모르고 떼고 있으니 제자들이 이리 저리 다니다가 이제 충분하니 그만 떼라고 고함질렀을 것이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20절) 먹고 남은 떡이 아니라 조각이라고 했다. 마지막 조각은 큰 떡으로 바뀔 필요가 없으므로 제자들의 이제 충분하다는 고함 소리와 함께 예수님이 기적이 작동되는 일을 멈춘 것이다.
이를테면 한 광주리에 백 조각만 담겨도 열두 광주리에 1,200 조각이 남는데, 마지막 줄의 1200명이 떡을 떼려다 멈춘 것이다. 그래서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21절)는 기록이 바로 이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만한 숫자의 사람들이 먹고 남으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 기록이 얼마나 정미한가? 또 그렇게 정미한 까닭은 사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거짓은 앞뒤 설명 사이의 모순과 상충이 어디선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지 않는가?
다시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그 많은 사람들이 짧은 시간 내에 함께 먹을 수 있는 방식이어야 했는데, 상기의 추정이 가장 개연성이 높다는 뜻이다. 아니 이 외에는 사실상 합당한 방안이 없다. 지난주에 설명 드린 대로 이성과 믿음이 결코 상충하지 않는 법이다.
어쨌든 오병이어 기적에서 성경이 확실하게 말하고자 하는 몇 가지 진리는 있다. 도시락 한 개를 바친 소년이 받은 것도 하나였을 뿐이다. 또 이만 명 모두도 똑 같이 한 개의 도식을 받았다. 모두가 떡을 떼고 또 떼어서 나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처음 소년의 것을 나눈 것뿐이다. 예수님이 기도하였더니 도깨비 방망이 뚝딱 하듯이 떡이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도시락을 나눠준 것도 아니다. 결국은 자기들 것을 자기들끼리 나눈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모두가 기적의 수혜자가 된 것이 아니라 기적의 창조자가 된 것이다.
다른 말로 천국에나 있을 법한 일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본 것이다.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권능을 맘껏 또 양껏 누렸다. 그 기적의 현장에는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지위의 높고 낮음, 출신 성분의 고귀함과 비천함, 재물의 많고 적음, 남녀노소의 구분, 주인과 종의 차별 등등은 단 하나도 개입되지 않았다.
떡을 떼서 나눠 먹을 동안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을 것이다. 열심히 떡을 떼어서 어린이와 노인과 거동이 불편한 자들에게 갖다 주었을 것이다. 혹시라도 이전에 시기 질투하며 미워하고 있던 자들도 그 순간만은 모두가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때를 상기해보라. 16강, 8강, 4강으로 올라가면서 국민 모두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 목청껏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날만은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축하하며 기쁨을 나눴다.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심지어 외국인들과도 절로 어깨동무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가식, 위선, 불의, 다툼, 저주라곤 전혀 개입되지 않는 축제의 한마당이 크게 벌어졌다. 지금 회상해도 가슴이 뛸 정도였다. 오병이어의 현장이 바로 그랬다. 이 사건만 네 복음서가 기록하는 유일한 기적인 이유다.
오병이어에 대한 곡해
지금껏 우리는 성경에서 이 사건을 접하면서 어떻게 이해해왔는가? 예수님이 축사한 것에만 신경을 쓴다. 주님이 떡을 떼었다는 점은 간과하기 일쑤다. 무엇보다 너희가 나눠주라고 명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글을 읽을 줄 몰라서인가? 게을러서 첫째 저녁까지 반만 읽고 둘째 저녁의 나머지 기사는 나중에 읽는가? 그보다는 우리의 관심이 몽땅 주님의 축사에만 가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했다. 필연적으로 네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대상에 관심을 쏟게 된다는 것이다. 떡을 받아먹은 것 즉, 물질에만 관심을 쏟았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돈이 많은 것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음을 절감하게 된다. 또 가능한 검소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기도할 때도 화려한 사치보다는 일용할 양식만 구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축사하신 데에만 관심을 쏟는다는 것은 나는 어려운 불경기 가운데 힘 써 바치고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주님이 수십 배로 불려 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바쳤고 기도했으니 신자로서 할 바 다했다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이 그것을 받아 하늘을 우러러 축사해주시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또 그 일은 하나님의 몫이기에 신자는 그저 입만 벌리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기도마저 응답 안 해주시면 다음 주부터 교회 안 나오겠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어르고 달래다 못해 떼를 쓰다가 협박까지 한다.
