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기적(5) - 우상숭배의 정확한 의미

조회 수 1887 추천 수 24 2013.04.09 17: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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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의 기적(5) - 우상숭배의 정확한 의미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4-15)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

본문은 오병이어 기적이 끝난 직후에 보인 사람들의 반응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이다. 기적이 일어난 후의 첫 번째 결과다. 첫째 결과라고 말한 것은 이것 외에도 이 기적을 두고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설왕설래가 많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인간이 반드시 먹어야 할 양식에 대한 진리를 설파했지만, 항상 그러하듯이 당신의 말씀을 유대인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바람에 논쟁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요한복음은 무려 50절(6:22-71)에 걸쳐 그 논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기적 자체를 설명한 15절(6:1-15)까지 보태면 총 65절을 오병이어를 설명하는데 할애한 셈이다. 참고로 이 기적에 대해 마태는 9절(14:13-21), 마가는 10절(6:35-44), 누가는 6절(9:12-17)만 기록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양이다. 요한이 그렇게 길게, 그것도 기적의 실제 과정보다 그 의미에 훨씬 더 중점을 두고 기록한 까닭은 당시 사람들이 이 기적에 대해 그만큼 크게 오해했다는 뜻이다. 그들과 성정(性情)이 같은 후대 독자들도 동일한 오해를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표적을 본 유대인들이 드러낸 첫 반응은 “이(예수)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했다. 단순히 세상에 올 선지자라고 하지 않고 ‘그’라는 정관사를 붙였다. 이전에 구약성경에서 오시리라고 예언되었던 바로 그 선지자라는 뜻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신18:15) 장차 나와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이라고 모세가 예언함에 따라 유대인들은 메시아는 반드시 모세와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믿었다.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 선지자” 즉,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지칭했다. 주님을 메시아라고 인정한 것이다. 아주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당신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 아시고 그 자리를 피하셨다. “억지로 잡아”라고 했으니 당신의 생각은 그들과는 달랐다는 뜻이다.

그럼 예수님은 그들의 임금이 되어줄 생각이 없었다는 말인가? 주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고 풍자적 비하의 뜻이긴 해도 실제로 십자가에 그 팻말을 달고 운명하셨지 않는가? 과연 주님 스스로 당신의 메시아 되심을 부정한 것인가? 그 답을 얻으려면 모세가 어떤 배경에서 그 예언을 하게 되었는지부터 살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피신한 첫째 이유

모세가 이 예언을 한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입경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 무엇보다도 그곳 거민들의 가증한 행위를 절대 본받지 말라고 명한 후에 이 예언을 했다. 따라서 이 예언의 문맥상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가나안의 우상숭배 사제들과 완전히 대조되는 참 선지자가 오실 것이라는 뜻이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신18:9-14)

이제 참으로 흥미로운 결론에 다다른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모세 같은 선지자라고 인정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인정을 거부했다. 당신이 “그 선지자”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들이 자신을 그렇게 인정하게 된 근거가 틀렸다는 것이다. 모세 같은 선지자란 가장 먼저 우상숭배 사제와 전혀 반대가 되는 선지자이어야 함에도 그들에게 그런 확고한 인식이 없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의 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 등과 동등으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들이 메시아까지는 아니라도 참 선지자로만 여겼어도 예수님이 도망갔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물론 표면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런 낌새라곤 없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점을 치거나, 길흉을 묻거나, 요술이나 마술을 행하여 보라거나, 굿을 해달라거나, 귀신이나 죽은 혼을 불러올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오병이어 이적으로 너무나 신령한 떡과 물고기를 받아먹음으로써 예수님께 놀랍고도 큰 신적 능력이 있음을 인정했을 뿐이다. 그것도 그들이 먼저 떡과 물고기를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주님이 먼저 주셨다.  

