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최종 목표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행7:55-57)
신자는 평생을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머리 둘 곳이 없더라도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의 최종 목표를 골고다로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땅에서 가진 것 모두 바쳐 주님의 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좋은 의도이며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쉽게 간과해버리는 큰 약점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하기에 자꾸만 어렵고 고달프면서도 자기가 희생되는 측면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여깁니다. 예컨대 구제 선행에 망설임과 아낌이 전혀 없어야 하고, 전도와 선교에 전적 헌신이 따라야 하며,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행사와 봉사에 열일을 제치고 참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어떤 방식이든 달성해야 할 과업이 됩니다. 도덕적, 종교적, 영적으로 지금 행하고 있는 “일 중심의 신앙”입니다. 특별히 희생적, 헌신적, 이타적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실망에 빠져버립니다. 헌금과 봉사에 조금이라도 망설임이 있다면, 새벽기도 같은 교회 행사 출석을 등한히 하면, 자기 코가 석자라 구제나 전도할 짬이 없으면 십자가를 지고 있지 않은 것이기에 괴로워합니다.
이런 생각은 혼자서 주님과 교제하는 부분에까지 적용됩니다. 영적인 문제도 측정 가능한 일로 따지려 듭니다. 달성 가능한 목표치를 정해놓고 기도하고 말씀 보다가 조금이라도 그 계획보다 뒤처지면 크게 자책합니다. 힘든 일에 인내가 조금만 부족해도,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 미세한 불순물이 개입되면,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믿음이 너무 없거나 자라지 않는다고 한탄합니다. 요컨대 십자가를 온전히 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절대 오해는 마십시오. 그렇게 하지 말라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는 것이 신앙의 최종 목표 지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골고다는 엄격히 말해 최종 골인 바로 직전에 도달할 목표지점입니다.
본문의 스데반의 예를 보십시오. 알다시피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 최초로 순교했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의 신앙 목표도 자신의 전부를 바쳐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었다는 증거입니까? 아닙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그는 순교하기 전에, 정확하게는 돌 한방도 맞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먼저 보았습니다. 우리가 돌 맞아 죽어가면서 하늘 영광을 본 양 착각하는 것과는 달리 말입니다. 그가 하늘의 영광을 보노라고 말하자 사람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 신앙의 최종 목표지점도 스데반과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실제로 목도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지금 그가 하늘 영광을 먼저보고 순교 당했다고 해서 십자가가 더 나중이라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그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천국 영생의 확신이 있었기에 어떤 핍박도 무릅쓰고 과감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가 설교, 전도할 때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거의 틀림없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곧바로 순교했으니까,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가 돌에 맞아 순교할 것을 아시고, 이 또한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계획 속에 있었음, 당신의 영광을 그에게만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스데반도 평소 천국에 대한 소망을 열렬히 품었다는 뜻입니다. 그의 소망은 구원 받아 지옥 형벌에서 면제 되었기에 단지 안심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도 사실은 우리에 비견하면 아주 견고한 믿음이지만 그는 더 나아가 실제로 천국에서 주님과 맞대면 하는 영광을 누리고자 간절히 소원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주님이 부르신다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이든 이 땅의 삶을 당장 마감하고 천국 갈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남아있는 이유는 오직 복음을 더 전하기 위한 한 가지 목적뿐이었습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사도들이 다 그랬지 않습니까?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8,9)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2,13)
그들은 천국을 실제로 엄청나게 사모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주님과 지셨던 것과 똑 같은”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기뻐하며 졌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그리고선 즉, 핍박이 따를 것을 익히 알고도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빌립도 돌로 맞아 죽는 순교를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맨 처음 맞았던 돌에는 심한 고통이 따랐겠지만 그 이후로는, 어쩌면 아예 처음부터, 아무 통증도 못 느꼈을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마치 육안으로 안 보이는 레이저광선 보호망처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을 것입니다. 천국 문이 열렸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은 불 수 없었어도 그의 머리 위로 주님의 빛이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 내지 통로가 되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사자 밥이 되거나 불에 타죽었던 초대교회 신자들의 모든 순교 현장에도 신자만 감지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빛이 비춰졌을 것입니다. 