예수님은 도깨비 방망이 휘두르듯이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다. 대신에 이미 가지고 있던 떡을 맨 먼저 떼어서 나눈 것뿐이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시범을 솔선하여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로 따라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 신비하고 엄청난 기적의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권능으로 주도했지만, 이면적으로는 사람들로 마음의 보물을 내 소유를 늘리는 것보다 가진 것을 나누며 함께 사랑하는 일에 두라고 가르친 것이다.
요컨대 이 기적의 모든 초점은 “너희 것으로 너희가 나눠주라”는 데에 모인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내 떡만 떼면 나만 손해인 것처럼 여겨지는가? 그래서 오병이어 기적에서 진짜로 기억해야 할 진리가 있다. 내 것을 떼서 나눠주었는데도 줄지 않고 오히려 풍성히 늘어났다는 것이다. 아무리 나누고 나누어도 전혀 부족하지 않고 오히려 남았지 않는가?
새 성전 예배의 실현
에스겔서 40-47 장에는 에스겔 선지자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에게 주실 새 성전의 환상을 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새 성전의 이 곳 저 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마지막에는 특이한 장면이 나온다.
성전의 전면에서 물이 조금씩 새어 나온다. 일천 척(천 피트)이 지나면 물이 발목까지 차고, 그다음 일천 척에는 무릎까지, 또 다음 일천 척에는 허리까지 차다가, 마지막 일천 척이 지날 때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어버린다. 중간에 다른 물이 유입 내지 합류된 것도 아니다. 물이 나오는 근원은 한 곳뿐이다. 그럼 넓은 곳으로 멀리 퍼져갈수록 수심이 얕아져야 하는데도 거꾸로 더 깊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친 백성이 성전에서 진정으로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면 그분의 은혜와 권능이 폭포수처럼 부어진다는 것을 예표한 것이다. 성도의 매일의 삶에도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교제 동행하면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더 의롭고, 아름답고, 건강하며, 즐거운 인생으로 바뀐다는 것을 상징한다.
에스겔에게 보여준 새 성전이 예수님이 재림하는 마지막 때에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초림 때에 이미 이 땅에 도래했다. 예수님이 베푸신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이 바로 그곳이었다. 당연히 지금도 신자의 삶과 그들이 모인 공동체에 동일하게 실현될 수 있다.
처음 예수님이 떡을 떼어 열두 제자에게 나눠준 것은 에스겔 성전 전면에서 물이 새어나온 모습과 같다. 열두 제자가 열두 조각씩 떼어서 144조각이 된 것은 물이 발목까지, 또 그 열두 배인 1728 조각은 무릎까지, 그 열두 배인 20,736 조각은 허리까지 찬 것이다. 마지막 십만 조각 넘게 뗀 것은 사람이 능히 건널 수 없는 강이 된 것과 방불하다.
오병이어 기적에 이만 명 모두가 동참해서 똑 같이 떡을 나눠먹었을 때의 그런 감격은 이 세상에는 없다. 떡을 배 불리 먹어서가 아니다. 12 조각의 다섯 제곱인 물경 24만 배 이상의 복을 받아서도 아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을 그들의 주인으로 모시어 마음의 보물로 삼자 하늘에서 성령의 은사가 비둘기 같이 강림한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통치 즉, 천국이 누룩처럼 번져 나간 것이다. 그들 사이에 남아 있던 모든 갈등, 상처,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저주 등이 그 순간만은 눈 녹듯이 사라졌던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에서 모든 일이 시발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예수님이 행하신 방식대로 따라 서로가 서로를 위해 섬기자 기쁨과 감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났다. 에스겔에 보여준 새 성전이 그곳에 지어지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그 때에 이미 실현된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드러날 이 땅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미리 보고 들은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고 권면한 그대로의 진정한 영적 예배가 드려진 것이다.
새 예배의 모습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자가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가 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전제 조건이 있다. 무엇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롬12:2) 이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가? 마약, 폭력, 섹스, 낙태, 동성애 같은 죄로 타락한 모습들인가? 그런 죄들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 어느 세대 어느 지역이라도 인간이 모인 곳에는 항상 들끓었다. 소돔과 고모라와 니느웨가 그랬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스라엘이, 그것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마저 강도의 굴혈로 바꾸었다.