말하자면 그들이 예수님을 “그 선지자”라고 칭한 것에는 어떤 악의적 의도도 없었고, 오히려 합당한 존경과 감사가 포함되었다. 거기다 구약성경의 전체 맥락을 알고 있는 바탕에서 나온 온당한 종교적 인식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두 말 않고 자리를 피했다면 그들의 인식이 당신의 마음에 전혀 안 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는 그 첫째 이유는 그들은 단지 현실의 삶을 형통케 해줄 정치적 메시아만 소망했기 때문이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에서 구원하려는 예수님의 뜻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이는 틀림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살펴본 대로 그들 스스로는 분명히 의식하진 못했어도 사실은 우상을 숭배하는 태도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주님만은 아셨던 것이다.
  
우상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신자들이 우상숭배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깎아 만든 신상에 경배하거나, 기괴한 바위나 큰 나무 혹은 엄청난 자연 현상을 신으로 섬기거나, 귀신을 숭배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니다. 거기다 인간 이성이 깨인 이래로 우상과 귀신은 인정하지 않으며 합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주술과 미신 등은 아예 정상 종교로 취급하지 않게 되었다.

우선 우상은, 정확히 말해 우상으로 대표되는 다른 신은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그분의 피조물이다. 그분 외에는 어떤 것도 절대 인간의 경배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도 너무나 당연히 다른 신들이 없음을 잘 아신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께서 만드셨다. 영적존재마저, 사탄처럼 악하든 간에, 당신이 만드셨다. 하나님이 만드신 천사들 중에 가장 뛰어났던 천사장이 당신의 자리에 오르려다 벌을 받고 세상으로 쫓겨난 존재가 사탄이다. 영적 차원이든 물질적 차원이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당신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또 그 모든 것을 당신께서 영원토록 통치하신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여년 최선을 다해 섬겼지만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시기를 당해 박해받을 판국까지 되었다. 결국 처자식과 모든 소유를 거느리고 도망쳤는데 아내 라헬이 아비 라반의 집 우상인 드라빔을 훔쳐 나왔다. 라반 일행이 쫓아와 샅샅이 뒤졌으나 라헬이 앉아있는 낙타 안장 밑에 숨긴 우상을 찾을 수 없었다.

우상은 바로 그런 것이다. 라반은 자기 가문의 형통을 책임져줄 신이라고 믿었지만 한갓 아녀자의 엉덩이에 깔린 채 아무 힘을 쓰지 못했다. 마침 라헬은 경수(經水)가 나서 아비가 왔음에도 낙타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무례를 범한다고 사과했다. 성경은 여인의 경수는 부정한 것으로 취급하는데 그 우상은 여자 엉덩이뿐 아니라 부정한 것 아래 깔려있는 셈이다.

드라빔이 힘이 약해서가 아니다. 아예 힘이 없기 때문이다. 힘이 없는 것도 힘을 빼앗겼거나 노쇠해진 탓이 아니다. 처음부터 우상 자체가 없기 때문에 우상과 관련해선 어떤 길흉사도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상은 길흉사를 관할하기는커녕 알아맞히지도 못한다. 간혹 과거사를 알아맞히거나 미래를 점치는 것은 사탄이 우상을 이용해 인간을 속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우상숭배는 사탄의 부하가 되는 첩경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절대 금하는 것이다.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은 어떠했는가? 라반은 야곱의 재산을 다 빼앗고 그 일행을 해코지하려고 7일 간이나 추격해왔다. 그러나 마지막 날 밤에 하나님이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창31:24)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자의 영에까지 간섭해 직접 말씀하시고 그 생각과 말과 행동 모두를 주관하신다. 오직 당신의 택한 자녀를 보호, 인도하기 위해서다. 신자는 당신 외에 절대 눈길마저 주지 말라는 뜻이다.    

로켓을 보내 우주의 근원까지 탐사해보려 노력하는 이 시대에 어떤 형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절하면서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다. 아직도 일부 종교에선 유사한 종교 행위를 하지만 단지 어떤 영적존재를 상징하거나, 인간 소원을 투사(投射)하여 가시화시킨 것이라고 여길 뿐이다. 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자체가 신이라고는 간주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형상을 만들어서 절하는 단순한 외적 형식이 우상숭배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일하신 창조주 참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자들은 자신이 우상 숭배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실상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혹은 그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신자들에게도 그런 대상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그중의 대표는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바로 돈이다. 돈이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비근한 파워로 불신자는 물론 많은 신자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이 돈도 사실은 우상이 아니다.  

