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뒤바뀐 반응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 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게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28-31,34)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령에 의해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조금 이상한 내용이 나옵니다. 천사가 그녀에게 먼저 문안인사를 한 후에 수태고지(受胎告知)를 했습니다. 수태고지부터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마리아의 반응은 상식적으로 보여야할 순서와는 뒤바뀌게 나타났습니다.
만약 우리가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는 문안을 받았으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감사히 여기면서 아멘으로 화답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찜인고”라고 이상히 여겼습니다. 정작 놀라고 두려워해야 할 시점은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의외로 아주 담담하게 처녀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이성적인 대응을 했습니다. 아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뜻입니까?
우선 놀란 까닭이 천사를 만났고 또 그로부터 인사를 들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천사가 나타나자마자 놀라고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천사는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일상 언어로 문안했던 것입니다. 대신에 그녀로선 생전 처음 듣는 인사이자 그 내용이 지금껏 받은 문안과는 너무 달랐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일반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신앙관과 전혀 상충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은혜 받아 평안을 얻게 되는 일은 상상도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유대민족 전체와는 함께 하지만 개인적인 접촉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상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이 한 개인과 함께 하신다 해도 은혜와 평강까지는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함께 하심을 단순히 세상만물과 인생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자기 일생도 이끄신다는 원론적인 뜻으로만 이해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이 오셔서 앞으로 하실 일이 지금 천사가 마리아에게 베푼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시사(示唆)하는 셈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하나님이 한 개인과 함께 하지 않았기에 그분으로부터 직접적인 은혜를 받아 평안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 그 수많은 이적을 경험한 유대 민족마저 그러했습니다.
왜 그런 신앙관을 가졌습니까? 죄에 찌든 인간이 율법을 준수하고 희생 제사를 드려야만 사함을 얻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매년, 매월, 매일 빠지지 않고 죽을 때까지 성실하게 말입니다. 말하자면 죄에서 용서 받지 못해 평안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림이 부족해서 그분의 온전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예수 이전의 이 땅의 모든 종교에는 인간 행위에 의한 구원관뿐이었습니다. 유대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구속의 진리는 그러하지 않았음에도 유대인들이 그렇게 곡해했던 것입니다. 종교특권층들이 자신들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 현실적 복만 받고자 하는 백성들의 잘못된 소원과 결탁하여 회중을 오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고 지적한 그대로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마23:13) 했던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까지도 기독교, 그것도 극히 일부의 보수복음주의 교단을 제외하고는 행위 구원을 지향합니다. 인간이 구원을 얻으려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기분에 흡족하도록 바쳐야만 합니다. 선행, 구제, 수련, 희생, 제물, 고행, 회개, 심지어 믿음까지도 말입니다. 요컨대 자신에게 천사가 나타났다면 마리아처럼 반대되는 순서로 반응하는 꼴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했기에 평강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평강이 없으니까 자꾸만 바쳐야 하고, 또 계속 바치는 가운데 평강을 얻기도 힘들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하나님입니다. 우선 죄인과 개인적으로 임마누엘, 함께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베풀어 평강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아무리 고상하고 경건해도. 구원을 결코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바치지 않거나 부족하게 바쳐서 하나님이 흡족해 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주려는 뜻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여전히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 아래 눌려 신음하는 인간들을 너무나 불쌍히 여겼던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아무리 수련, 고행, 선행, 믿음을 쌓아도 그 죄를 다 씻을 길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인간에게 받고 싶은 것은 인간 외부의 제물은 물론 인간의 선행이나 회개마저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신께선 완전히 발가벗은 한 죄인의 존재 전체를 받기 원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익하고 무지하며 불완전한지 솔직히 인정하는 가난한 마음이었습니다. 자신의 영적 실체가 너무나 비참하고 가련하므로 통회하는 중심만 당신 앞에 꺼내어 놓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 대로는 아무 소망이 없고 절망의 나락만 기다릴 뿐이오니 주여 제발 저를 긍휼이 여겨달라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절규만 듣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가 잉태됨으로써 인류의 종교사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신앙관이 잉태된 셈입니다. 주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행위로는 아예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절대적 전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너무나 당연한 진리 앞에 주님의 은혜 안에 들어온 자는 더 이상 마리아처럼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는 일이 없게 된 것입니다. 지금 예수 믿는 신자가 가브리엘에게 동일한 문안을 받아도 너무나 자연스레 아멘이라고 반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다른 말로 우리가 예수 믿은 궁극적 결과는 그분의 죄 사함의 은혜를 이미 입었기에 언제 어디서나 평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탄생 시에 천사들이 부른 찬송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울 사도의 서신서들을 보십시오. 서두의 문안인사에 어김없이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하지 않습니까?
지금 마리아가 정작 놀라자빠질 수태 고지를 듣고도 담담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즉,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평강이 찾아온 이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대면했어도 죽음의 벌에 대한 염려, 공포는커녕 오히려 심령에 너무나 평온함이 넘쳤기에 그렇게 반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죄 사함의 은혜를 이미 입었기에 언제 어디서나 평강 가운데 있음을 감사히 여길 수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현실의 형통함이 없어서 염려 불안 속에 헤매고 있습니까? 혹시 죄 사함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조차 확신이 없는 것은 아닌지요? 바꿔 말해 예수 믿는 목적을 평강 외에 다른 것에 두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오히려 평강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지는 않는지요?
12/25/2009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말씀데로
모든 것에서 우리를 자유케함으로 우리를 평강하게 하시는 우리주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능력대결이 아니라 진리전투라는 닐 앤더슨 목사님의 말씀처럼 우리를 언제나
진리가운데로 인도해주시길 기도드리며 목사님 힘내십시요!! 그리고 주안에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