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전파해야 할 두 가지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쓴 두 번째 편지에서 사역자가 교인들에게 반드시 전파해야 하는 두 가지 내용을 밝히고 있습니다. 전파란 물론 믿지 않는 자에게 복음으로 전도하고, 이미 믿은 자에게는 복음의 내용을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선 누구에게나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분을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죄책을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사함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또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기에 구원 얻은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습니다.
이 첫 번째 전파는 오늘날도 그런대로 잘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전파할 내용은 과연 어떨까요? 바울은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도 전파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말로만 아무리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가르쳐도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먼저 전파 받는 자의 종이 되라고 합니다.
사역자는 교인들을 항상 겸손하게 대해야 한다는 일반적 원리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가 겸손해야 할 것은 너무나 기본적 자격 요건입니다. 교만한 자가 전파하는 것은 종교적 지식은 될 수 있을지언정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지도자는 마땅히 겸손하되 반드시 전파한 내용을 자기 몸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산소 원자 하나와 수소 원자 둘에다 촉매를 함께 섞으면 물이 생성된다고 가르쳤다 칩시다. 아무리 말로 설명해봐야 학생들은 그저 그런가보다 할 뿐입니다. 그러나 눈앞에서 직접 그대로 실험해서 진짜 물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여주면, 나아가 학생들도 실험에 참여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배움 받은 내용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일 것 아닙니까?
기독교 사역자가 우선적으로 전파해야할 핵심은 당연히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본체시나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모든 멸시와 핍박을 받다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어 죄인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꺼이 수난 받는 종이 되어 당신이 전파하신 천국복음을 실현해보였듯이, 동일한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전파한 내용이 온전한 진리임이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본문에 이어서 설명한 내용을 보십시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0-12)
사역자는 궁극적으로 순교를 소망 내지 지향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의 죽인 것과 그 생명이 “우리 몸”에 짊어지고 나타난다고 합니다. 사역자의 삶 자체가 복음의 실습 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 복음이 전파 되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하여 - 죽음에 넘기운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 생명까지 걸며 전해야 할 복음이기에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자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 궁극적으로 전파하는 목적은 가르침 받는 자들이 복음 안에서 살아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컨대 둘째로 전파하는 것은 “사역자가 교인의 종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전파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요인을 본문은 무엇이라고 설명합니까?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요.” 너무나 정확하고도 예리한 지적 아닙니까? 아니 너무나 지당한 논리 아닙니까? 사역자가 자신을 전파하다보면 정작 전해야 할 복음과 특별히 자기의 종 된 것을 전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잘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역자들이 이단 교주가 되려는 계획이 없는 한 사실상 자신을 대놓고 전파하지는 않습니다. 또 복음 대신에 매번 세상 철학과 지식을 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복음의 일군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로 먹고 사는 삯군은 될지언정 말입니다.
복음의 핵심 내용을 잘 풀어서 전하면서도 넌지시 자신의 개인적 자질, 능력, 업적 등을 자랑하는 경우는 물론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역자 또한 연약한 인간인지라 애교로 보고 넘겨줄 소지가 조금은 있습니다. 입을 열기만 하면 자기 자랑에 여념이 없는 경우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그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전파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역으로 그런 경우를 추정할 수 있는데 아주 간단합니다. 자기의 종 된 것을 전파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예수의 죽음과 생명을 함께 짊어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음에 넘기우지 않기에 다른 이도 살아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빙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지만 사역자만 생생하게 살아나니까 결국 자기가 전파 되는 셈이지 않습니까? 또 이미 말한 대로 사역자가 종이 되지 않는 전파는 종교 지식만 전한 것입니다. 어떤 경건한 설교나 심오한 가르침도 안개처럼 공중에 떠돌다가 곧 사라질 뿐입니다. 듣는 자를 변화시킬만한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 그 안에 없습니다.
지금 사역자만 일방적으로 손해보고 희생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꼭 전파해야 할 예수의 주 되신다는 내용 즉, 복음의 특성이 그러하다는 것입디다. 예수님은 구원의 주요, 생명의 주요, 생활의 주요, 인생의 참 주인입니다. 그분만이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일생을 아름답고도 진실하게 보존, 성장, 완성시킬 수 있으며 또 그 일에 필요한 모든 선한 것을 하늘로부터 베풀어주십니다.
따라서 구원 이후의 신자는 오직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가며 그분의 빛을 세상에 비춰내야 합니다. 그분이 이끄신다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라도, 그분이 진정으로 원하신다면 설령 생명이라도 바쳐가며, 순종하며 따라야 합니다.
바꿔 말해 그분의 주 되심을 진정으로 믿고 전파하는 사역자라면 필연적으로 그분을 닮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누구에게나, 특별히 소외되고 어려운 처지의 죄인들과 또 섬기는 교인들에게 기꺼이 자원해서 종이 됩니다. 또 그런 사역자에게서 전파 받은 신자들도 똑 같이 따라 갑니다. 기도해서 어려운 문제를 이겨내는 것도 그분의 주인 되심이 분명하지만 극히 일부입니다. 그것도 성도 스스로 다른 이에게 종 되게 하려는 뜻에서 말입니다.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옛 자아를 죽이고 그리스도에게서 새 생명을 받는 싸움입니다. 또 새 생명을 받은 자는 일생 동안 예수님의 주 되신 것과 자신이 남에게 종 된 것, 둘을 전파하는 소명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자기 자랑할 필요와 이유는 전혀 없게 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정말 전파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연 바울처럼 이 두 가지만 전파하고 있고 또 그 때문에 핍박과 멸시를 기꺼이 감당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세상에서 능욕 받는 것을 감사하며 자랑하고 있습니까?
2/17/2010
그 기가막힌 억측들을 묵묵히 참아내신 목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 거룩한 찔림이 없었던들 어찌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의 참 맛을 알 수가 있었겠는지요. 목사님! 정말 죄송하고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