그 빛의 계단을 타고 각자의 영혼이 아무 고통 없이, 혹시 있더라도 그보다 훨씬 더 큰 안락과 평강과 기쁨 가운데 천국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 다음은 두말할 나위 없이 주님 품 안에 안기는 영광을 누렸을 것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창28:12)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3-15) 십자가는 하늘에 맞닿은 그리스도의 빛의 계단입니다. 신자는 골고다 십자가의 고난을 넘어서 그 위에 있는 하늘의 영광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 항상 보면서 살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신자 모두가 선교사 목사 되어서 순교지로 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전부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보혈로 자신의 품성이 거룩하게 바뀌며, 그분의 은혜와 권능이 자기 삶의 세밀한 구석구석에서 넘치도록 누리고 또 주위에 나눠주며, 인생 전체가 그분 품 안에 잠겨 있어서 오직 그분의 영광만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라는 것이 단순히 머리 안에 머무르는 관념이나, 교회 행사나 힘든 일에만 외쳐대는 종교적 수사에 그쳐선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 가르침, 특별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모든 사고, 말, 행동의 준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과의 동행이 일상의 삶에서 실제적 체험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진정으로 그분만이 주인이시기에 자신의 전부를 내어드리면서 성령의 충만하신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요컨대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자기의 최고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과연 그분이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서있기를 원하시는지 깊이 묵상하여서 그 깨달은 바에 따라, 그것도 자신의 지성이 아닌 성령의 가르치심에 따라, 실제로 행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그분의 은혜와 권능으로 자신의 주변을 완전히 채워달라고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내 삶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충만하게 드러나게 해달라고 열망하면 십자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은 죽은 후는 천국이 이미 보장되어 있기에 이 땅에서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길 더 소원해야 합니다. 어쨌든 하늘의 영광이 이 땅에 구현되는 것이 신앙의 최종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가장 먼저 기도하라고 예수님이 가르쳤듯이 말입니다.
십자가가 최종 목표가 되면 자칫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불완전하여 염려와 두려움이 앞서는 존재입니다. 자신을 희생하거나 죽이는 일에는 매번 나태 주저, 수치, 염려, 두려움, 고통 등이 알게 모르게 따르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주님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있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항상 먼저여야 합니다.
다른 말로 초대 교회 사도나 신자들의 행적을 그들의 도덕성, 종교성, 영성에 비추어서 감히 흉내 내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아직 그럴 만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 이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기에 천국신앙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가장 다른 점이었습니다. 거기다 기독교가 태동하려는 특수 상황인지라 성령의 권능이 가장 활기차게 드러났던 때였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더러 지레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의 열린 마음과 믿음과 소망만 따라준다면 오순절 이상으로 충만하게 역사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우리 또한 그들이 갖지 못했던 것을 가졌습니다. 초대 교회에선 예수님을 직접 육안으로 보았지만 우리는 그 사건 전체를 더 세밀하게 기록하였고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정확히 풀어 놓은 성경이 있지 않습니까?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단 천국 영광을 갈망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개인적, 인격적, 체험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천국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일에서 그들보다 하나 부족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그분을 따르다 보면 골고다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대신에 십자가부터 지겠다고 덤비면 자칫 나의 공적, 능력, 자격, 자랑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 전에 이미 자신의 힘에 부딪혀서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습니다. 나아가 염려와 두려움이 좀처럼 떠나지 않으며 없애려면 너무 힘듭니다.
영광의 하나님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진정으로 시인하는 모든 자를 지금도 당신의 너무나 놀랍고도 신비하며 엄청난 영광 가운데로 이끌고 계십니다. 아무리 이해조차 되지 않는 힘들고 억울하고 쓰라린 환난 속에 우리를 밀어 넣은 것 같아도, 그래서 우리 겉 사람은 날이 갈수록 후패해져도 그분의 영광은 절대로 단 한 치도 손상되지 않으며 결국에는 우리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나아가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서 우리에게도 가장 좋은 유익이자 축복이 됩니다.
신자니까 열심을 내어 십자가를 지려하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그조차도 신자의 체면만 지키려는 싸움에 그칠 수 있습니다. 대신에 주님만 앞에 모시고서 묵묵히 또 기꺼이 따라가면 우리 앞길에 드러나는 것도 자연히 그분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일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 중심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11/29/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