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다.
암 등 중병으로 인해, 각종 사고로 인해,
어느날 갑자기 자기에게 찾아온 눈이 멀어짐, 귀가 들리지 않음 등 각종 장애들로 인해
이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깨닫고
새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오히려 견딜 수 없는 그 아픔과 고통이 아니었다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
자식을 잃는 고통과 장애인 자식으로 인해,
부부와의 사별과 부부의 배신 등으로 인해,
사업 부도, 우울증 등 각종 고통으로 인해,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겪지 못하는 이런 극한의 고통 속에서
이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깨닫고
새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오히려 견딜 수 없는 그 아픔과 고통이 아니었다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
확실히 극한의 고통과 아픔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고통과 아픔을 통해 깨닫는 특별한 깨달음은 비단 기독교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의 세계에서도 고통과 아픔은 깨달음에 유효하다.
그래서 불교에서 삼보일배를 하며 온 아시아 대륙을 여행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인도의 각종 종교가 인위적으로 극한의 고통을 스스로 체험하며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그래서 그러한 고행과 수행을 통해 뭔가를 깨달은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은 인생을 관조하면서
범생들에게 자기가 깨달은 것들을 설파한다.
그러나 인생을 깨달았다고 모두 다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그가 비록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의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갈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거기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져 있다면 영원의 생명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그 깨달음은 오히려 광명한 천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괴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 것이 확실한 기반하에 타종교 입장에서 바라보는 삶의 지혜 하나 더 얻을 수 있는 셈이다.
확실히 극한의 고통 속에 하나님께서는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을 숨겨 놓은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극한의 고통과 아픔 속에서
숨겨 놓은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지 못하고 괴물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더 많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왜 고통과 아픔, 불의와 부정을 겪는 속에 하나님 나라를 숨겨 놓으셨는가?
그것은 우리가 범죄할 것을 창세 전에 미리 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 속에, 벌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숨겨 놓으셨다.
죄를 저지를 경우 반드시 벌이 뒤 따르게 되어 있는데 고통과 아픔을 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하나님께서는 벌 속에 믿는 자만이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보물을 함께 숨겨두어 하나님으로부터 당하는 시험을 견딜 수 있도록 하셨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어느 누구에게나
하나님은 천국의 비밀을 활짝 열어 보여 주신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후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계명'때문이다.
인간은 완전자가 아니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100% 수행할 수 없다.
그러나 조물주와 피조물과의 사이에 숙명적인 것이 있다.
모든 피조물은 탄생되는 순간 조물주의 계명 아래 존재한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심지어 하나님은 자신에게조차 '명령'으로 존재하고 계시다.
(이것을 신명기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왜 100% 지킬 수도 없는 계명을 이스라엘민족에게 끊임없이 내려주시는가를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명령을 내리는 것은 하나님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인데 아이러니하게 모든 피조물은 예외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100% 수행할 수 없다.
불순종에 대한 대가는 벌이며 고통이다.
이 법칙을 하나님도 피할 수 없으셨기에 예수님을 통한 십자가로 이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런데 피조물들 중에서 여전히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완전자로 존재하는 곳이 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나님 나라에도 24장로, 인간, 천사장, 천사 등 계급이 있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도 이 땅에서 가장 큰 자보다 크다라고 서열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계급이 존재하는 그런 불완전 속에서 피조물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완전자로 존재할 수 있을까?
(저는 이 고민을 15년 동안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자나 작은 자나 하나님께서 모두 완전자로 존재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완전한 상태로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또 한 가지 하나님 나라를 완전하게 하는 방법은 선악과 범죄 이후 뱀에게는 회개할 기회없이 바로 벌하시는 모습에서 보듯이 천사와 천사장들을 하나님께 한 번 불순종하는 순간 영원히 어둠 속으로 내어 쫓아내심으로 빛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의 완전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선악과가 있어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고 선악과가 없어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불완전성을 가진 피조물인 인간을 왜 만드셨는가?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의 대리통치자로 사용하시고자 우리를 지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내용은 아닌 걸로 알고 있다.
성경은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 왜 태어났는지를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다.
비록 고통을 가미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살아가게 운명 지어졌지만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픔이 존재하지 않고 우리 눈의 눈물을 닦아 주시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왕노릇(대리 통치의 회복)하게 하실 것이다.
창세기 맨 첫장에서 복선을 깔고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장에 이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경의 그 중간에는 인간의 대리통치 실패(족장과 왕들 이야기, 신약에서는 우리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들이다.)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회복이 담겨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탄생시키시기 전부터 하나님 나라 완성에 모든 촛점을 다 맞추어 계획하시고 피조물을 탄생시켰으며, 피조물이 탄생되는 순간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장의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의 모든 관심과 촛점을 하나님 나라 완성에 맞추어 놓고 실행에 옮기셨고, 옮기시고, 옮기실 것이다.
선하신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것을 다 이루시기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관심도 나에게 집중될 것이 아니라, 나의 이기적 신앙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어떤 순간에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당연한 것이기에 그것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나님 나라 완성에 촛점을 맞추고 살아가야 한다.
아멘 주예수여 어서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아멘.
대개 주의 나라, 주의 권세, 주의 영광 영원히 아멘아멘
P.S. : 이것은 제 30년 묵상의 종결판이며 제 묵상의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 댓글들을 보니 제가 답변하지 않은 불성실한 부분이 많네요.
죄송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범죄할 것을 미리 아셨다고 글을 쓴 것은 그 분의 전지전능성 때문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모친의 태중에 벌써 범죄할 것을 아셨고 만세 전에 우리를 미리 택하여 주셨고, 우리의 머리털 개수 조차 아시는 분입니다.
인간조차 어떤 건물이나 구조물을 만들고할 때에 미리 설계를 다하고 만들듯이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런 계획없이 세상부터 만들어 놓고 무대포로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만세 전에 계획한 하나님 나라 완성의 프로젝트를 지금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아멘
먼저 얼마나 깊이 묵상함이 느껴집니다.
말씀하신 내용 중에
"그것은 우리가 범죄할 것을 창세 전에 미리 아셨기 때문이다."
에서 성경 어디에 이구절을 볼 수 있는지 유추할 수 있는지 부탁 드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