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가 세례 요한보다 더 큰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눅7:28)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고 해놓고 곧바로 하나님 나라에 가면 가장 작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놀랍고도 이해하기 힘든 대반전입니다. 과연 무슨 의미로 그는 낮추고 우리를 높여줍니까? 설마 요한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애제자들마저 주님을 따르게 하고선 끝까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은 높이지 않았습니까? 반면에 우리는 정치지도자들의 잘못을 과감하게 지적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일이라곤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 전도도 제대로 못하고 세상 방식으로 아부하기 바쁘지 않습니까?
이 문제 역시 성경 본문에서 해석의 키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라는 울타리 안에선 요한이 가장 크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 안에선 요한은 가장 작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요한과 우리를 직접 비교하지 않고 각기 그 속한 테두리 내에서 평했기에 그것부터 따져보는 것이 이해하기 더 쉬울 것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는 물론 인간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에선 요한이나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는 뜻은 당연히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 땅의 인생여정에서의 인격적 도덕적 측면을 따진 것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에서 보듯이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 중에선 요한이 가장 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행한 세례도 윤리적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반면에 그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했다는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크게 둘인데 구원 받은 자가 죽어서 가는 특정한 천국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후자는 당연히 이 땅에서부터 그분의 인도를 받는 신자의 삶도 포함합니다. 분문에서도 이 두 가지 뜻은 다 적용됩니다.
우선 요한의 일생은 분명히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카펫을 깔고 하나님의 독생자에게 침례를 줌으로써 누린 인간으로서 최고 영광도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옥에 갇히는 바람에 정작 주님의 사역을 보지 못했고 천국 복음의 메시지도 직접 듣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과 동시대의 동년배 인척이었는데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현장에 참예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땅의 하나님 나라라는 측면에서도 당시의 사도나 신자보다 예수님의 은혜를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에 작은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와 비교해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완성된 성경을 통해 십자가의 진리를 더 명료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평생토록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깨끗이 씻으며 거룩하게 자라도록 이끌지 않습니까? 또 성령의 권능을 충만하게 받으면 미혹된 영을 주께로 인도하고 이 땅을 변화시킴에 주님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이 땅에서의 하나님 통치측면에서도 우리는 그보다 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죽어서 가게 될 천국에서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이 부분에선 약간 해석상의 딜레마에 봉착합니다. 천국에선 이 땅에서 주님께 충성한 결과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인데 우리는 요한과 도무지 비교가 안 됩니다. 요한은 모세, 엘리야, 노아, 바울, 베드로와 같은 반열에 서야 하고 우리는 가장 말단에 겨우 자리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주님은 오히려 우리가 그보다 훨씬 크다고 합니다. 단지 우리더러 믿음에 더 자라서 거룩해지라는 동기부여 혹은 격려성 말씀인가요? 주님이 말씀하셨으면 정확하게 실제로 그러합니다. 물론 인간으로 오신 주님이 인간을 향해 말할 때는 과장, 비유, 대조, 상징 등의 수사법을 동원하지만 그 안에 담긴 근본 뜻만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요컨대 천국에선 우리도 분명 요한 이상으로 큰 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천국에선 사실상 크고 작은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품성 자체가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원을 허락한 당신의 백성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두 사안을 대조하여 강조하는 수사법을 사용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 또 요한과 일반 성도를 비교하면서 가장 크고 가장 작다는 최상급, 문법적이 아닌 실질적인, 표현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분문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해선 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최상급 표현법을 동원했지만 요한과 우리에게 번호를 붙여서 순서를 매기려는 의도는 아닐 것 아닙니까?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여자가 낳은 자, 하나님 나라는 한정된 영역 안에서 당신의 가르침을 잘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당시의 제자들이나 후대의 성경 독자더러 여자가 낳은 자의 입장에선 요한 같은 자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나라에선 그런 윤리적 인격적 측면보다 다른 점을 하나님은 더 귀하게 여기므로 그런 천국의 비밀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위치, 신분, 계급, 실적 등은 천국에선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죄를 사해주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진정 의지했었느냐만 문제 삼는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어떤 평가, 취급, 대우를 받았던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필터를 통해서 보십니다. 이는 천국에 가서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신자로 살고 있는 동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이후부터, 아니 구원을 줄 때부터, 더 정확히는 그 이전부터 그러하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이 천국이라고 이와 다른 기준을 적용할 리는 절대 없습니다. 땅에서 요한이 가장 크고 하늘에서 요한이 가장 작다는 것은 당신 백성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변함과 차등이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선 실제 문자적으로도 우리가 요한보다 더 클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필터가 그 답입니다. 요한이 골고다 언덕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뜻입니까? 이미 그것은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요한보다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더 많이 흘릴 수밖에 없기에 그러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더 연약, 무지, 미숙, 나태,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현실적 문제와 고통에 더 힘겨워했기에 주님 앞에 더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살아 갈수록 더 많이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주님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었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은혜를 더 받기 위해 죄에 더 머물렀다면 가장 작은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거하는 것이 너무나 추하고 눌리고 쓰리고 아팠음을 절감하고 엎드렸다면 은혜는 분명 더한 것입니다. 또 그래야 성령의 인도와 간섭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됩니다. 이렇게 십자가로 더 많이 자란 자는 천국에서 자연히 더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은혜와 권능을 받고도 계속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하면, 비록 죄의 자리는 아니지만 여전히 돌고 있는 그 자리에 머무른 셈이니까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본문에 이어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백성과 세리는 요한의 세례를 받은 지라 하나님을 의롭다 했고,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하나님 뜻을 저버렸다고 합니다. 전자는 요한의 주님을 예비하는 메시지를 듣고 예수를 믿었기에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로 받아들여졌고, 후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인간의 크고 작음은 예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누리는지, 주님 앞에 얼마나 자주 신령과 진정으로 엎드리는지 여부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얼마나 큰 자입니까?
11/5/2010
또한 아차! 하는 순간 내 고집대로 행하는 모습들 속에서
하루중에도 얼마나 많이 속으로 제 자신에 대한 실망과 낙심이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크신 권능의 손아래 있음을 다시금 깨달으며
오뚜기처럼 또 일어서서 나아갑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