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너무 매정한 하나님
“곧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일백이십 세라 내가 더는 출입하기 능치 못하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신31:2)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킨 민족의 영웅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습니다. 비록 나이가 들어 명이 다하고 본인 입으로도 능치 출입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했다고 고백했지만 그 땅을 먼발치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를 가나안 입경은 시켜서 여리고성 함락의 첫 승리를 목도케 한 후에 데리고 가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모세는 온전한 평온과 큰 기쁨 가운데 눈을 감았을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도 더더욱 빛이 났을 것 아닙니까? 차라리 광야에서 일찍 죽게 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매정한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직접적 이유는 그가 가데스에서 반석을 쳐서 물을 내는 바람에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목전에 그분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민20:12) 그럼에도 충성스런 종의 한 번의 실수마저 용납하지 않으신다면 좀 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모세가 요단을 건너가 그 아름다운 땅을 직접 보고싶다고 간구까지 했지(신3:25) 않습니까? 역으로 따지면 하나님의 더 깊은 이유가 행간(行間)에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선 모세의 소명은 거기까지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미디안 광야에서 그를 처음 불러낼 때에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고 임무의 한계를 분명하게 말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아도 씨를 심고, 거름을 주고, 물을 뿌리며, 잡초를 제거하는 등 각기 맡는 역할이 다릅니다. 어느 누구도 혼자서 다 감당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슈퍼맨은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세상만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적 주권으로 통치하십니다.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이 도맡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당신 혼자여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질투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처럼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힌 시기는 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질투는 당신 백성이 혹시 사단에 속아 우상을 섬기게 될까 염려하는 열성과 안타까움이 내포된 사랑입니다.
신앙 영웅이 없는 까닭은 또 인간끼리 서로 협력하며 섬기라는 뜻입니다. 각기 직분과 역할만 다를 뿐 모두 머리 되신 하나님에 붙은 지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백성들끼린 상명하달(上命下達) 식의 능률 공동체를 이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한 성령 안에서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서로 마음을 합해 연합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영적 리더는 반드시 각기 필요한 지체들을 자발적으로 세워 훈련시켜야 하며 무엇보다 때가 되면 후계자를 양성해 과감하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천부장 백부장 제도를 만들었고, 아론과 미리암에게 제사장과 선지자 역할을 담당케 했으며, 무엇보다 일찍부터 여호수아에게 후계자 수업을 시켰습니다.
평신도 지도자라고 칭하긴 해도 로봇 같은 자기 수하(手下)들만 양성하고, 자신의 업무는 전혀 분담하지 않으며, 아무리 때가 되어도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는 오늘날 목사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교회 건축 중에, 혹은 한참 부흥중에 물러나는 담임 목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극히 예외적인 몇 경우를 제외하곤,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모세는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 그들로 그 땅을 얻게 하라.”(7절)고 자신의 직분을 이양한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했습니다. 당시 그의 개인적 감정을 헤아려보십시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고 또 질투가 나도록 여호수아가 부러웠을 것 아닙니까? 아주 착잡 미묘했을 것인데도 모든 백성들 앞에서 이제 자기는 더 이상 최고 지도자가 아님을 주지시켰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세 같이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여 큰 업적을 이룬 지도자라도 당신께서 베푸시는 진짜 보상은 이 땅의 현실적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믿음의 가문의 장자가 되는 일에 평생토록 집착했던 야곱도 하나님은 이방 애굽에서 죽어 시체만 그 땅으로 돌아와 묻히게 했지 않습니까? 주의 종은 무조건 생전에 죽도록 고생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궁극적이고도 온전한 보상이 천국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동안 자신을 통해 그분의 빛을 세상에 비춘 것 자체가 열매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모세의 생명을 가나안 땅을 밟기도 전에 앗아간 이유를 하나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음에 주지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31:16,18)
모세가 가나안 입구까지 천신만고로 데리고 온 백성들이 곧 배교할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 어느 민족도 겪어보기는커녕 알지도 못하는 은혜와 권능을 베풀어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등지고 깎아 만든 허상들에게 절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형편을 보게 될 모세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자신의 전부를 바쳐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이루었기에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을 것입니다. 또 시내 산 금송아지 사건 때처럼 백성들 대신에 자신을 죽여 달라고 간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로(年老)한 모세가 다시 또 그런 힘든 경우를 겪기 전에 열조와 함께 재우려 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의인이 죽을찌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찌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57:1,2) 모세처럼 의인들이 열매도 누리지 못하고 죽는 것은 오히려 영원한 침상에서 평안에 들어간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화액을 보거나 당하기 전에 말입니다.
세상에서 의인은 매번 환난과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채 열매도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반면에 악인은 매번 안락하고 형통해도 하나님의 징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불공평을 넘어서 너무나 매정한 하나님 같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는 참 평안에 들어간 반면에 악인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그분의 징계도 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과연 어느 쪽이 더 좋은 열매를 누리는 것입니까?
신자는 오로지 천국에 예비 된 가장 귀한 열매를 소망하며 이 땅을 살아야 합니다. 현실적인 열매들이 귀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교제가 이 땅의 어떤 복락과도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귀하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이 땅에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 열매를 누리지 못해도, 나아가 까닭 모를 고난에 빠져도 하나 억울할 것 없다는 뜻입니다. 진짜로 억울하게 여겨야 할 자는 평생 동안 눈앞의 열매만 탐닉하느라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되는 불신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 열심히 믿고 충성했는데도 그것도 알아주지 않는 하나님이 아주 매정해 보일 때가 솔직히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이 오히려 우리에게 더 섭섭해 하시리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까? 천국에 쌓아둔 보배가 얼마나 귀한데 기껏 그 정도 어려움에 힘들어 하거나, 또는 잠간의 기쁨만 주는 열매를 못 먹어서 안달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갑갑하겠습니까?
비유컨대 생일날 연인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려고 준비해놓은 것도 모르고 교통 체증에 걸려 약속 시간에 조금 늦게 나왔다고 화내며 절교 선언을 하는 셈이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이 수시로 우리에게 매정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우리가 그분의 놀랍고도 신비한 은혜를 미처 깨닫지 못하며 무엇보다 천국에 예비 된 그 큰 영광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 미련을 아직 온전히 버리지 못해서 말입니다.
2/20/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