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시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욘3:3-5)
요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독이 극심했던 니느웨에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소명을 받고도 거절했습니다. 당시로선 땅 끝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치려 했으나 큰 풍랑을 만나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수 없다고 여기고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이 앞으로 40일 후에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신기하게도 그렇게 사악했던 도시가 단 하루 만에 하나님께로 돌아섭니다. 통회의 표시로 굵은 베를 입고 금식을 시작했습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성중의 모든 백성에게 참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요나가 삼일 길인 큰 성읍의 겨우 1/3만 돌아다녔는데도 말입니다. 그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이 가족 인척 친지들에게 전했고 간접으로 전해들은 자들도 회개에 동참했다는 뜻입니다.
죄악의 소굴로 하나님의 심판을 코앞에 두었는데 어떻게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까? 거기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요소가 하나 더 남았습니다. 요나는 지금 자발적으로 기꺼이 행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코가 꿴 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 억지로라도 기뻐하고 감사해야지 마음먹은 것도 아닙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본 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4:1-3)
저 악독한 백성들조차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차라리 자기가 죽겠다고 하나님께 덤비는 자가 기꺼운 마음으로 그 메시지를 선포했을 리는 만무합니다. 또 그래서 그는 성 동편에 초막을 짓고 성읍이 어떻게 되는지 즉, 자기 생각과 기대와 달리 하나님이 정말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는지 지켜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근 틀림없이 온갖 우거지상을 하고 짜증을 잔뜩 내면서 회개하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단 하루 만에 어찌 이런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까? 또 신자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고 자기 생각과 정반대일지라도 무조건 순종을 하면 그분의 권능은 크게 드러나는 것입니까?
물론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니느웨 같은 성읍이 하루아침에 회개하는 역사는 어떤 위대한 군왕, 선각자, 종교 세력도 결코 일으킬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한분이 하신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야 할 사항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싫어해서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거역 항거한 자를 통해서도 과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 그래서 교회 일에 무조건 충성하면 복을 받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요나를 들어 쓰신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바로 그대로입니다. 그가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꼴통보수 차별주의자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니느웨의 구원을 싫어해다는 것은 죄악에 대해선 극도로 혐오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저런 사악한 죄를 짓다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고 하루 속히 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런 심판이 하루속히 내리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역으로 말하면 그로선 하나님의 공의가 지금 굽고 있다고 즉, 하나님이 직무태만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어따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감히 하나님에게서 도망가고 또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하나님께 대들며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니느웨의 악독에 대한 증오가 극심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에게 대든다는 것은 그분의 심판이 두려워서라도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 않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고 그냥 두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구원해 준다니까 진짜로 싫어서 따지며 대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놀라운 역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의 니느웨에 대한 미운 심정이 극도에 달했으니까 비록 억지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겠지만 틀림없이 40일 후에 심판이 내린다는 부분에선 진심을 담아서 아주 강조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전해도 회개도 않겠지만 제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길 바라고 또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믿거나 소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요나는 심판을 외치고 또 외쳤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바랐던 바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회개하라는 말을 요나가 전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또 하나님이 그더러 전하라고 명한 메시지에도 니느웨에 대한 구원의 약속은 없고 오직 심판뿐이었습니다.
“너는 일어나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쳐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1:2)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3:1,2) 그래서 요나가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고 한 것뿐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요나의 외침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정성과 열정을 온전히 실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도 당연히 임하였겠지만, 그가 심판을 선포하면서 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그들의 심장은 쿵하고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메시지가 그대로 실현될 것이라는데 이상하게도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 모든 이에게 생겼을 것입니다. 요나가 장난삼아 겁주는 것도, 실성한 자의 기행도 아니며, 순전히 자기 사상과 철학을 전하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외침을 정말로 신의 소리로 그들 모두에게 들렸던 것입니다.
나아가 아마도 그들로선 생전 처음 듣는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자기들 성읍 안에도 신탁하는 선견자, 제사장, 주술사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여태껏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에 오직 안일과 형통과 번영만 약속하고 니느웨가 어떤 일을 해도 신의 심판은 없었을 것이라고 속였을 것입니다. 아니 그들부터 사탄에게 그렇게 속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형상을 닮은 흔적이 그 백성들 속에 양심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기에 자기들의 타락상이 과연 언제까지 신의 진노를 사지 않고 이어갈 수 있을지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는지 모릅니다. 분명하게 인식하지는 못했어도 폭풍전야의 두려움 같은 영적 눌림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원칙은 악인으로 그 상실한 마음에 그대로 버려두는 것입니다. 죄를 계속 탐닉하게 하든지, 양심에 가책이라도 받는 둘 중 하나의 결과로 이끄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은 그런 자들에게 당신의 선지자 한 명이라도 보내어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선포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메시지를 듣고 돌이키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구원이 오직 성령의 중생하는 은혜로만 그것도 택한 자에게만 일어나지만 반드시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만 역사합니다.
지금의 불신 세상은 니느웨와 거의 흡사해 갑니다. 신자는 물론 불신자들마저 이러다 혹시 신의 벌을 받지나 않을지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실한 마음에 그냥 두고 계십니다. 그러나 완전히 손을 놓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구원이 아니라 심판의 메시지라도 전할 자를 찾고 계십니다. 요나처럼 세상 죄악에 대해서 크게 분노 저주하는 자를 말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에게 당신의 공의가 지금 굽고 있는데 뭐하고 있느냐고 대들 수 있는 사람을 말입니다. 만약에 요나 같은 자라도 없으면 이 세상은 그냥 멸망과 심판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신자는 요나 같은 소명을 이미 다 받았습니다. 날로 악해져 가는 이 세상에다 대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다들 땅 끝까지 가서 목숨 바쳐 선교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요나처럼 최소한 죄악에 대한 분노와 저주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신자의 성결한 삶을 통해서 영적인 찔림이라도 있게 해야 합니다. 신자가 가만히 있으면 세상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작금의 기독교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교회와 목사가 행하는 일은 다 하나님의 일이니까 마음에 안 들더라도 무조건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와 교회를 다루는 원리에 그런 것은 아무리 눈을 닦고 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외적 번영을 주려는 뜻은 없습니다. 오직 당신의 택한 백성들로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하길 원하십니다. 세상 역사를 다스리는 방향과 방법은 오직 그 목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과 사람들로 죄에서 건져 거룩하게 바꾸고 성장시키는 일에만 그분은 관심을 가집니다. 그런데도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그분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믿었으니 자신과 자기 주변에 넘치도록 현실적 복만 달라고 떼를 씁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이 그래서 성전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아무리 성대하고 열심과 진정으로 종교적 행사를 해도 성전 마당만 밟고 갈뿐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 추종자들에게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이스라엘과 오늘날의 일부 교회들이 니느웨로 변한 것입니다. 이젠 자신이 요나 같은 소명을 받았다고 확신 헌신하는 신자라면 멀리 세상의 니느웨로 찾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교회에서부터 “사십 일이 지나면 이 교회가 무너지리라”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6/26/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