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11:28,29) 예수 믿고도 도대체 왜 그러냐?

조회 수 1051 추천 수 38 2008.02.25 20:4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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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고도 도대체 왜 그러냐?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11:28,29)



바울은 거짓 사도들을 향해 자신이 겪은 극심했던 고난을 죽 열거했습니다. 정말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자처한다면 복음을 거부하는 세상과 충돌한 적이 있는지 묻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사람들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담대히 선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소개하면 필연적으로 예수님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도로서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고백이 아주 의미 심장 합니다.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은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에 비해선 사실 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 “날마다 내 속에 (훨씬 더) 눌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십에 감한 매 다섯 번, 세 번 태장, 한 번 돌로 맞음, 세 번 파선, 기타 강도와 굶고 주림 등이 주는 육신적 고통은 잠시 그 때뿐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연약한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까워지는 심령이 날마다 자신을 누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바울은 십자가 복음과 자신의 생명을 맞바꾼 자였습니다. 날마다 죽음이 바로 곁에 있는데도 자기 안위는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래야하지 않습니까? 돈과 권력과 명예는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는 아예 다른 세상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대신에, 오로지 더 많은 영혼들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품안으로 초대하기 위해 자신부터 십자가를 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럼 바울처럼 세상의 핍박과 환난에 정말로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신이 아주 강건하거나 의지력이 대단해서 잘 견뎌내면 됩니까? 어떤 고난이 닥쳐도 눈도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믿음이 굳건해져야 합니까? 둘 다 아닙니다. 그도 힘든 일이 닥치면 심히 떨 정도로 연약한 자였습니다. 그 답은 본문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온갖 박해로 겪었던 고통이 그에게 결코 작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때로는 정말 못 견딜 정도로 심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연약한 성도들을 볼 때 느끼는 고통이 너무나 컸기에 그보다 적은 고통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영혼을 사랑하는 불타는 심령을 지니지 않고선 절대 그리 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그런 애끓는 심령이 바로 참 믿음이지 강한 의지력으로 종교적 실력을 쌓는다고 좋은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또 다른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런 애끓는 심령을 과연 어떻게 해서 그는 소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다시 무턱대고 좋은 믿음 때문이라고 답해선 안 됩니다. 예수를 알기 전의 자신의 인생이 철두철미 실패와 잘못과 죄악 가운데 있었음을 절감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떤 부귀영화도 부럽지 않으며 어떤 핍박과 환난도 큰 고통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전 삶이 완전한 헛것이자 너무나 추하고 더러웠기에 예수 후 삶은 어떤 상태가 되어도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시편 비유대로 여호와 궁정에서 문지기로 있는 하루가 세상의 고관대작 천일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예수 십자가 앞에서 자아가 철저하게 부수어져 죽었던 자라야 아직 예수 밖에 있는 자들에 대한 애끓는 심령이 생깁니다. 단순히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거듭난 자라야 거듭나지 못한 자를 향해 무슨 대가를 치루더라도 가장 먼저 거듭나는 것부터 하라고 담대히 또 끈질기게 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간과해선 안 될 것은 본문에서 바울은 이미 믿은 성도들을 향해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바울이 거짓 사도들을 향해 자신의 사도직을 변명하는 것으로 그치는 말이 아닙니다. 나아가 참 사도라면 어떤 육신적 고통보다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눌리는 심령을 가져야만 한다고 강조하는 차원마저 넘어서는 의미가 됩니다.

즉 예수를 이미 믿은 너희 신자들과 또 그런 자들이 모인 교회들이 왜 날마다 약하고 실족하느냐라는 것입니다. 본서는 특별히 고린도 교회를 향한 편지입니다. 일차적으로 나에게서 복음을 배워 예수를 믿게 된 너희들이 어떻게 거짓 사도와 참 사도조차 구별하지 못하는지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온갖 성령의 외적 은사까지 풍부하게 받아 놓고 말입니다.

바울의 고린도 교회를 향한 안타까움은 틀림없이 이랬을 것입니다. “복음 안에 이미 들어온 너희가 왜 세상 사람도 잘 범하지 않는 성적 범죄를 저지르느냐?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한 여자를 상관할 수 있느냐? 그랬으면 제대로 권징하고 치리하여서 교회가 더러워지고 연약한 성도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도 오히려 파당을 지어 교회 안에서 조차 권력 다툼으로 지새며 심지어 그 다툼을 세상 법정에까지 들고 나가느냐?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조차 복음 안에서 잘 분별하여 가르치지 못하면서 하나님께 그저 받은 은사만 서로 뽐내며 자랑하느냐? 은사는 성도의 유익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지 믿음의 증표나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그 염려가 단순히 자기가 세운 교회 성도들을 바로 가르치려는 열심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더러 예수를 어떻게 믿고 있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자기처럼 세상의 어떤 핍박과 환난도 담대히 이기며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는 자리에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너희가 지금 범하고 있는 잘못만은 저지르지 말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책이었습니다. 골고다 십자가의 의미를 진정으로 안다면, 예수 안에 있는 신분과 특권과 은혜를 제대로 누리고 있다면 절대 그래선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 알지 못하느뇨.”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 안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확보했는데 왜 그것과는 도무지 비교도 안 되는  하찮은 것들에 매달려 있느냐는 것이 성도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안타까움이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이미 영생을 얻은 성도는 자기는 죽더라도 남을 살리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신자란 죽음도 넘어서고 승리한 자인데 어찌 아직도 이 땅의 돈과 권력과 명예와 향락과 죄악에 연연하여 교회마다 그렇게 실족과 다툼이 그치지 않는지 바울로선 그것만 생각하면 자신이 겪은 이외의 고통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지금도 모든 신자에게 엄중하게 선언합니다. “바울 같이 죽음을 항상 눈앞에 달고 다니라고까지는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예수를 믿었는데 어찌 그리 약하며 실족하느냐? 예수를 제대로 믿어 십자가 보혈로 덧입혀졌다면 죄악과 사단과 사망을 넉넉히 이길 수 있지 않느냐? 십자가 은혜를 정말로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입니다.(참조 고후6:1-10)

예수를 제대로 믿었다면 바울처럼 자신의 죽음보다 성도들의 실족을 더 마음 아파하는 정도까지는 안 가도, 최소한 자기의 실족과 약함에 대해서 만이라도 너무나 안타깝게 여겨서 날마다 예수님의 보혈로 덧입혀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또 교회는 가장 우선적으로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과 성도들이 예수를 믿고도 도대체 왜 이리 약하고 아무 것도 아닌 헛된 일에 자주 실족합니까? 설령 간혹 약하고 실족했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며 십자가 앞으로는 되돌아 가야할 것 아닙니까? 혹시라도 십자가마저 교회에서 치워버렸기에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닌가요?    

2/26/2008

조재춘

2008.02.26 04:20:57
*.29.165.87

십자가 보혈......
오직 예수님의 피 밖에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만을 의지합니다.
성령님! 항상 주님의 보혈아래 머물게 하옵소서......

작은자

2008.02.26 17:18:44
*.7.13.27

감사합니다
잘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예수를 믿고도 왜 그러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날마다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하게하옵소서
주만 바라봅니다

김형주

2008.02.27 14:16:14
*.173.42.18

목사님,
제 자신의 상태를 너무나 정확히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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