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7:28) 왜 우리가 세례 요한보다 더 큰가?

조회 수 16468 추천 수 50 2010.11.05 19:23:25
운영자 *.108.163.87
왜 우리가 세례 요한보다 더 큰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눅7:28)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고 해놓고 곧바로 하나님 나라에 가면 가장 작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놀랍고도 이해하기 힘든 대반전입니다. 과연 무슨 의미로 그는 낮추고 우리를 높여줍니까? 설마 요한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애제자들마저 주님을 따르게 하고선 끝까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은 높이지 않았습니까? 반면에 우리는 정치지도자들의 잘못을 과감하게 지적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일이라곤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 전도도 제대로 못하고 세상 방식으로 아부하기 바쁘지 않습니까?  

이 문제 역시 성경 본문에서 해석의 키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라는 울타리 안에선 요한이 가장 크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 안에선 요한은 가장 작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요한과 우리를 직접 비교하지 않고 각기 그 속한 테두리 내에서 평했기에 그것부터 따져보는 것이 이해하기 더 쉬울 것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는 물론 인간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에선 요한이나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는 뜻은 당연히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 땅의 인생여정에서의 인격적 도덕적 측면을 따진 것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에서 보듯이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 중에선 요한이 가장 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행한 세례도 윤리적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반면에 그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했다는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크게 둘인데 구원 받은 자가 죽어서 가는 특정한 천국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후자는 당연히 이 땅에서부터 그분의 인도를 받는 신자의 삶도  포함합니다. 분문에서도 이 두 가지 뜻은 다 적용됩니다.

우선 요한의 일생은 분명히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카펫을 깔고 하나님의 독생자에게 침례를 줌으로써 누린 인간으로서 최고 영광도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옥에 갇히는 바람에 정작 주님의 사역을 보지 못했고 천국 복음의 메시지도 직접 듣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과 동시대의 동년배 인척이었는데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현장에 참예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땅의 하나님 나라라는 측면에서도 당시의 사도나 신자보다 예수님의 은혜를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에 작은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와 비교해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완성된 성경을 통해 십자가의 진리를 더 명료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평생토록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깨끗이 씻으며 거룩하게 자라도록 이끌지 않습니까? 또 성령의 권능을 충만하게 받으면 미혹된 영을 주께로 인도하고 이 땅을 변화시킴에 주님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이 땅에서의 하나님 통치측면에서도 우리는 그보다 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죽어서 가게 될 천국에서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이 부분에선 약간 해석상의 딜레마에 봉착합니다. 천국에선 이 땅에서 주님께 충성한 결과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인데 우리는  요한과 도무지 비교가 안 됩니다. 요한은 모세, 엘리야, 노아, 바울, 베드로와 같은 반열에 서야 하고 우리는 가장 말단에 겨우 자리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주님은 오히려 우리가 그보다 훨씬 크다고 합니다. 단지 우리더러 믿음에 더 자라서 거룩해지라는 동기부여 혹은 격려성 말씀인가요? 주님이 말씀하셨으면 정확하게 실제로 그러합니다. 물론 인간으로 오신 주님이 인간을 향해 말할 때는 과장, 비유, 대조, 상징 등의 수사법을 동원하지만 그 안에 담긴 근본 뜻만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요컨대 천국에선 우리도 분명 요한 이상으로 큰 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천국에선 사실상 크고 작은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품성 자체가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원을 허락한 당신의 백성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두 사안을 대조하여 강조하는 수사법을 사용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 또 요한과 일반 성도를 비교하면서 가장 크고 가장 작다는 최상급, 문법적이 아닌 실질적인, 표현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분문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해선 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최상급 표현법을 동원했지만 요한과 우리에게 번호를 붙여서 순서를 매기려는 의도는 아닐 것 아닙니까?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여자가 낳은 자, 하나님 나라는 한정된 영역 안에서 당신의 가르침을 잘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당시의 제자들이나 후대의 성경 독자더러 여자가 낳은 자의 입장에선 요한 같은 자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나라에선 그런 윤리적 인격적 측면보다 다른 점을 하나님은 더 귀하게 여기므로 그런 천국의 비밀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위치, 신분, 계급, 실적 등은 천국에선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죄를 사해주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진정 의지했었느냐만 문제 삼는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어떤 평가, 취급, 대우를 받았던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필터를 통해서 보십니다. 이는 천국에 가서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신자로 살고 있는 동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이후부터, 아니 구원을 줄 때부터, 더 정확히는 그 이전부터 그러하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이 천국이라고 이와 다른 기준을 적용할 리는 절대 없습니다. 땅에서 요한이 가장 크고 하늘에서 요한이 가장 작다는 것은 당신 백성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변함과 차등이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선 실제 문자적으로도 우리가 요한보다 더 클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필터가 그 답입니다. 요한이 골고다 언덕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뜻입니까? 이미 그것은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요한보다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더 많이 흘릴 수밖에 없기에 그러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더 연약, 무지, 미숙,  나태,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현실적 문제와 고통에 더 힘겨워했기에 주님 앞에 더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살아 갈수록 더 많이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주님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었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은혜를 더 받기 위해 죄에 더 머물렀다면 가장 작은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거하는 것이 너무나 추하고 눌리고 쓰리고 아팠음을 절감하고 엎드렸다면 은혜는 분명 더한 것입니다. 또 그래야 성령의 인도와 간섭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됩니다. 이렇게 십자가로 더 많이 자란 자는 천국에서 자연히 더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은혜와 권능을 받고도 계속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하면, 비록 죄의 자리는 아니지만 여전히 돌고 있는 그 자리에 머무른 셈이니까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본문에 이어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백성과 세리는 요한의 세례를 받은 지라 하나님을 의롭다 했고,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하나님 뜻을 저버렸다고 합니다. 전자는 요한의 주님을 예비하는 메시지를 듣고 예수를 믿었기에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로 받아들여졌고, 후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인간의 크고 작음은 예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누리는지, 주님 앞에 얼마나 자주 신령과 진정으로 엎드리는지 여부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얼마나 큰 자입니까?

