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1-3)
신자의 기도가 응답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본문 말씀대로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또에 당첨되게 해달라거나 탈세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식의 기도를 하는 신자는 없습니다. 명확하게 잘못인줄 아는 일에 대해선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소원과 정욕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거나, 아니면 정욕이면서도 사실은 교묘하게 자기의 필요나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일인 것처럼 위장하여 하나님 앞에서 마저 속이려 드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때로는 스스로 인식도 못한 채 정욕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도 단지 기도했다는 이유로만 아주 신령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이처럼 원죄로 타락된 인간의 실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지 모릅니다. 신자가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실체를 십자가에 비추어 철저하게 깨닫고 주님의 보혈로 씻어내야만 합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본문에서 정욕으로 하는 기도를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의미와, 정확하게는 적용되어지는 상황을, 조금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1절에 흥미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교인들 중의 싸움과 다툼의 원인을 “싸우는 정욕” 때문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싸우려는 욕심인 것 같습니다. 누가 싸움을 좋아해서 일부러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격투기 선수도 싫어할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그 정욕을 풀어서 설명합니다. 욕심을 내고 시기와 살인을 해도 얻지도 못하는데 자꾸 싸운다는 것입니다. 모든 방법, 심지어 살인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동원해도 얻을 수 없는데도 자꾸 얻으려고 하니까 싸움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선 서로 자기가 차지하려는 경쟁으로 자연히 분쟁이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런 분쟁의 해결책으로 무엇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서로 사랑하고, 양보하고, 싸우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용서하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기도입니다. 그렇다고 서로 싸웠으니 이제 화해하고 싸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세상의 방법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데도 자꾸 그렇게만 얻으려 해 싸움이 나니까, 이제 그런 방법으로는 얻으려 들지 말고 다른 방법 즉 기도하여 얻으면 싸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참 성경이 논리 정연하며 오묘하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은 단순하게 세상 일에 절대 욕심을 내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적 도덕주의가 신앙의 전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구하고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것이 분쟁을 없애는 수단이 된다고 합니다. 세상에선 서로 구하려 하다가 분쟁이 생기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구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분쟁을 막아라고 합니다. 단순하게 용서하고 사랑하도록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뜻입니까? 분쟁의 원인이 서로 얻고 취하려는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얻는 방법의 차이, 더 정확하게는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인 취득 방법인가를 모르는 생각의 차이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세상 사람은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으로만 취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자기나름대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결국 다툼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가 그 모든 일을 기도로 구한다면, 즉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요 선물인 줄 안다면 부정한 방법은커녕 인간적인 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많이 차지하려는 다툼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자도 얻고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나 남이 구하는 것들 모두가 오직 하나님만이 공급하시며 또 공급한 것들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확고하게 있어야 합니다. 자기나 남에게 생기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해 주신 것이고 그것도 기도하여 얻은 것이라고 다들 인정한다면 분쟁이 생길 리 없지 않겠습니까? 요컨대 분쟁을 막는 방법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며 기도는 그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 기도가 정욕으로 구하면 응답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의 뜻이 분명해졌습니다. 1절 표현대로 “싸우는 정욕”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계속 싸우자고 기도한다는 뜻이 아니라, 기도를 하면서도 얻고 취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임을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소원하는 것의 질적, 양적 크기가 과다한 것이 정욕이 아니라 애초부터 응답이 안 되는, 즉 얻어지지 않는 방식으로 기도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얻으려 들었고, 그래서 오히려 분쟁이 생기게 되는 방식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분쟁은 하나님 만이 해결하실 수 있지만 기도했다고 분쟁이 뚝딱하고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기도라는 통로를 거쳐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각자에게 맞추어 나눠 준 것이므로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신함으로써만 분쟁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는 구하는 모든 것을 오직 그분의 뜻에만 맡겨서 분쟁이 생길 소지 자체를 아예 없애야겠다는 뜻이 앞서지 않는 기도입니다. 서로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겠다고 덤비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기도라는 방식을 거쳤지만 여전히 인간이 해결하겠다고 덤빈 것입니다. 서로 자기 방식으로 싸우겠다는 정욕을 조금도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나 성도 간의 분쟁을 보면 얼마나 뜨겁게 기도를 많이 합니까? 그것도 서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입니다. 나중에는 세상 법정까지 가서 하나님도 전혀 모르는 사람 앞에서 어느 쪽이 하나님의 뜻인지 판별해 달라고 합니다. 싸우는 정욕은 단 한치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기도로써 모든 문제, 특별히 분쟁이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선하고 거룩한 일만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는 근본적 생각이 문제입니다. 세상 방법, 인간적 노력이 어떤 일을 이루는 궁극적 수단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만이 범사의 배후에 거룩한 뜻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겸비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 방법과 인간적 노력마저 하지 말고 두 손 두 발 다 놓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드러나는 통로일 뿐이지 어떤 일을 이루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싸우는 정욕, 즉 세상에서 내가 얻고 취할 것이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그것 외에 기도가 응답이 되는, 그리고 이웃과 교회 안의 분쟁이 해결되는 길은 결코 없습니다.
1/5/2006
감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