인간다움의 본질

“(첫째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둘째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3-6)

흔히들 우상숭배를 금하는 계명은 둘째라고 알고 있지만 제1계명부터 그러하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가 유일신 사상만 강조하려는 뜻이 아니다. 첫째 계명이 그런 뜻이 되려면 하나님께서도 당신 외에 다른 신이 있다고 인정했어야만 한다. 본문을 곰곰이 따져보면 하나님이 다른 신들을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예 없다. 아니 다른 신 자체가 없기에 인정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다른 신은 그냥 없는 것이다. 그에 대해 하나님이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들이 다른 신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신을 “너희에게 있게” 하지 말라고 했다. 너희가 다른 신을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더러 그런 신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바로 첫 계명부터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뜻이다. 너무나 당연하고도 동일한 맥락에서 제 2 계명에도 하나님이 인간 스스로 형상을 만들고 새긴 것을 두고 당신과 능력이 버금가는 신으로 인정한다는 뜻은 단 한 치도 포함되지 않았다.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는 방식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아무리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뛰어나도 인간은 여전히 일개 피조물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아무 생명도 없는 물질을 사용해서 깎아 만든 것이 어떻게 신이 되겠는가?  인간은 또 자기보다 못한 존재 앞에 왜 절하는가? 너무나 어리석지 않는가? 그 깎은 모양이 아무리 위대하고 엄숙해보여도 생명조차 없는데 반해 가장 고급한 생명과 영혼이 있는 인간에게 있지 않는가? 어리석다 못해 우스꽝스런 짓거리를 행하고도 아주 엄숙하고 경건하며 신령하다고까지 여긴다.

물론 피조물 중에서 인간만이 절대자에 대한 인식을 가지는 것만도 대단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이 가진 자기를 만든 창조주에 대한 의식도 그분이 이미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9)

따라서 첫째 계명의 숨겨진 뜻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그분을 가름할만한 존재를 고안해 내어 경배하는 것은 인간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에게 하나님 외의 어떤 존재나 물건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두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움에서 가장 크게 벗어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첫째 계명은 인간다움의 첫째가는 본질을 절대로 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상의 실체(實體)

둘째 계명도 “너희를 위하여”라고 시작함에 주목해야 한다. 너희가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는 까닭이 바로 너희를 위하려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첫째 계명 그대로 없는 신을 구태여 너희가 만들어 너희에게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뭔가 가시적 형상의 신이 있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뜻이다.

인간이 그런 가시적인 형상을 만드는 이유는 가시적 신상 앞에 가시적인 것을 갖다 바쳐서 가시적인 보상을 받아 내어야겠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아무 힘이 없는 우상인지라 우상에게서 아무 것도 받지 못해도 그렇게 한다. 당장 눈앞에 위엄 있게 보이는 그 형상과, 또 경건하게 보이는 경배 의식을 통해 스스로 감정적인 대리 만족이라도 얻겠다는 뜻 아니냐고 하나님이 질책한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당신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밝혔다. 이 또한 당신만 사랑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다른 신을 섬기면 당신이 큰 벌을 준다는 차원도 아니다. 질투할 만큼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표현이다. 당신의 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끝까지 당신의 사랑으로 붙들고 있겠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당신의 것은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특별히 세상의 어떤 신에게도 그러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어느 것도 신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아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것을 빼앗을 수 있는 존재란 이 우주에는 없다. 그런데도 그런 표현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께로부터 자유의지를 허락 받은 인간만은 예외라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당신을 벗어난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구태여 막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주신 뜻은 당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만큼 인간더러도 당신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의 열정과 노력으로 다른 대상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든 않든,  순종하든 하지 않든 인간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피조물 중에 최고의 특혜요 영광을 입은 존재가 인간이다. 그런 특권을 주었음에도 인간이 당신을 거역하니까 하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통함과 시기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모든 세대에게 절대적 진리다. 십계명도 마찬가지다.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배타적 헌신만을 요구하는 고리타분한 명령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특별히 인간의 영적 실체가 어떠한지 밝혀 놓은 것이다. 우매한 인간들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 알지 못하니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깨달을 수 있게끔 기록된 말씀 안에 계시해 놓은 것이다.