11/5/2010

김광찬

2010.11.06 00:28:44
*.169.140.42

매 순간 주님의 은혜에 의지하고 살면서도
또한 아차! 하는 순간 내 고집대로 행하는 모습들 속에서
하루중에도 얼마나 많이 속으로 제 자신에 대한 실망과 낙심이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크신 권능의 손아래 있음을 다시금 깨달으며
오뚜기처럼 또 일어서서 나아갑니다. 아멘 †

이선우

2010.11.06 09:48:28
*.222.242.101

아멘! 오늘도 십자가 은혜를 잊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정순태

2010.11.07 15:44:51
*.216.63.181

주님께서 말씀하신 큰자와 작은자가
오늘날 세상이 말하는 큰자와 작은자와는 다름을 믿습니다!
이 중요한 점을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Steve

2010.11.09 03:35:31
*.169.221.248

지금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이 성경 구절을 비롯해서 가끔씩 성경 말씀이 우리를 혼돈에 빠뜨리는 듯한 말씀들이 성경 말씀 속에는 여러군데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목사-교사님으로부터 (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HIS INTENTION) 그 구절들을 정확히 가르치도록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은사를 부여 받은 분) 배워야만 합니다.

성경 말씀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신자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말씀을 배워 영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성령 세례에 대해 세례 요한이 한 말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3:11)

마가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강림 이후 교회시대가 열린 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자들에게는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으로 SEAL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영으로 인을 치심).

그리고 믿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믿는 모든 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 갈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 (신자의 몸)을 성전 삼으시고 내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엄청난 축복은 구약 어느 누구도 받지 못한 축복입니다. 시편 51:11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성군 다윗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시편 51:11 "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시 말해서 성령 강림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을 허락하셔서 그 일을 감당할 능력을 성령님을 통하여 공급하셨습니다. 바로 그 성령님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신자들에게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때에 성령님이 그 신자의 몸을 성전 삼으시고 영원토록 내주하시며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성령 세례에 대한 개념이 교파에 (denomination) 따라 달리 설명되지만 바로 이것을 성령 세례입니다.

오순절 교회에서는 잘못된 시각에서 성령 세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성령 강림 사건이 그 당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던 제자들과 성도들이 주님 승천 이후 10일이 지나서 강림 하셨기 때문에 먼저 믿었던 자들이 그 때에 성령 세례를 받았기 (주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 믿은 이후에 성령을 받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들이 비록 이 땅에서 어쩌면 명성이 없고 내세울 공적이 없으며 또 실패하고, 몸이 병들고 ... 처해 있는 주변의 모든 상황들이 전혀 자랑스럽지 못할지라도 다윗보다 더 위대한 위치에 있지 않을까요?

