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까닭?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1:10-12)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신자들이 꽤 있습니다. 저자가 다 인간이고 또 종이에 기록된 책의 형태를 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기록 보관된 여러 책들 중에서 후대 인간들이 수집 선택했기 때문에 더 그러합니다. 기독교 진리에 대한 의심은 전혀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조금만 논리적으로 따져 봐도 쉽게 알 수 있는데도 신자들마저 그러지 못하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지 아닌지에 관한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눈에 확실히 보이게 나타나서 직접 말씀하시고 오디오 혹은 비디오테이프로 기록되어야만 합니다. 그럼 과연 모든 의심이 해소되고 성경은 영원토록 하나님 말씀으로 취급받고 사람들이 지키며 따를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선 나타난 하나님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당대부터 논란이 일 것입니다. 또 그 당시만 조금 지나면 나타난 하나님이 엉터리였다는 말들이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지금에 와선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인간들부터 못 믿겠다고 나서는 꼴과 같이 말입니다. 나아가 당시까지 존재하던 다른 모든 종교를 부인하고 하나만 옳다고 제시할 정도의 편협하고 독단적인 하나님이라면 못 믿겠다고 나설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진리를 그저 부인하려는 관용심이 많고 인자한(?) 인간들이 넘치고 또 더 존경을 받고 있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만 따져 봐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하는 성경이 진리이지 않습니까? 놀랍게도 이미 성경은 사람들이 그 선포를 전혀 믿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예수님도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자신을 더 못 믿을 것이라고 정확히 예언했습니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순전히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런 인간을 차라리 몽땅 죽여 없애는 것이 속이 더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냥 두시는 것은 오직 그분이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이기에, 즉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참고 또 참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성경은 기록, 보관, 선택된 경로와 형식 때문에 인간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오직 그 선포하는 내용 때문에 하나님 말씀입니다. 성경만이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확정적으로 선포하는 유일한 경전입니다. 세상 어느 종교가 자기 종교의 신자더러 몽땅 사형수라고 하며 심지어 경전에 기록된 내용조차 믿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까?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경전이라면 구태여 믿지 못할 내용을 기록해놓고 믿으라고 권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 모두 경험했듯이 성경에는 잘 믿기지 않은 내용들로만 가득 차있지 않습니까?
신약성경 중에서 기독교 교리에 관한 부분은 거의 전부 인간인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게서 직접 배운 바 하나 없으며 일면식조차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분의 극렬한 반대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한 사건의 의미를 그렇게까지 상세하고도 심오하게 풀어 쓸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본인 표현대로 사람에게서 난 것, 즉 그의 사고활동으로 유추한 철학과 사상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어떤 종교라도 자기 종교의 가장 반대자를 초빙해서 경전을 쓰게 할 리는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역사적 전기는 여러 자료들을 수집해서 그런대로 쉽게 기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판 모르는 타인의 가르침과 그 깊은 사상까지는 직접적인 제자라도 일일이 본인의 구술을 받아 기록해 놓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그런 정도도 훨씬 넘었습니다. 이미 죽었고 전혀 만나지도 알지도 못하는 완전 타인의 생전 행적과 가르침과 사상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까지 기술했습니다. 인간의 글과 책이라는 형식을 빌려 인간이 기록했지만 절대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본문이 의미하는 내용만 해도 그렇습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사람의 기쁨을 살려고 율법의 엄격한 요구를 안 지켜도 된다고 선동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오히려 율법주의자들이 더 사람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 하나님의 섭리가 신비롭기까지 않습니까? 그들의 주장대로 하자면 하나님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율법의 복잡하고 귀찮은 절차들을 포기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만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겠다고 선언한 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껏 그 의도대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지 못하고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종교라는 비방 아니 조롱만 듣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역에 역으로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후대의 사람들이 고안해 낸 것이라면 이런 비방과 조롱을 받을 것이 빤한 교리를 고안하겠습니까? 설령 처음에는 멋모르고 고안해 냈다 하더라도 조금씩 수정을 가해 완전히 바꿔버리지 않겠습니까? 요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기독교가 배타적이라는 세간의 비난에 영합하려고 십자가의 도를 왜곡, 타협, 심지어 포기하듯이 말입니다.
바울이 정작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했다면 율법의 요구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복음이기에 이젠 무슨 짓을 해도 즉 죄를 마음껏 지어도 된다고 선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절대 그런 적이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에게 십자가를 그렇게 계시해준 적도 없고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뜻이 결코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철두철미하게 저주 증오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직접 죽으실 만큼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인간도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철두철미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얼마만큼 그래야 합니까? 각자가 완전히 죽어야 할 만큼 그래야 합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단순히 죄지은 행동을 두고 회개하거나 율법대로 제사 지내는 것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죄인)을 이처럼 사랑하사” 완전한 구원의 길을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이 율법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 은혜만 믿어도 된다는 바울은 미워하고
오히려 율법대로 살라고 한 유대주의자들을 환대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들도 모두가 죄를 짓고 있고 또 그 도덕적 회개는 할 용의가 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부터 바뀔 필요나 의도는 아예 없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지은 모든 죄가 주위 여건이나 다른 사람 때문이지 자기 잘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에 맞게 가르치는 율법주의가 당연히 사람들의 기쁨을 살 수밖에 더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라고 엄숙히 선언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바울이 사람들에게 환심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아니 필연적으로 비방과 조롱만 받게 될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그런 도를 열 세권이나 되는 책에 기록해 놓았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의 도를 계시 받아 깨닫지 않고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자신부터 죄인에서 의인으로 거듭나지 않은 다음에는 말입니다. 요컨대 단순히 조금 착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부터 완전히 뒤바뀐 사람에게만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됩니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성경이 예언한대로 들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18/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