첫째와 둘째 계명을 통해 계시하신 그분의 뜻은 인간이 당신을 제대로 경배하지 못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하게 되는 근본적 이유를 온전히 깨달으라는 것이다. 우주에서, 정확히 말해 가시적 물질계인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존재는 하나님이 그 만드신 뜻대로만 따른다. 유일한 예외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높이려 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세상에 두 가지 신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 당신과 인간이라는 신이다.

인간이 우상을 깎아 만드는 것도 피조물 의식이 미미하게나마 남아있어 자기들 한계 정도는 알기에 스스로 신으로 칭하지 않으려는 의도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한계를 뛰어넘는 대체물을 만들어서 신과 대적하는 자리에 놓겠다는 뜻이다. 인간이 표면적으로는 우상이라는 신을 내세웠지만 그 진짜 속내는 자기가 세상의 주인 즉, 하나님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우상의 실체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 자신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신이 되는 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이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섬기려는 모든 대상들도 실은 자기를 치장하는 방도일 뿐이다.

예수님이 피신하신 진짜 이유

인간이 우상을 만드는 까닭은 하나뿐이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너무나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란 자기를 사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모든 행위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 단순히 우상에 절하는 식의 미신적 행위를 금한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 자신의 길흉을 묻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주술자, 신접자, 초혼자 등이 신령해 보여도 절대로 그들이 인생사를 주관하지 않기에 절대로 미리 알 수도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점을 치거나 박수를 찾아가는 모든 자는 세상에서의 자신의 길흉에만 관심이 있다. 칠성신께 점치러 가는 자가 그 신의 거룩한 뜻이 무엇인지 알면 그 뜻대로 살겠다고 헌신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길흉을 묻는다는 것은 또 자기가 바라는 것은 오직 보이는 것에서의 풍성함뿐이라는 뜻이다. 보이는 것의 문제를 보이는 것으로만 해결하려드는 것이다. 자신에게 가시적으로 발생하는 번창, 명예, 권력 등만이 삶의 목적이기에 그런 것을 채워주거나 얻는 방식을 가르쳐 준다면 어떤 사악한 세력과도 손을 잡겠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분을 거역하여 원수가 되더라도 내 멋대로 나의 형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다. 또 그래서 신자가 아무리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의롭고도 경건한 신앙행위를 해도 자기만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면 다 우상숭배가 된다. 신자가 자식의 형통, 자신의 건강 외모 재물 명예 권력 등을 하나님께 간절히 빌 수는 있어도 그런 것들이 자신의 지식, 안전, 만족, 행복, 기쁨, 안식, 평강 등을 가져다준다고 여기면 우상 숭배다. 설령 하나님이 그것을 주었다 해도 그렇다. 하나님만을 (먼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자들 스스로는 절대로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 이유는 단지 우상에 절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또 자신이 연약하고 무능함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쁜 것을 주실 리는 없다는 것이다. 기도해서 하나님께 받았다면 무조건 그분의 은혜이자 축복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기도의 응답이었는지 우연의 일치인지 혹은 자기 노력으로 얻은 것인지는 전혀 따지지 않는다. 나아가 하나님이 신자가 원하는 대로 일단 응답하시긴 했지만 신자가 구한 것과는 전혀 다르거나 더 깊은 뜻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돈, 건강, 외모, 명예, 지성, 권력 같은 것들 자체는 절대 우상이 아니다. 그것들이 결코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신자도 잘 알고 있다. 여전히 하나님이 세상만사를 주관하고 있음을 믿고 또 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한다. 신자가 모르거나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자신이 자기에게 유일한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만족과 행복을 위한 것들만 추구한다. 거룩하고 경건한 의식을 거쳤다는 사실만으로 깊이 따져보아야 할 더 중요한 요소들은 다 잊어버린다. 종교 놀음에 잠시 취하여서 순간적으로 일시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그것도 자신을 가장 잘 속이는 존재인데 신자가 되어서도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신자가 가시적인 형통을 절대로 구해선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대다수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뜻 안에서 부요든 궁핍이든 기꺼이 달게 받겠다는 의식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 자기가 받은 것을 통해 그분의 거룩한 뜻을 실현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영광을 증거하겠다는 헌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신자가 전통적 의미의 우상숭배를 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자기가 유일하게 우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요 6:11-13)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가만히 있었는데도 예수님이 떡을 배불리 먹게 해주었다고 한다. 광야에서 자기들 선조가 떡을 만들려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모세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해서 굶지 않게 했던 일과 동일하다고 여기고 예수님을 모세 같은 선지자라고 지칭한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순전히 당신의 당신 되심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이 기적을 베풀었다. 요한이 65절에 걸쳐 길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의미들이 이 기적 안에 다 숨겨져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단순히 인간의 먹고 마실 것에서 수천, 수만 배의 복을 주시려는 뜻이 결코 아니었다.