비록 다윗은 위대한 업적을 하나님 앞에 이룬 성군이지만 우리는 그 성군이 그러했던 것 처럼 성령님을 거두어 가지 말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내재하심과 성령님과 교제함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성령 세례 받은 신자와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천국이 정확히 어떠한지는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시대의 신자들은 사후에 분명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에 입성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례를 통하여 이 세상에 공표하는 거룩한 의식을 집전하는 영광을 누렸으니 이 세상에 그 누구가 이런 영광을 세례 요한 이외에 차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령 세례의 중대함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듭니다.

성령을 받은 신약 시대의 신자와 성령을 받지 못한 구약 시대의 신자와의 차이에 따른 천국에서의 위상이 달라지기때문이 아닐까요?

구역 시대나 신약 시대의 유일한 구원의 길은 바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구약 시대의 신자들은 오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고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이쳔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요.

하람맘

2010.11.09 06:00:10
*.186.65.167

오직 죄를 사해주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진정 의지했었느냐만 문제 삼는다는 것이 정말 위로가 됩니다. 다시 또 깨닫지만 이것이 기독교의 참 진리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다른 종교 처럼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도덕적이든 물질적이든) 천국에 가서 큰자가 된다면 저같은 죄인은 절망에 빠져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죄를 자복하고 무릎 꿇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참 쌩둥 맞은 질문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천국에 가기 전에 제가 산 인생을 필름처럼 다 보여주셔서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간다는 웃스개 소리가 있는데 정말 제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한 죄도 보여질까요?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 저의 지난 과거를 보여주시며 하나님 앞에 서있짐도 못하게 진짜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앞에 도저히 갈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

하람맘

2010.11.10 01:54:01
*.195.4.24

오늘 어떤 목사님의 글에서 재미있는 말을 읽었습니다. 그분도 '큰자'에 대한 글이었는데, 사람은 4분류로 나눌수 있답니다. 키도 큰자, 키만 큰자, 키도 작은자, 키만 작은자 - 여러분은 어느분류에 속하십니까? 전 키도 큰자가 되려고 애를 쓰며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하나님앞에 큰자가 되기 위해 살아야 겠습니다

Steve

2010.11.14 05:40:39
*.169.221.248


우리가 받은 구원에는 영원한 보장이 주어지는 것일까? 이 땅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실패한 삶을 살 때에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는 것이 아닐까 ?
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씩 그런 뉘앙스를 주는 말씀들이 더러 있기에 누구나가 한번씩은 경험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공부하다가 마침 사도 바울과 마틴 루터가 강조한 말 가운데 구원의 확신에 바탕을 두고 당당하게 선포하는 말인 것 같아 그 정보를 함께 나누고자 여기 글을 올립니다.

먼저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에 인도함 받으시기를 소원합니다.

혼돈이 없기를 바랍니다.



1517년 10월31일 정확히 493년 전에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가그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경대로 올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음을 “95개 조항”으로 작성하여비텐베르그성 교회 문에 걸어 둠으로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많은 교회에서는 이날을 기념하여 복음을 준수하는 교회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자 다짐하며 여러 행사를 한다.

루터의 종교 개혁의 핵심은 바로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은혜 (Sola Gratia)
오직 하나님의 영광 (Sola Deo Gloria) 이었다.

종교개혁 기념일이 열흘이나 지난 지금 루터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을 공부하면서 그 때 마틴 루터가 한 말을 발견하여서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 싶어서이다.

마틴 루터가 보름스 회의 (Diet of Worms) 에서 당당하게 외친 말은 바로 “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Here I STAND, I can do no other) 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바로 “STAND” 라는 동사인데 이 단어가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1절에서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그 단어에 어떤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지 그것을 알고 있었던 마틴 루터는 당당하게 그 자리에서 그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특히 오늘날의 교회 내에는 알게 모르게 ‘은혜로운 하나님의 복음’ 이외에 ‘사람의 냄새나는 의로움’으로 하나님 의를 대체하려는 ‘현대판 바리세인의 율법’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음을 염려하는 이즈음 더욱 필요한 교훈이라 생각한다.

