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누릴 수 있는 최고 특권은?
“아론이 모세의 명을 좇아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민16:47,48)
아론은 시내 산 금송아지 배역 사건을 주도한 자였습니다. 말하자면 우상 숭배 제사장 역할을 기꺼이 자임했던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를 대제사장의 시조로 세운 이유가 무조건 독단적으로, 혹은 그를 편애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싫어하고 미울, 아니 당장 죽여도 될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세웠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종으로 세움 받은 자들은 한 결 같이 결점이 많았을 뿐 아니라 큰 죄를 범한 자들이었습니다. 당장 모세만 해도 살인자였지 않습니까? 다윗이나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야곱과 베드로는 치사한 자의 대표였습니다. 일부러 악한 자를 고쳐서 쓰신다는 뜻보다는 모든 인간이 사실상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 사함이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 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을 때에 주님은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으니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고 했습니다. 역으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도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죄에서 멀어지는 법이지 죄에 머문다고 은혜가 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죄가 많았던 자를 사해주는 큰 사랑을 부어주어서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그 큰 사랑을 나눠주라는 것이 당신의 종을 세우는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부를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우상숭배 제사장 아론을 오히려 당신의 대제사장으로 삼는 너무나 큰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말하자면 대제사장 가문이 되었다고 해서 자기들 잘난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 비해 더 큰 죄 사함을 받았음을 되새기며 항상 겸비해야 합니다. 반대로 그런 가문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에 비해 못난 것도 단 하나 없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가 적었던 것도 당연히 아닙니다. 제사장 가문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에는 하나님께 따로 세움을 받아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불림 받았다고 주의 종들이 고귀한 신분이 된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 회막에 나아가 여호와께 분향해도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도 기실 특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일을 수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또 그 일을 담당하는 와중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내해야 합니다. 심지어 생명까지도 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 죽으라면 죽을 수 있는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부르신다는 뜻입니다.
아론 또한 그랬습니다. 이제는 시내 산에서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고라당의 반역에 진노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염병의 벌을 내렸습니다. 모세는 그더러 단의 불을 향로에 담아 회중에게 급히 가 그들을 위해 속죄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명을 받자마자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습니다. 단순히 종교적 수사가 아니라 아주 대단한 일입니다. 시체들 바로 앞에까지 갔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율법은 제사장이 시체를 만지거나 가까이 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또 염병으로 죽은 시체 곁에 갔다는 것은 언제든 그도 전염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남은 자들을 대속시켜 더 이상 희생이 없게 하려고 병균이 들끓는 최전방에 나선 것입니다. 당시는 소독위생 절차나 도구가 불비(不備)했을 것임에도 말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백성들은 그의 뒤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명실 공히 백성들의 생명을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서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모세의 명을 좇은 것이긴 해도 그로선 놀라운 변신입니다. 틀림없이 모세가 시내 산 금송아지 배역 사건 때에 자기를 지옥에 보내더라도 백성들을 사해달라고 자기 목숨을 걸고 기도한 것을(출32:32) 들었거나 알았을 것입니다. 또 그전에 모세가 오직 여호와께 순종함으로써 애굽에서 이적을 행했으며 광야에서도 정말 혼신을 다해 동족을 인도하는 모습을 보고 올바른 지도자 상에 대해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스승이나 선각자의 교육만으로 자기를 따르는 백성을 위해 생명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는 지도자가 배출되기 힘듭니다. 생명의 근원이자 인생의 살고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 변화시켜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두 아들이 즉사하는 벌을 받았을 때에 그분의 엄위한 권능 앞에 이미 전심으로 항복했다 해도 그분이 변화시킨 것입니다.
오늘날 모세 같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아론처럼 실행해야 할 교회 지도자는 담임 목사입니다. 구체적인 의미에서 구약의 선지자나 제사장의 역할과는 다르긴 해도 광의의 뜻으로 따지면 그러합니다. 그런 목사가 누리는 특권이 무엇입니까? 대내외적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고 무엇이든 독단적으로 교회를 치리하며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본문의 아론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따로 부름 받아 그분의 일을 맡은 것 자체가 특권입니다. 평생토록 그분의 일만 전적으로 할 수 있고 또 성도들의 자발적 드림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특권입니다. 그분의 일을 하는 것 외의 특권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의 일이 특권이라면 그 일에 충성 매진하는 것은 더 큰 특권이 됩니다. 또 그 일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면, 나아가 지금처럼 자기 목숨을 거는 일에 쓰임 받는다면 목사로서 최고의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의 기도가 바로 그러했지 않습니까?
목사는 정말 아론처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서야 합니다. 오직 죽어가는 자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무조건 순교를 권면, 장려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평생을 두고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름 하는 일만 담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라는 것입니까? 성경에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5-17)
하나님 말씀을 혼잡케 하지 않고 순전하게만 전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생명 아니면 죽음 둘 중 하나의 냄새를 맡게 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산 자와 죽은 자들 사이에 서있게 됩니다. 목사가 담당하는 설교 교육 상담 기도 등 모든 사역의 초점을 오직 십자가 생명력이 더 확장되어지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비방과 핍박을 무릅쓰며 목숨 걸고 천국 복음만 전하는 것이 바로 목사로 부름 받은 뜻이자 가장 큰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그랬지 않습니까?
그럼 예수님이 누린 특권 이상의 특권이 또 있을 리 만무할 텐데도 목사들이 거의 누리지 않고 있다는 느낌은 어떤 연유인지요? 죄 사함의 사랑을 제대로 혹은 많이 받지 못했기에 그 사랑을 나눠줄 줄 모르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혹시 다른 개인적 욕심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요?
2/4/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