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신자에게 정말로 바라는 것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야고보서가 말하는 믿음의 시험에는 우리말로 치면 세 가지 뜻이 있다. 마침 영어로도 셋 다 T자로 시작하기에 흔히 3-T라고 말한다. 먼저 믿음이 일정 수준에 다다랐는지 여부를 점검해보는 말 그대로 시험(試驗,Test)이다. 여호와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노년에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했는데 정말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삼고 있는지 확인해보려는 뜻이었다. 이는 이겨내기보다는 통과하는 시험이다. 단지 묵묵히 순종 실행하면 된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지 않았거나 계속 망설였으면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것이다.
둘째는 온갖 시련과 고난을 거치게 하여 그 성품과 믿음을 성숙시키려는 시험(Trial)이다. 욥이 이유 없는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은 그 믿음이 정금 같이 변화된 경우다. 우리말로는 연단(煉鍛)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신자가 이를 이기는 가장 유력한 수단은 믿음과 소망을 붙들고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고난의 구체적 양상을 기도와 말씀으로 추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더 깊고도 오묘하며 풍성한 사랑과 권능을 깨달아서 자신의 신앙과 삶에 적용하면 자신도 몰라보게 자라게 된다.
셋째는 세상의 재물과 명예는 물론 쾌락과 죄악이 신자를 유혹하여 넘어뜨리려는 시험(Temptation)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당한 것이 대표적 예다. 이는 주로 자신의 죄나 욕심, 세상 사람들의 부추김, 사탄의 직접적 공격에 기인한다. 이런 유혹을 이기려면 하나님의 진리 위에 온전히 서야 한다. 또 도덕적 종교적 의지력만으로 이기기에는 한계가 있다. 성령의 보호와 인도를 구하면서 참 진리만을 붙들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시험은 상기 셋 중에 어디에 해당되는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했다. 우리말로 연단, 영어로 Trial에 해당된다. 첫 번째 테스트는 순종 내지 시행하면 된다. 믿음의 자람 여부를 보는 것이니까 순종치 못하면 아직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깨닫고 다시 믿음의 정진과 헌신을 하면 된다. 끝까지 인내할 성격이 아니다. 본문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다. 신자가 쾌락과 죄로 넘어질 수 있는 시험을 기뻐할 수는 없다. 성품과 믿음이 자라는 연단은 비록 지금 당장은 불편하고 힘들어도 잘 이겨내면 분명히 본인에게 유익이니까 기뻐하라는 것이다.
특별히 야고보 사도의 강조점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데” 있다. 단순히 고난이 끝나는 시점이 아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자신의 성품이 거룩하게 바뀌고 믿음도 견고해지며 하나님께 더욱 충성 순종케 되는 자리에까지 가야한다. 인내하다 중간에 그만 두면 어떤 변화와 자람의 열매를 맺지 못할 뿐 아니라 자칫 하나님에 대한 의심 불만 불신만 늘어날 수 있다. 또 앞으로 다른 연단이 닥치면 지레 겁을 먹고 믿음의 인내를 시도하지 않을 수 있다. 끝까지 견뎌야 한다. 마라톤 선수가 중도에 그만두면 기권 실격패다. 그런 일이 겹치면 다음 대회 참가자격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인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끝까지 완전하게 결말을 볼 때까지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사도는 분명히 시험을 만나면 “기쁘게 여기라”고 했다. 그것도 “온전히 기쁘게” 말이다. 처음 한두 번 연단을 믿음으로 이겨내도 또 새로운 연단을 만나면 힘이 빠지고 짜증나고 하나님에게 원망까지 생기게 마련이다. 하나님 전번에도 연단을 주시더니 또 비슷한 아니 더 큰 연단을 주시면 어떡합니까? 몇 번이나 이겨낸 과거 실적을 봐서라도 이젠 기쁜 일만 생기게, 아니면 기쁜 일이 더 많이 생기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고난만은 더 이상 안 생기게 해주어야 합당한 이치 아니냐고 따질 것이다.
성경은 지금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한다. 오직 기쁨만 있는 상태다. 조금이라도 불만, 원망, 의심, 심지어 주저함 나태함이 들어 있으면 온전한 기쁨이 아니다. 너무 심한 요구인가? 아니다. 우선 신자도 연약한 체질인지라 이 땅에서 성화의 완성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안의 욕심과 교만과 죄성은 물론 세상의 흑암의 세력이 끈질기고도 교묘하게 성장을 훼방한다는 것이다. 신자의 평생은 연단을 온전히 인내해나가는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왕에 인생이 연단의 연속이라면 차라리 긍정적 능동적으로 생각을 바꾸어 기쁘게 대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신자가 자라가길 바라는 수준과 내용이 그만큼 커다는 것이다. 나아가 당신의 사랑과 권능을 당신께서 더 깊이 많이 보여주길 원하신다는 것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큰 영광으로 인도하시겠다는 뜻이다. 이 땅에서 천국영광을 신자가 인내를 이루는 만큼 맛보게 하고 또 그만큼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겠다는 뜻이다. 그럼 신자가 연단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그리스도와 더 닮아가게 되고 하나님 은혜를 더 풍성히 받아 누리며 천국영광을 보고 체험하게 되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신자 인생의 목표는 풍성하고 화려한 안락뿐이다. 남보다 자기를 더 치장 자랑하는 것이다. 무사무탈 함이 최소한의 목표다. 그들에게 고난은 첫 번째로 시급하게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적일 뿐이다. 아무리 미숙한 초보 신자라면 고난을 믿음으로 인내하고 기도하여 한두 번은 이겨낸다. 그로 그치지 않고 고난 가운데 믿음이 자라고 성품이 변하며 하나님의 뜻까지 깨달으면 성숙한 신자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 그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인내를 요구하고 있다. 어떤 연단도 온전히 기뻐하는 단계에 이르라고 한다. 그러면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스런 비밀까지도 엿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엄청나고 거룩한 일을 이루시겠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자기보다 더 소중한 인생말년의 외동아들을 기꺼이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께 바칠 수 있어서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 의롭게 여김을 받는 최초의 열매가 되었다. 우리도 그처럼 오직 그분이 나의 정말로 최고 귀한 자리에 모셔야 한다. 그럼 그분도 우리를 자신의 정말로 최고 귀한 자리에 올려주신다.
7/2/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