Stand (ἵστημι histēmi)라는 동사는 Perfect Active Indicative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 의미는 과거에 어떤 동작이 취해졌음으로 그 동작 (행위)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결과는 영원함을 뜻한다. 이 동사 “Stand”이전에 바울이 취한 행동, 그리고 고린도인들이 취한 행위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했고 그가 전파한 복음을 “Brethren” 형제들이 -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고백할 때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심으로 믿는 자는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형제(남, 여 모두 포함)”가 된다. 한 가족 (Family)이 되었다는 말이다. 고린도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고, 타락한 신자들이었는지 고린도서에서는 자세히 밝혀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런 신자들을 “형제들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한 하나님 (God the Father) 아버지의 자녀들 ”이라고 부르고 있다.- 받았다. (Received / Accepted).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 Received (παραλαμβάνω paralambanō)는 Aorist Active Indicative의 형태다.

이 형태의 동사가 의미하는 것은 과거 어느 시점에 행했던 행위가 “Effectively, successfully, completely, even once, actually, really 즉 단 한번으로 효과적이고, 성공적이고, 완전하게, 실제적으로, 정말로”효력이 있다는 의미를 나타나게 한다. 즉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고린도인들이 그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을 그때의 그 믿음이 (받은 복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구원을 받기에 효과적이며, 성공적이며, 완전한 믿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결과는 영원한 구원 위에 Stand(histēmi) 서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 주변’에는 ‘현대판 율법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율법적 기준을 가지고 주변에 그들의 눈에 연약해 보이는 혹은 이제 갓 믿음을 시작한 교인들의 넘어짐을 보고 정죄하곤 한다.

고린도 전서를 통해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강한 믿음, 예를들어 이방 신 앞에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그들이 섬기는 그 우상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으니까 – 그로 말미암아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 그 때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주변에서 말하는 Taboo (금기)에 더 비중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가 있으며 또 그런 금기를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잃게 된다고 잘못 알아 그 거짓 교훈을 증거하는 부류도 있다) 먹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교회 (주님 머리 되시는 몸된 교회-믿는 자들의 집합체)의 울타리 안에서는 믿음의 권리보다 믿음의 사랑이 선행되어야 하는 곳이다.

마틴 루터는 바로 이 믿음 위에 자신이 굳건하게 서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목숨을 빼앗아 갈 수 있는 그 권세 앞에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그 구원은,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로마서 8장 38,39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주 구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없으리라”


성경이 왜 구약은 히브루 언어로 또 신약은 그릭어로 기록되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언어이기에 그리하셨을 것이다. 위에 언급된Perfect Active Indicate형태를 취하고있는 동사 Stand (ἵστημι histēmi)라는 언어를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 행한 행위의 결과가 영원하다는 것을 어느 나라 말이 이렇게 정확히 드러낼 수 있을까? 그런데 그릭어의 문법에 대한 배경없이 뒤따라 나오는 2절 말씀을 읽게 되면 곧 바로 딜레마에 빠찌게 된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 by which also you are saved, if you hold fast the word which I preached to you, unless you believed in vain.-

언뜻 보기에 1절과 2절이 상충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여기에 기록된 가정법 (IF)와 동사 (SAVED)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으면 우리 구원은 우리의 어떤 행위로 구원이 유지 (MAINTAIN)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해) 결코 상실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특히 믿음이 좋다고 여기는 신자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유지하는 노력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신 그 구원이 유지되어 간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빠지기 쉽다. 왜냐면 이사야서 64:4절에 인간의 선은 하나님께는 오로지 냄새나는 걸레조각 (Filthy Rag/ 히브루 원어로는 여자들의 월경대와 같다는 의미라고 한다) 과 같은 것이다. 그런 독선적인 의 (Self-righteousness)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여기는가? 신자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때 하나님 (God the Father)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 시켜 주신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바로 그 “ 의 (GOD’S RIGHTEOUSNESS)”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고 또 나아가 축복하신다.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의를 지켜보시고 보호하시고, 사랑하시고, 함께 하신다. 바로 그 의가 하늘 나라로 가는 “TICKET”이 되는 것이다.