현재 21세기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들 사이에 사랑이 실종된 것이다. 이웃 간에 서로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왜 동성애, 마약, 도박 같은 추악한 일에 심취하는가? 그 원인은 주로 어렸을 때에 부모나 가까운 사람에게 학대당해서 참 사랑에 갈급한데도 도무지 채울 길이 없었기 때문이지 않는가? 더 근본적으로는 참 사랑의 근원인 하나님을 모르고 거부했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해 신자들이 그들에게 전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을 탓하려는 뜻이 아니다. 신자의 가정에도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가 단절되는 경우가 많다. 세대 간의 문화 차이나 이민 사회에서의 언어 장벽이 그 근본 원인이 아니다. 말이 안 통한다는 핑계로 부모 자식 간에 대화가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참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부모치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러나 부모의 욕심으로 자식에게서 대리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고민하고 갈등하는지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이 왜 아이패드, 스마트폰을 부모보다 더 사랑하고 페이스북으로 전혀 모르는 사람과 친구 맺어 교제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대표적 원인으로 신자 부부가 밖에서는 경건하고 사이좋은 척하다가 집에만 오면 그저 싸우고 남남 같이 지내니 아이들이 그럴 수밖에 더 있는가? 그들이 자기 부모에게서조차 참 사랑과 온전한 믿음을 발견하지 못하는데 어찌 그들 스스로 그런 사랑과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가 말이다.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것, 죽기보다 미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미 그 정답을 다 말했다. 혼자 고립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군대나 감옥에서도 가장 심한 벌은 독방에 가두는 것이지 않는가? 계속해서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빠삐용이라는 아주 오래 된 영화가 있다. 결국에는 절해고도의 감옥에서 뗏목을 타고 탈출에 성공하여 망망대해를 혼자 헤쳐 나가는 자유의 몸이 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그러나 그 주인공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단순히 자유가 아니었다. 바다 위에 혼자 있어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뗏목을 타고는 결국은 육지에 다다를 것이다. 온전한 사람끼리 서로 살을 맞대며 살아가는 것 즉, 사람 냄새가 너무 그리웠던 것이다. 자기 목숨을 걸더라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참된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빠삐용 같은 이 세대.
오늘날의 이 세대는 모두 빠삐용이다. 모든 사람이 사랑에 갈급하다는 뜻은 바로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분이 인간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온전한 인간 구실을 못하게 한 것이다. 혼자 고립되면 가장 불행한 존재가 되게끔 한 것이다. 사랑이 없이는 자유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해 이브를 돕는 배필로 지어서 짝을 맺어 주었다.(창2:18) 결혼과 가정 제도를 제정한 것만 아니다.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담이 하나님을 거부하게 되자 이런 인간 본연의 모습은 찌그려졌고 인간 세상에서 참 사랑이 실종되기 시작한 것이다.
참 사랑이 내 것을 아끼지 아니하는 것만이 아니다. 말하자면 내 혼자만 현실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사랑에 갈급해 있기에, 사랑을 베푸는 사람조차 그러하기에, 반드시 먼저 능동적으로 사랑해야만 참 사랑이 된다는 것이다. 똑같이 불쌍한 남에게 내가 예수님께 받아 누리는 사랑으로 채워줄 때에 오병이어처럼 모두에게 차고도 넘치는 사랑이 임한다는 것이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3,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고 있는 신자는 나이가 거꾸로 먹는다. 육신적인 활력은 당연히 떨어지지만 그 속사람은 도리어 강건해지는 법이다. 정신이 맑아지고 영적 깊이가 늘어난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여러 일들을 맡겨주신다. 젊었을 때보다 더 바쁠 수 있다. 얼굴에 빛이 난다. 영적인 감화력으로 얼마든지 주위에 거룩하고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사는 미국 할머니가 있었다. 삶의 의욕을 다 잃고는 어서 빨리 남편 있는 천국으로 가고만 싶었다. 견디다 못해 목사님께 상담을 드렸다. 그 목사는 성경보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지 않았다. 평생을 그렇게 해온 할머니인데 새삼 그런 종교적 충고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대신에 가장 잘 할 수 있고 또 그 일을 할 때에 가장 기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할머니는 누구보다 soup 하나만은 최고로 맛있게 끓일 자신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럼 매일 soup을 끓여 홈리스나 가난하거나 아픈 사람들에게 나눠줘 보라고 권면했다. 그러자 할머니의 모든 우울증이 다 사라졌다. 또 그렇게 하면서 복음을 전해주고 자기보다 더 불쌍한 자를 위해 기도해주었더니 이전보다 더 행복해졌다. 남편과 함께 살던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과 충만함이 넘치게 된 것이다. 부부간의 사랑과는 다른 인간 창조의 뜻에 부합하며 하나님께로만 기원을 돌릴 수 있는 참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에스겔 성전에선 일천 척을 네 번 지나자 사람이 능히 건널 수 없는 성령의 강물이 흘러 넘쳤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선 열두 조각씩 네, 다섯 번만 제곱했더니 이만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천국을 맛보았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내 안에서 역사하는 대신에 이웃에게 그 십자가 참 생명이 역사하도록 네, 다섯 번만 참 사랑을 실천해보라. 아니 이웃까지 갈 것도 없다. 가정 안에서 자기 아내나 남편과 자식들에게, 친척들과, 교회 성도들에게 먼저 그래 보라.
