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7:13-15) 성경을 읽는 즐거움

조회 수 801 추천 수 38 2010.11.01 14: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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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는 즐거움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눅7:13-15)


성경에는 완전히 죽은 자를 살린 기사가 총 7번 나옵니다.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왕상17:17-24),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왕하4:32-37), 베드로가 다비다를(행9:36-43), 바울이 유두고를(행20:7-12) 살린 사건, 넷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본문의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눅8:49-56),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요11:17-44)를 살린 세 건을 합하면 총 일곱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한 건 더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었다가 당신 예언대로 삼 일만에 스스로 무덤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신이 당신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럼 도합 8건이 됩니다. 그런데 이를 잘 분석해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우선 구약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와 엘리사가 각 한건씩 둘, 신약 사도의 대표 베드로와 바울이 각 한 건씩 둘 합이 넷입니다. 사건의 정황과 기적을 일으킨 주의 종의 성격들이 신구약 성경끼리 정확하게 짝이 맞습니다. 시대와 장소가 전혀 다른 곳에서 일어났으며 사건이  일어난 그대로 기록했을 뿐인데도 그러합니다.  

바꿔 말해 사전에 기획하거나 모의한 일들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기획하려면  사람을 죽이는 일부터 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설령 극단적으로 그렇게까지 했다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치명적 하자가 되기에 경전으로서 의미와 가치를 전혀 갖지 못합니다.  

또 예수님은 다른 네 사람이 행한 것과 정확히 짝이 맞게 4건의 기적을 행했습니다. 신구약의 모든 선지자와 사도들을 다 합친 셈입니다. 이 또한 사전 기획한 일이 절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안에 있었던 즉, 이미 그분이 계획하신 일이긴 하지만 사건의 당사자인 인간들 쪽에서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어낼 수는 결코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완벽하게 짝을 맞추기 위해 사람을 일부러 죽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죽을 원인이 있어서 죽었고 예수님은 이미 죽은 자를 살린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 일어나는 만사와 당신의 주권적 계획 사이에는 어떤 부정적이거나 모순된 상충이 없을 만큼 그분은 완전하신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후대의 성경 기록으로도 남기려고 짝 맞추어 8명의 죽음을 당신의 계획 가운데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만은 단 한 치의 도덕적 하자가 생길 수 없습니다. 우선 인간의 생사화복은 오직 그분의 절대적 주권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죽였지만 다시 살려냈지 않습니까? 거기다 마지막에는 당신의 독생자까지 죽였지 않습니까?    

이런 수치가 의미하는 것이 엘리야, 엘리사, 베드로, 바울을 다 합쳐도 예수님에게 못 미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님은 쉽게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본체이십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 생명을 부여하신 즉, 생명의 주인이자 원천이신 그분에겐 정말 여반장(如反掌)입니다.

그보다는 신구약 성경 모두가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에 관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과 믿는 자들로 대표되는 인간세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역사를 담고 있는데, 그 처음과 끝에 바로 예수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6-2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5:39, 14:6)

신구약 성경이 오직 그분만을 증거한다는 것은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죄책에 대한 대속물로 바쳐지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신약의 모든 믿는 자들의 영생을 보증하러, 정확히 말해선 직접 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또 신구약 네 건의 선지자와 사도들의 기적은 하나님께 간구하여 이뤄졌지만, 예수님은 모두에게 “일어나라”는 당신의 말 한마디로 살리셨습니다. 직접 새 생명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짝이 본문 안에 하나 더 숨겨져 있습니다.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에선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과부더러는 울지 말라고 하시고선 당신께서 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의 슬픔마저, 그것도 죄 값으로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할 인간이 마땅히 울어야 할 바인데도, 당신께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 하자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었으며 ......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삼하7:5-11) 이 또한 예수님이 대신 우신 것과 정확히 짝을 이루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 자녀들의 삶과 인생을 책임지십니다. 신자는 오직 순전한 경외심으로 그분을 따라가기만 하면 하면 됩니다. 또 다윗 성전은 바로 예수님의 몸의 예표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의 마음속에 영원한 성전을 지어주셨지 않습니까? 신자는 하나님의 전이 되었고 성령은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장사 행렬을 보고 예수님이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장례 일행은 슬픔에 겨워 예수님이 누구인지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고대에는 수명도 짧고 사고사도 많아 예수님도 무심코 지나쳤을 수 있습니다. 또 현장에 있던 어느 누구도,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으리라고는 예상 아니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비록 조금 전에 직접 만나지도 않고 멀리서 말씀으로만 백부장의 종의 죽을병을 낫게는 했지만 말입니다.    

유대 장로들은 백부장이 회당도 지어주고 유대 민족을 사랑하니 그 종을 고쳐주어야 한다고 변호했지만 주님은 오로지 백부장의 믿음만 보고 살려주셨습니다.(앞글 참조) 과부는 주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전혀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커녕 누구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제는 믿음과도 아무 상관없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뜻 안에서 일방적 주도적으로 그녀의 아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구원을 주실 자는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그 과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서 주관하십니다. 믿음마저도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단지 그분의 구원에 반응하여 거듭났음을 확신할 수 있는 통로일 뿐입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65:1)

하나님이 성경을 세밀하게 짝을 이루게 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생명과 부활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토록 해 일곱 기적 같이 새 생명을 일방적 은혜로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슬픈 일을 겪더라도 그분께 나와 토설하면 반드시 희락의 찬송으로 바꿔주십니다. 그분이 대신 우시고 우리의 울음을 그치게 해주십니다. 성령의 감화로 성경을 읽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로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11/1/2010  

하람맘

2010.11.02 02:02:01
*.163.11.235

성경 - 처음 성경책을 가지게 되었을때 그냥 베스트 셀러라는데, 교회 다니기 위한 교제 쯤으로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예배시간에 성경 봉독을 하면 다른 세상, 다른 언어로 이야기 하는 것 같아 멀게만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좀 알고자 읽기 시작했는데 무슨 전래 동화 같은 시작 (창세기), 도통 모르겠어서 신약으로 다시 시작하면 누가 누를 낳고를 보다 책을 접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 그러다 주어들은 말 - 이스라엘 역사라는데... 내가 이스라엘 역사를 알아 뭐해??? 예수님의 이야기 라는데 - 암튼 성경은 저에게 제 손안에 있지만 항상 멀리만 했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다 전 성인이 되고 시집을 가서야 성경이 무언지 알게 됩니다. 물론 박목사님 교회에서요 ㅋㅋ 목사님의 윗글 처럼 성경에 오묘한 부분들과 놀라 자빠질 이야기, 신기한 일치의 이야기들로 저를 성경에 호기심을 갖게 하셨거든요. 사실 고백하지만 그때도 너무 어렵기만 했습니다. 지금도 많이 어렵구요. 하지만 이제는 확실이 아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는 이야기가 뭔지 ^^ 성경을 읽으면 누리는 기쁨이 뭔지 ^^

김순희

2010.11.02 09:34:14
*.165.73.38

"믿음은 단지 그 분의 구원하심에 반응하여 거듭났음을 확신할 수 있는 통로" 아멘!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뚫고 들어오셔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이건만 우리는 늘 우리의 믿음이 구원을
이룬다는 순서 뒤바뀐 것을 들이대면서 경건을 떨고 믿음을 자랑하고..ㅠㅠ
사람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구분치 못하고 자기 의를 가지고 또 경건을 떨고..ㅠㅠ
제 고백입니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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