현대판 율법주의적인 신자는 주변의 신자들에게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그들의 기준으로 발견하지 못하면 그런 신자들에게 구원도 보장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또 자신들 의로 인간적인 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 아니라) 을 생산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인간의 선이란 하나님과 상관 없는 즉 인간의 관점에서 선하다고 여기는 대로 행동하는 것…예를 들자면,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이후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잎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렸다고 했다. 자신들이 선으로 여긴 행위가 하나님께 받아드려졌는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예가 해당이 될런지 모르겠지만 교황은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면 항상 그 나라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도록 그 땅에 첫 발을 디디는 즉시 입을 땅에 대고 강복하신다. 그 거룩한 (?) 선한 행위에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참 아름다운 종교적인 거룩하고 선한 모습을 본다. 그런데 과연 우리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나? 이 땅에 진정한 평화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전쟁과 소문이 끊임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관점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 선하고 거룩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인정 받을 수 있는 의로운 삶과 기도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이, 창세 전에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자의 자세일 것이다.


2절의 말씀 IF 에 대해서 보면 가정법으로 쓰인 이 구절은 우리 말에는 헬라어와 같은 법칙을 찾을 수가 없다. 예를들어 이 구절에 쓰인 가정법은 ‘First Class Conditional Clause’이다. 즉 조건문의 조건절이 (protasis) 참 (True) 이며 그리고 조건문의 귀결절 (apodosis)도 참 (True)인 것을 말한다. 하지만 다른 예로 요한일서 1장 9잘 말씀, 즉 우리가 범한 죄를 자백하는 근원이 되는 말씀의 구절의 조건절은 “Third Class Conditional Clause”이다.

조건문의 조건절이 (protasis) 그 당사자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즉 지은 죄를 자백할 수도 있고 자백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만약에 지은 죄를 자백만 하면 조건문의 귀결절 처럼 죄는 사함 받고 불의한 죄까지도 깨끗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의지에 따라 자백하지 않으면 죄는 사함이 없으며 불의한 죄는 깨끗함을 입을 수가 없다 (즉 하나님과 교제의 관계에서 일시적으로 단절되는 것이지만 구원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는 동안 실족함을 미리 아시고 이런 은혜의 제도를 마련해 두신 것이다. 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리요! 이 은혜의 제도 장치를 마련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구원 받은 이후에 신자들이 범한 죄를 어떻게 사함 받을 수 있었을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고 로마서는 말하고 있는데 왜 또 죄의 사함이 필요한 것인가라고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태아날 모든 인류의 모든 죄는 이미 창세 전부터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죄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 상에서 심판하실 때 그 모든 죄를 다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걺어지게 하시고 그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걺어지신 예수님을 심판하셨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들에게는 죄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Issue/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힘을 공급 받아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삶에 있어서 ‘LOSER/실패자’가 된다. 여기서 ‘Loser’라함은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삶을 실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요한 일서 1장 9절 말씀에 따라 자백할 때 우리의 영혼의 상태는 성령 하나님과 교제의 관계로 다시 드러가게 된다. 즉 하나님의 힘을 공급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항상 하나님과의 교제 관계를 (성령님과의 교통하심) 유지 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이제 동사 Saved에 대해 알아보자. 이 단어는 Present Passive Indicative 형태를 취하는 동사이다. 그릭어로 표기한 이 단어는 -σῴζω (sōzō)- 영어로 구원으로 번역되지만 이 문맥에서는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거룩함- Sanctification- 에는 3 단계로 이루어진다:교파에 따라 다소 다른 견해가 있지만 이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에 차용하여 사용하였다

그 첫째가 바로 1절에 언급된 Stand에 나타나 있듯이 구원은 우리의 행함에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위치적 성화 - Positional Sanctification – 가 이미 이루어 졌기 때문에 구원은 영원한 보장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의 성화의 단계는 바로 체험적 성화 –Experiential Sanctification- 인데 신자가 된 이후 그리스도의 영광을 이 세상에 반영하며 살아감으로써 기독교인의로서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주님의 인품의 향기를 내품으며 사는 삶을 말한다. 이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배운 말씀을 우리 삶 가운데 실천하고자 피 흘리기까지 노력함으로 이룰 수 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품으며 살지 못하는 신자를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본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교만되이 그들을 정죄하곤 한다. 내 눈의 대들보는 못보고 그들의 가시만을 보고서….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순종하지 못한 기독교인의 삶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흔들리는 믿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내 삶을 통하여 증명하려는 즉 행함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하나님 앞에 불경죄를 범하는 꼴이다. 오로지 구원에 있어서 유일한 길인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의 공로를 무효로 만드는 꼴이 된다.

