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마리아가 되어 있는가?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눅8:19-21)
간혹 예수님은 자기 가족은 전혀 돌보지 않고 복음전파에만 전념했으니까 신자들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집니다. 심지어 가족 중에 예수 믿는 일을 방해하는 불신자가 있으면 다투고 원수가 되어도 괜찮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는 언뜻 그런 오해를 살만한 것도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의 식구리라.”(마10:35,36)를 들 수 있습니다. 이는 복음의 특성을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강조한 것입니다. 누구나 믿고 나면 제일 먼저 체감하는 것이 바로 가족들의 반발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뜻은 사람은 영적으로 따져 예수를 주로 시인하느냐 하지 않느냐 두 종류로만 갈리는데 그 두 종류의 믿음에는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끼리, 그것도 가족끼리 원수 되라는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영원한 구원과 심판 사이에 인간이 속할 중간 회색지대는 아예 없고 오직 골고다 십자가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가족이라도 예수 모르는 시어미는 예수 아는 며느리를 원수처럼 미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 며느리가 불신자 시어미를 미워해도 좋다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는데, 가족 중에 그런 자가 있다면 감정적으로는 더 서운하겠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사랑하고 기도해야합니다.
본문도 그런 오해를 사는데 일조(一助)를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당신을 찾아온 모친과 동생들을 내친 것 같이 여깁니다. 그러나 그런 언급이나 그렇게 해석될만한 힌트가 전혀 없습니다. 모친과 동생들은 여전히 무리들 밖에 서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선 무리들을 향해 말씀하셨기에 밖에 있는 가족들은 아마 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고 나면 교회 사람들만 사랑하고 불신자 가족은 등한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가족을 비하시키고 제자들을 격상시킨 것도 아닙니다. 지금도 가족이라는 비유를 통해 무리들에게 또 다른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바로 앞에서 가르친 내용을 되풀이하여 주지시킨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의 강화를 마친 직후에 이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일관되게 좋은 밭이 되어서 복음의 열매를 많이 맺으라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요.”(15절)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18절a)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21절b)
본문 비유대로 하자면 예수 믿는 자의 신분은 어떻게 변모되었습니까? 여자 성도는 예수님의 엄마, 남자 성도는 예수님의 동생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모두가 성모 마리아요, 야고보 사도 같이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불경하게 여겨집니까?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지 않습니까? 혈통의 가족보다 영적으로 낳은 가족이 우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육신의 어미였던 성모와 하나 다를 바 없다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괜스레 불경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오직 하나입니다. 듣기는 들었는데 스스로 삼가지 않았기에 즉, 주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은 합니다. 또 우리 속에 남은 정욕과 죄악 때문에, 나아가 당장의 어려운 문제와 열악한 환경 때문에 온전히 순종치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이유는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대로 우리가 이미 좋은 땅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더러 비료를 주고 물 뿌리며 열매를 맺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땅에 들어와 있으니까 예수님이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이신 당신께 가지로서 붙어 있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우리가 온전히 순종치 못하는 진짜로 솔직한 이유는 지금 있는 땅이 그리 좋지 않으며 이보다 더 좋은 땅이 따로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곧바로 좋은 땅에 들어온 것이며 믿은 것 자체가 좋은 땅입니다. 좋지 않은 땅은 세상입니다. 지금의 땅이 그리 좋지 않다고 여긴다는 것은 예수 믿는 것 자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더 좋은 것은 예수 안 믿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더 좋은 세상을 더 좋게 누리려고 예수 믿는다는 뜻도 될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누가 뭐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혹은 우선적으로 하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누가 뭐래도 최고로 좋게 된 신자를 불신자 가족들이 미워하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좋다면 그분을 따르는 일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좋아져야 합니다. 이 둘은 별개로 다뤄질 사항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저 그러면 그분을 따르는 일도 그저 그럴 것이며, 예수님이 나와 아무 상관없다면 그분을 따르는 일에도 전혀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럽지만 저부터도 예수님은 분명 좋고 사랑하는데 세상에 대한 미련을 아직 온전히 버리지 못해서 주저하는 경우가 너무 잦습니다. 두 주인을 겸해서 섬기지는 않는데도, 더 정확히 말해 섬기려 하지 않는데도, 어느 쪽이든 현재 나에게 더 좋게 해주거나 더 강력한 힘으로 이끌면 마지못해 따라가겠다는 뿌리 깊은 속내인지 모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성경적으로 따져 사람의 신분은 예수님의 가족이냐, 원수냐 둘 중 하나뿐입니다. 세상이 원수가 되어야 예수님의 온전한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잘 믿는데도 끝없는 고통 가운데 두십니까? 세상 때문에 그분을 따름에 자꾸 주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리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순종으로 바꾸어서 우리를 당신의 동생으로, 엄마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스스로 자문해야 할 단 한 가지 질문은, 주님의 엄마와 동생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지, 아니면 세상에 대한 미련의 끈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붙들고 있을 것인지 여부입니다. 그것도 현재 당하는 고통을 인내로 통과하는 시험을 통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하든, 그 가운데는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물론 포함됨, 현재의 고난을 빨리 벗어버리고 세상이 주는 안락을 누리려는지 아니면 계속 환난을 당하더라도 정말 예수님과 영적으로 충만하게 맺어지는 관계를 택할 것인지 스스로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2/28/20101
예수님 품안에 들어온 이상
올 한해도 점점 세상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일들이 또 생길것이며
그 가운데서 오직 주님하고만 더 충만하게 채워지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