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 같은 괴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컨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삿16:6)
삼손의 괴력에 여러 번 괴롭힘을 당한 블레셋 족속은 그를 제거하려 혈안이 되었습니다. 삼손이 사랑하는 들릴라에게 은 일천일백의 보상을 약속하며 그 힘의 근거를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진 들릴라는 삼손에게 큰 힘의 비결을 이야기해달라고 보챘습니다.
이 블레셋 족속과 들릴라의 시도를 가만 따지고 보면 어떤 일입니까? 삼손의 괴력은 나실인으로 서약하여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주신 힘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길게 자란 머리카락에서 괴력이 나온 것이지만 그 배경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들릴라의 말은 이렇게 고쳐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습니까?” 이 얼마나 어리석다 못해 불경한 질문입니까? 단순한 호기심과 관심을 넘어서 실제로 결박해 무력화 시키겠다고 하나님에게 대든 셈입니다.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벌을 안 받은 것만도 다행입니다.
물론 블레셋 족속과 들릴라는 천지를 지으시고 만사를 주관하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깎아 만든 우상 다곤에게 제물을 바치며 위로를 얻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삼손과 유대 민족에게도 특유의 우상이 있으리라 짐작했고 또 그 우상이 지금 자기들 우상보다 일시적으로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까닭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삼손은 유대의 우상에게 더 많이 혹은 특별한 것을 바쳐서 큰 힘을 받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 힘을 받게 된 유별난 제물, 주술, 신탁 등의 방도가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혹시 삼손이 개인적으로 힘을 키우는 비결 혹은 신체상의 비밀이 있는지도 궁금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인간이 하기에 따라 자기 신에게서 혹은 스스로 힘을 얻어 키울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바친 만큼 얻는다는 사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이와 다릅니다. 아니 하나님 그분은 우상과는 아예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더 잘나고 그 믿음도 뛰어나 큰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그분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신지라 당연히 큰 힘을 얻는 유일한 민족이 된 것입니다.
삼손이 괴력을 갖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원 기도하여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 나실인으로 서약하였기에 힘을 얻은 것은 분명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삼손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택하여 세웠고 특별히 괴력으로 블레셋을 응징하려 하셨기에 얻은 힘입니다. 인간이 바쳤기에 신의 반대급부로 따라온다면 우상이거나 틀린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에 대해 인간은 자연히 올바른 반응을 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역사도 거의 대부분 당신의 백성을 통해 일상적 인간사의 모양새로 나타날 수밖에 없지만 그 배후에는 당신의 절대적 주권만이 자리합니다. 예컨대 삼손의 머리터럭이 단 하나 남지 않아도 당신께서 힘을 주시기로만 하면 칠흑 같은 머리채를 뽐낼 때보다 수십 배로 더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삼손이 사자의 시체를 접했고 포도주를 즐겨 마시며 기생을 가까이 했어도 즉, 나실인의 서약을 여러 번 어겼어도 하나님은 그의 힘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도록 남겨두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삼손의 기사를 봐도 많은 신자들이 자기와는 무관한 구약의 전설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의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는데도, 아니 실제로 그런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여러 잘못을 저질렀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지 않습니까? 심지어 하나님 앞에 서원한 일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도 말입니다. 예컨대 신년 초에 성경통독을 해야지, 혹은 새벽 기도에 빠지지 말아야지 하고 서원했지만 두어 달이 흐른 지금쯤은 이미 여러 번 어겼을 것 아닙니까? 그럼 우리와 함께 하시던 하나님이 떠나버렸습니까? 떠나지는 않았지만 그 힘이 약해지셨습니까? 둘 다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마음을 다잡아먹고 성경통독을 열심히 하고 새벽 기도에 성실히 참석해야 합니까? 물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으로만 그치면 자칫 우리 믿음도 블레셋 인의 수준에서 크게 나은 면이 없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도적이며 선도적인 은혜와 권능을 제쳐두고 인간의 바침과 공적을 앞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근히 바친 것에 대한 바람이 따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보다는 삼손이 들릴라에게서 받았던 채근을 세상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가 삼손 같은 괴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육체적 괴력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겨내는 영적인 괴력입니다. 그래서 주위 불신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합니다.
“아니 지금 같은 극심한 불경기에 어떻게 그리 힘들지 않게 살 수 있느냐? 내가 보기엔 당신만큼 형편이 딱한 자도 없는 것 같은데 대체 평안과 기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도무지 힘을 잃는 법이 없으니 말이야? 당신을 낙망시킬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우리가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희생제사, 주술, 신탁, 서약을 잘 지켜서입니까? 이웃에 선행을 많이 하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해서 그러합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심지어 그분과 원수 되었음에도 그 모든 허물을 대신 감당하여 십자가에 죽으시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지 않습니까? 그분이 우리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동행해 주시니까 영적 괴력이 우리 속에서 결코 마르는 법이 없이 샘솟듯이 솟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전4:6-9)
삼손이 우리 눈에는 천하의 망나니요 난봉꾼 같습니다. 또 마지막에는 여자에게 속아서, 사실은 알고도 정에 약해져서 일생일대의 실수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꼭 배울 것은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입니다. 그는 그래도 마지막까지 자기 머리에 스스로 삭도를 대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검은 머리카락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자기 괴력이 어디서 오는지 확실히 알기에 절대로 그 근거가 훼방 받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자기를 블레셋에서 자기 민족을 보호하는 자로 세우셨다는 사실도 절대 잊지 않았고 기회만 닿으면 그 일에 충성했습니다.
바꿔 말해 자기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이 그분께로 온다는 사실만은 죽어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그 사실을 최고 자랑으로 여긴 것입니다. 결코 예수님을 스스로 불신 혹은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도무지 신실한 것 같지 않은 신자인데도 어떤 군급한 일을 당해도 주님이 주시는 힘에 모자라는 법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삼손임을 확신하십니까? 우리가 힘이 빠져도 주님은 결코 그렇지 않음을 믿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은혜와 믿음을 주신 까닭이 미혹한 영들을 주께로 인도하라는 뜻인 줄 절감하고 그렇게 실천하십니까? 요컨대 주위 사람들이 대체 지금 같은 때에도 평강과 기쁨을 유지하는 비결이 궁금하다는 질문을 계속 받고 있습니까? 그 형편에 도리어 남을 도울 수 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되라는 반응을 접합니까?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그 힘의 근본은 여전히 알지 못하니라”(9절)는 반응을 얻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3/4/2010
가지는 자꾸만 자기가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할 때가 너무도 많은 것 같습니다.
가지임을 행복해 하면서,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수 있음이 최고의 행복임을 절감하면서
그렇게 감사하며 살아감이 복된 인생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