바로 이 세대에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에 얼마든지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구태여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의 자리까지 안 가도 된다. 불쌍한 이웃을 위해 진심으로 다섯 번 이상 기도해 보라. 이웃에 대한 어떤 편견과 선입관은 물론 내 쪽에서의 이해타산과 욕심도 전혀 개입시키지 말고 기도해보라. 그랬는데도 천국을 누리지 못한다면 죄송하지만 오병이어를 동일하게 기록한 네 복음서와 성경이, 나아가 그 기적을 일으킨 예수님이 잘못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웃이나 성도들 까지 갈 필요 없다. 사랑하는 십대의 자식들을 위해 아무리 비즈니스 하느라 바빠도 따로 시간을 내어서 다섯 번만 함께 시간을 보내어 보라. 자식을 내 뜻대로 조종 내지 가르치려 들지 말고 진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이해해주려는 모습을 그들이 확실히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해보라. 그러면 그 동안 단절되었던 대화의 창구는 물론 사랑의 교통이 활짝 재개될 것이다. 스스로 주일에 교회 따라 가겠다고 앞장 설 것이다.
교회의 부흥도 경건하고 심오한 프로그램들이 일으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신자들의 “으샤! 으샤!” 하는 뜨거운 열정이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복음이 살아 있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아무리 문제와 고난이 겹쳐도, 아니 인간의 죄가 늘거나 준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그에 따라 줄거나 늘지 않는다. 그분의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은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하다.
신자가 하나님께 바쳐서 수십, 수백 배의 복을 받으려는 믿음, 기대, 예상이 앞서면 아무런 기적을 맛보지 못한다. 내가 가진 것을 떼서 이웃과 나눌 때에 그들이 속한 공동체 위에, 바친 자에게만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넘친다. 성도와 교회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에 비로소 오병이어 같은 참 부흥이 일어나는 법이다.
12/2/2012 남가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설교
정말 오병이어의 기적의 설교는 아무리 들어도 관성의 법칙이 제게 적용되어 눈에 보이는 수치로 손꼽아지게 되고 물질적인 것에만 집중되는 제 시선을 거두지 못하기 일수입니다. 끈질기에 따라 다니는 눈에 보이는 것, 그것도 산더미처럼 쌓여져 많은 사람이 보며 놀라워하며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칭송하길 바라마지 않는 이 맘, 이 맘 속엔 하나님과 함께 높아지고 싶은 속내를 굳이 숨겨가며, 그렇게나 그게 아니라 설명을 들어도 그때 뿐, 다시 보이는 수치에 맘이 빼앗기는 이 이상한 관성의 법칙...
모든 사람은 빠삐용... 사랑은 스스로 키워낼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 몸 깨뜨리시며 부어주신 그 사랑을 받아 나눕고 또 나눕고 또 받은자가 나눕고..창일한 물이 되어 보혈의 강에서 함께 헤엄치는 은혜, 눈에 보이는 그런 수치적 사랑이 아니고 전혀 새로운 사랑, 위에서 부어주신 그 사랑에 겨워 함께 또 겨워 나눕는 그런 사랑의 잔치자리가 그리운 우리 모두는 참 사랑에 목말라 하는 빠삐용임을...
귀한 말씀으로 다시금 맘을 추시리며 관성의 법칙을 거스리는, 연어처럼 세상을 거스러 오르는, 도무지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사랑이기에, 부어주신 예수님의 몸 깨뜨리시며 떼어주시는 그 사랑을 나눕는 자로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는 빠삐용이 되길 기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