이미 들은 복을 받음으로 (믿음으로) 구원의 반석 위에 서 있음을 올바로 인식하고 2절의 말씀 대로 이 땅에서 나날의 삶 속에서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체험적 성화를 이루어 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이 구절에서 (2절)바울이 강조하고 있다. 그릭어 문법이 그 배경 설명을 충분하게 뒷받침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만일”이라는 조건절이 참이고 귀결절도 참이다 라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다”라는 동사가 취한 형태는 Present Passive Indicative 이다.

Present(현재) 는 구원의 끊임없는 행위 즉 한번 받은 구원은 계속 구원 받은 상태에 있다는 뜻이며, Passive (수동)는 내가 그 구원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내게 주어졌으며 계속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Indicative (직설법)는 구원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1절에서 이미 복음을 받음으로 구원 받았음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바울이 2절, IF you hold fast 라는 구절에서 구원 받은 신자가 영적 성장을 향하여 꾸준히 애쓰며 나아가야 하는 선택이 있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구원을 유지시키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영적 성장을 위한 선택의 길을 택하여 주님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는 말이다. 즉 2번째 단계의 성화를 이루어 가라는 뜻이다.

더 이상 구원의 상실에 대해 염려하지 말고 마틴 루터 처럼 언제나 당당하게 복음 위에 굳게 서서 영적 성장을 이루어 나가는 믿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연약하다. 왜냐면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우리는 죄의 본성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17,24절 말씀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가 입었던 육신을 벗어 버릴 때 비로소 궁극적인 성화 (Ultimate Sanctification) 를 이룰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세번째 성화의 단계이다.

구원 = 성화라는 등식을 새워 놓고 구원의 확신없이 (영원한 구원의 보장) 불안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을 자신의 행함으로 그 구원을 유지하려고 증명하려는 헛된 노력만을 하도록 하게 한다.

아니다 우리는 이미 1절 말씀처럼 구원을 받았고 굳건한 반석 되시는 주님의 복음 위에 그 뿌리를 당당하게 내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2절 말씀 처럼 영적 성장을 위하여 그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 (체험적 성화) 을 향하여 꾸준히 노력해 나아가는 이 땅에서의 영적인 삶이 되기를 소원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58 (시90:10,11) 벌써 열흘이 지났습니다. [4] 운영자 2011-01-10 797
757 (롬3:23,24) 하나님 할아버지인가? 하나님 아버지인가? [4] 운영자 2011-01-06 902
756 (고전6:19,20) 기적의 삶을 살라. [3] 운영자 2011-01-03 689
755 (잠16:9) 새해 계획을 어떻게 짤 것인가? [2] 운영자 2011-01-03 710
754 (눅8:19-21) 성모 마리아가 되어 있는가? [2] 운영자 2010-12-28 692
753 (출4:1,2)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가라. [3] 운영자 2010-12-07 753
752 (마6:19,20) 어디에 보물을 쌓고 있는가? [3] 운영자 2010-12-06 626
751 (엡2:8,9) 믿음도 과연 선물인가? [1] 운영자 2010-12-05 718
750 (엡2:8,9) 선물을 자랑하는 바보 [2] 운영자 2010-12-02 686
749 (행7:55-57) 신앙의 최종 목표 [6] 운영자 2010-11-29 889
748 (왕하19:14,15) 신자의 ALAP와 하나님의 ASAP [2] 운영자 2010-11-21 725
» (눅7:28) 왜 우리가 세례 요한보다 더 큰가? [7] 운영자 2010-11-05 16468
746 (눅7:28) 세례 요한이 왜 가장 큰가? [5] 운영자 2010-11-04 723
745 (눅7:23) 교회 안에 만연한 실족한 자 [2] 운영자 2010-11-03 798
744 (눅7:13-15) 성경을 읽는 즐거움 [2] 운영자 2010-11-01 801
743 (눅7:9,10) 최고로 빨리 응답된 기도 [4] 운영자 2010-10-17 812
742 (눅6:47-49) 믿음의 반석이란? [6] 운영자 2010-10-14 944
741 (눅6:39-41) 신자 된 최고 큰 축복 [4] 운영자 2010-10-11 691
740 (신31:8) 단 두 가지 일도 못하는 신자 [4] 운영자 2010-10-09 872
739 (눅6:37,38) 후히 주어야 할 이유 [3] 운영자 2010-10-06 2495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