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러므로 주는 광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이니이다.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을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저희를 위하여 큰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열국과 그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삼하7:22-24)

 

 

다윗은 사방 대적을 다 파하고 이스라엘에 평화를 확보하자 곧바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모실 성전을 지으려 시도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 계획을 보류하라고 명했다. 대신에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6)는 약속을 주셨다.

 

본문은 그 언약에 대해 다윗이 하나님을 감사 찬양한 내용 중의 일부인데 믿음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간단히 줄이면 본문 말미에서 다윗이 고백한 대로다. “이스라엘을 주의 백성을 삼았고 여호와는 저희 하나님이 되셨다.” 하나님이라는 왕(주권자)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된 것이 신자다. 우리 모두 익히 잘 알고 있고 실제로 믿는바 그대로다. 그런데 과연 그 의미를 제대로 자신의 인생에 반영하며 살고 있을까? 아니 정확히 알고나 있을까?

 

먼저 “하나님은 광대하다”고 한다. 세상 어느 것으로도 수용할 수 없는 분이다. 세상을 다 포용하고도 남는 분이다. 그분은 세상을 초월하여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만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분 뜻이 반영 작동되지 않고 있는 것은 우주 전체에 단 하나도 없다. ‘광대하다는’ 말도 인간 이성의 한계 안에 갇힌 사실은 부족한 묘사다. 인간이 측정, 계산, 추산, 심지어 상상하는 모든 광대함을 다 합쳐도 그분의 광대함에 비하면 해변의 모래알에 불과하다. 믿음의 여정이란 그래서 그분의 광대함을 가능한 많이, 아니 단 하나라도 더 알아나가는 싸움일 뿐이다.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 참 신이 없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그분의 역사가 크고 전지전능하다는 뜻으로 단순히 이해하면 너무 부족하다. 세상의 어떤 위대한 인물, 세력, 나라, 기술, 물질, 심지어 인간들이 고안한 사상 철학 윤리 도덕 종교도 인간의 삶을 실제로 전혀 주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겉으로 그렇게 보일지라도 그분의 뜻에 맞았기에 그분이 허락해주신 것뿐이다. 그것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거의 모든 인간사에 나중에는 반드시 그분만의 기막힌 반전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분의 일정과 방식과 뜻대로만 세상사는 기어이 흘러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그 다음이다.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다른 나라는 전혀 맺지도 못했고 아예 알지도 못한다는 고백이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보다 하나님의 특별히 더 풍성한 은혜와 권능을 입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분만의 유일하고 고유한 개별적인 사랑을 누린 유일한 민족이라는 뜻이다.

 

지금 그 고백에서 이스라엘 대신에 신자 개인의 이름을 자신 있게 넣을 수 있어야만 참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신자는 하나님과 아무런 개인적 관계가 없으니 아예 이런 고백은 꿈도 꾸지 못한다. 아니 할 의사도 전혀 없고 구태여 하나님을 알아보거나 찾거나 심지어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소개하고 믿으라고 하면 도리어 역정을 내는데 어떻게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이 땅이 전부라고 믿기에 이 땅에서 그냥 짐승처럼 먹고 사는 기본적 여건만 그분에게서 보장받을 뿐이다.

 

이 고백이 다른 신자들이 하나님에게 전혀 은혜를 못 받았다는 무시가 되거나, 내가 믿음이 더 좋아서 양질의 사랑을 더 풍성하게 받았다는 자랑이 되어선 결코 안 된다. 다른 신자들이 알 수 없는 그분과 나만의 고유한 일대일의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어 그 바탕에서 주님의 세밀하며 완전하고 풍성한 은혜 가운데 힘을 얻어 기동하며 매일 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그런 맥락에서 다른 신자들도, 온전한 믿음 안에 있다면 구체적인 측면에서만 다를 뿐 광대하신 하나님 안에서 동일한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다윗의 이 고백은 모든 신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모든 신자가 각자만의 풍성한 은혜를 받고 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하나님과 나만이 공유할 수 있는 믿음의 여정을 지금껏 쌓아왔고 또 그 바탕에서 앞으로의 인생도 완전히 기꺼이 그분께 맡길 수 있다고 기꺼이 고백하고 실천하고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그분께 불려나오는 나만의 출애굽의 역사가, 현실에서 골리앗과 싸움에서의 그분이 주시는 나만의 승리가, 그분에게서 시내 산의 율법으로 내가 직접 받는 일이, 사무엘 같은 그분의 부르심에 대한 나만의 순종이, 모세 같은 그분과 대면해서 행하는 나만의 대화들이 있어야 한다.

 

다윗은 또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을 삼아”라고 고백한다. 각 신자마다 고유한 모든 개인적 여정들이 내 쪽에서의 능력 신분 자격은 물론 소망과 열정과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적으로 그분의 선도적 소망과 주도적 간섭으로 시작되어 지금껏 열매 맺어졌다는 확신과 그에 따른 당연한 순복이 이어져야 한다. 지금껏 풍성하고도 완벽한 보호와 인도가 있었다는 확신이 있다면 마땅히 장래의 모든 일도 그분의 주권과 섭리에 완전히 내어맡길 수 있어야 한다.

 

다윗이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라고 하지 않는가? 영원하신 하나님이 영원한 백성으로 삼으셨다면 그분의 당신 백성을 향한 사랑에 영원토록 단 한 치의 변개 수정 취소 포기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그분의 백성 되는 우리다. 정말로 그분이 영원한 하나님, 특별히 그리고 반드시 나 개인의 영원한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상투적 표현이지만 힘들 때나 편안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분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나의 하나님이다.

 

간략하게 다윗의 고백을 풀어봤지만 이 설명도 부족할 정도로 하나님과 함께 더 풍성하고 오묘하고도 친밀하게 쌓아나가는 믿음의 승리를 신자 각자가 지녀야 한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분은 나의 아버지이고 나는 그분의 자녀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다. 자식만 부모를 오해하고 불순종하고 싫어할 뿐이다. 그러다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본인도 부모가 되고난 이후로는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무조건적이며 헌신적이었는지 깨닫고 새삼, 사실은 생전 처음으로 부모를 순전히 사랑하며 기꺼운 순종을 하게 된다.

 

바꿔 말해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육신의 부모만큼이라도 사랑하고 순종한다면 그 믿음은 아주 성숙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식이 부모가 되어서 부모 심정을 이해하니까 참 사랑으로 바뀌었지 않는가?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최소한 부모님의 심정에 하나님을 대입시켜서 그분을 제대로 헤아린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믿음이 자라고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이라도 하고 있어야 참 믿음이라 말할 수 있다.

 

사실은 이것도 신자가 하나님께 보일 사랑으로는 정말로 너무나 부족하다. 자기 자식을 사랑하듯이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솔직히 부모보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지 않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전혀 주저하지 않고 즉각 기꺼이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면 실은 그분을 사랑한다고 감히 말할 자격이 없지 않는가 말이다.

 

7/27/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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