신자가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에만, 바꿔 말해 “자기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에만 신앙 초점이 몰리면 바로 “나를 위한 것” 즉, 우상숭배가 된다. 유대인들은 지금 오병이어 기적에서 단지 자기들이 배불리 먹었기에 감사했고 또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았다. 바로 우상숭배 사제에게 길흉을 물은 것과 동일한 생각이다. 예수님으로선 그들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모세 같은 선지자의 참 뜻

모세가 자기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이라는 예언을 조금 더 확장해서 설명한 내용을 살펴보자.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신18:18-19)

우선 백성들이 그 선지자가 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되는 그런 선지자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고하는 자다. 또 그 선지자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대로 따르지 않는 자는 당연히 벌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구약성경의 선지자들 모두를 망라하는 뜻은 아니다. 신명기 18장 15절과 18절에 나타나는 그 선지자는 여럿이 아니다. 분명히 “하나를” 일으키겠다고 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아예 메시아를 지칭하는 의미로 대문자(a Prophet)로 표기했다. 앞뒤 문맥을 살피면 그런 표기가 정당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신18:16-18a)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맞추어 모세 같은 선지자를 세우겠다고 한다. 그들의 요구가 무엇이었는가? 시내 산에 강림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려니 “두렵건대 죽을까” 염려되었기에 자기들이 직접 당신을 대면하는 일이 없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죄에 찌들고 허물 많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들의 뜻이 앞으로 하나님과 서로 모른척하며 보지 말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여호와의 은혜와 권능은 계속 받고 싶지만 자기들을 심판으로만 내몰지 말고 죄에서 구원하는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다. 요컨대 자기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중보자를 세워달라는 것이다.

실제로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는데도 죽지 않았다.(민12:7,8) 그가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교해서 완전히 혹은 월등히 성결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도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에 찌든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살이에서 구원할 자요, 율법을 직접 수여 받아 전할 선지자로 택함 받았기에 당신과 대면해도 죽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모세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의 예표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선지자가 오면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나님 본체이심에도 그분 앞에 나아가는 죄인들이 죽기는커녕 오히려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분은 또 모세가 전해 준 율법을 실제 몸으로 온전히 실천하는   전혀 하자 없는 완전한 의인일 것이다. 반면에 다른 이들더러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즉, 율법에 따르면 죽음의 형벌을 모면할 수 없는 철두철미 죄인 됨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체질이 진토 같은지라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당신의 십자가 죽음의 의로 덧입혀서 그 죽음의 형벌에서 건져주는 은혜를 베풀 것이다.

모세 같은 선지자는 다른 말로 당신의 백성들로 가나안 땅의 우상숭배에 넘어가지 않게 막고 참 하나님 앞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는 자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이 자신을 우상으로 삼고 있는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만을 온전히 모시도록 만드는 선지자다. 하나님 대신에 교만하게도 자신이 그 자리에 서있는 엄청난 죄에서 구원해줄 선지자다. 하나님 쪽에선 도저히 용서 못할 죄요, 인간 쪽에선 스스로는 도무지 빠져나오지 못하고 빠져나올 의사도 전혀 없는 그런 죄를 당신의 죽음으로 다 용서하시고 그 사슬을 끊어주는 선지자다.  

한마디로 말해 주님은 이방민족들은 물론 이스라엘더러도 더 이상 우상숭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오병이어를 보고 모세 같은 선지자라고 감탄했지만 자신의 길흉에만 관심이 있었지 않는가? 모세에게서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뜻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현대 신자의 첫째 둘째 계명

위에서 살펴본 내용에 근거하여 십계명의 첫째와 둘째 계명을 현대식으로 바꿔보자. 첫째는 “너희는 절대로 너희 자신을 우상으로 삼지 말라.”가 된다. 둘째는 “너희 스스로를 위하여 종교적 의식과 행위를 하지 말라. 아무리 경건하고 의로워보여도 하나님에게 가증한 짓이니라.”이다.  

솔직히 따져보라. 하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간구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문제와 환난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뿐이거나 우선적이지 않는가? 거의 모두가 나의 길흉에만 관계되는 내용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묻기는 한다. 그러나 그 또한 대부분이 자신이 길하게 되려면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 흉을 막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두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다고 여긴다.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을 주술자, 복술자, 점쟁이 취급하는 셈 아닌가?

또 그래서 기도가 응답되는 일 자체도 우상이 되어 있다. 기도 응답을 잘 받는데 도움이 되는 종교적 절차는 다 동원한다. 아무리 경건한 신앙 행위라도 자신의 길흉을 가름하는 응답만 받으려는 기도라면 기도도, 또 그 응답도 우상이 된다. 그 전에 자신이 이미 자기에게 우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기도, 헌금, 봉사, 구제, 찬양, 예배 같은 종교 의식과 행위에서도 정말로 하나님만 경배하며 그분의 뜻을 자기 삶을 통해서 구현해 내려는 목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면 그 모두가 우상이 될 수 있다. 자신이 현실적 복 받으려는 목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 만족이나 평강도 자신만 누리려 해선 종교행위 그 자체를 우상으로 만들어 자기에게 있게 한 셈이 된다. 하나님이 신자로 영적 평강과 충만으로 이끄는 까닭도 그 받은 은혜로 주위에 나누고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그리스도의 영광만 증거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종족들의 우상숭배 행태를 본받거나 물들지 말고 대신에 당신 앞에서 완전하라고 명하셨다. 우상숭배를 않고 하나님 한분만 경배하는 것이 신자로서 완전한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신자의 도덕적 성결보다 영적 순결함을 가장 먼저, 그리고 더 중하게 보신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순결해지면 도덕적 성결도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신에게 있게 하지 말아야할 첫째는 바로 자기라는 우상이다. 그렇다면 영적 순결함을 방해하는 것도 깎아 만든 우상, 세상 철학, 불신자의 핍박, 사탄의 시험, 죄악의 유혹이기 이전에 바로 자기 자신이다. 예수님이 그래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리니라.”(마16:24)고 말한 것이다.

바울의 이런 고백들을 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신앙이란 평생을 두고 모든 우상숭배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싸움이다. 특별히 자기라는 우상을 벗어버리는 일에 주력해야만 하는 싸움이다. 바울이 고백하고 그대로 실천했던 모습이 바로 모든 신자가 걸어가야 할 목표다. 아니 실제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지는 인생이어야 한다. 나아가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진짜로 배워야 할 바이다.

4/9/2013


김유상

2013.04.19 07:5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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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뱀의 꾐에 빠진 것도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욕구 때문에 그는 하나님 말보다 뱀의--한낱 미울에 불과한, 자신이 이름을 지어준, 자신의 다스림과 돌봄을 받는 대상의 말을 더 신뢰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뱀이 꾀어서 그랬노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지만, 실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정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맞습니다. 인간의 우상,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날마다순종

2020.08.20 17:16:15
*.14.99.253

'신앙이란 평생을 두고 모든 우상숭배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싸움이다'

때때로 아니 빈번하게 주님보다 나를 높이려는 성정이 나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교만이라는 우상, 정말 평생을 두고 싸워야 함을 절감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master

2021.08.14 06:46:52
*.16.128.27

이 오병이어 시리즈를 이번 주일(8/15)에 15번까지 이어서 설교함으로써 마감할 것입니다. [말씀-운영자설교듣기] 사이트에 들어가셔서 꼭 함께 참조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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