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설교는 신자에게 분별 받아야 한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1-33)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은 기록된 말씀 자체로도 얼마든지 증명이 가능합니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표현이 등장하거나, 하나님이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임재하여 역사하셨던 모습들을 기록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말씀의 의미가 도저히 인간이 지어낸 차원과는 다르며, 또 그 말씀을 기록하게 된 전후 상황에 실제로 하나님이 간섭했음이 분명하며, 나아가 그 말씀이 후대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도 인간적인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다룰 수 있는 깊은 심령에까지 미치기 때문입니다. 본문도 그런 자증(自證)의 대표적 예로 꼽을 수 있습니다.
먼저 눈에 띄는 내용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했으면 그 반대인 질서 있는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화평은 분명 어지러움의 직접적 반대가 아니며 몇 차원 정도 더 나아간 의미입니다. 그 의미부터 추적해 보면 본문이 바울의 인간적 권면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절대적 계명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예배 중에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인간적 욕심과 자랑으로 남용, 오용, 악용함으로써 생기는 폐해를 지적하면서 질서를 세우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먼저 방언은 통역하는 자가 있을 때만 많아야 두세 명이 순서를 지켜서 행하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가르치는 예언도 두세 명 정도가 한 사람씩 하라고 합니다.
지금처럼 전문사역자가 예배의 시종을 주관하는 모습과는 달리 초대교회에선 누구라도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또 누구나 말씀을 전할 수 있었기에 더더욱 순서와 질서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권면의 초점이 단순히 중구난방이 되지 말고 질서를 지키라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순서와 질서를 지켜야 함은 세상 어떤 모임에도 다 적용되지 않습니까?
한사람씩 예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본문 앞의 구절과 연결해야만 정확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29,30절)
우선 예언하는 자가 너무 많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을 편애하거나 은사를 더 많이 주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이 당신의 뜻에 따라 사람마다 각양 은사를 나눠주다 보니 예언 은사를 받은 자 또한 수적으로 한정된 것뿐입니다. 또 그 가운데서도 예배 때에 계시를 주는 것이 각기 달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다른 사람이 계시할 때에 나머지 신자들은, 특별히 동일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는 잠잠히 있으면서 분변했어야 합니다.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임하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해야 하며 동시에 새 계시에 대해 동일한 분변을 행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단순 질서보다 계시에 대한 분별과 그 뜻에 대한 순종이 더 우선이고 중요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배 중에 성령이 계시를 주고, 성령이 분변케 하고, 성령이 순서대로 예언케 하고, 성령이 회중에게 당신의 뜻을 전해주고, 회중도 성령에 의해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언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오직 질서 잡힌 성령의 인도에 따른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시 예배에서 오직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계시 되고 분별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기에 바울이 이런 권면을 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철학적, 윤리적, 종교적 깨우침을 강론하는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런 권면이 나올 수는 아예 없습니다. 단지 경륜이 높고 사상이 심오한 어른이 예배를 주관하라는 권고면 됩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임재하여서 모든 이의 심령을 당신께서 주장하셨습니다. 당신의 뜻을 알고자 갈망하는 마음부터 생기게 했고 또 그에 부합하여 당신의 놀라운 권능과 은총을 예언하는 자를 통해 회중 전체에 부어주셨습니다. 이처럼 당시에 일어났던 일과 모든 상황에 실제로 하나님이 임재하셨고 그것을 글로 옮겨 놓았기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나아가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 기록된 의미가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무질서의 하나님의 반대인 질서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질서가 세워지려면 반드시 화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질서만 세우려다 화평이 깨어지면 사실은 질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혼동을 막으려고 모든 필요한 절차를 생략한다든지, 독선적 일방적으로 어떤 규정을 강요한다든지, 처음부터 기계적 상하 계급구조를 만든다든지, 어떠한 예외도 용납하지 않는다든지, 전통적 방식을 끝까지 고집한다든지 하는 것은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교회란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성령이 운행하기에 더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본문은 특별히 예배 중의 질서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진짜로 성령이 전적으로 인도하시는 예배라면 질서는 절로 잡힐 것 아닙니까?
오늘날 각 순서별로 전문가들이 사전에 충분한 리허설을 거쳐서 정말 군더더기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예배를 진행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도 없고 찬양도 메시지에 맞게 잘 선곡하여 은혜롭습니다. 성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예배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예배당 안의 장식, 설비, 여건, 모두가 정교하게 디자인되어서 흠잡을 데 없습니다. 심지어 설교마저 정신집중이 잘 되도록 짧으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 스타일로 바꾸어 귀에 쏙쏙 들어오게 전해집니다.
이처럼 은혜로운 예배가 되기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미리부터 성실히 연습하여서 성도들이 온전히 예배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온전한 예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질서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최우선적으로 회중 전체 분위기를 바로 잡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 개인적으로도 그 전체 분위기에 휩쓸리기 쉽게 됩니다. 매끄럽고 충만한 예배를 마치면 분명히 산뜻하고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정서와 이성에만 영향을 미쳤는지, 예배 결과가 성령의 열매로까지 맺힐지는 따로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반면에 본문대로 화평이 선행되면 질서는 누가 강요 내지 인도하지 않아도 자연히 잡힙니다. 그럼 신자들끼리 서로 화목하고 교회 내에 분쟁이 없으면 예배도 은혜스러워지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측면도 일부 있겠지만 예배에서 구해야 할 화평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먼저 예배 가운데 성도 각자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정결케 한 후에 그분의 생각과 뜻을 헤아림으로만 가능합니다. 자신의 현재 영적 실상에 대한 철저한 성찰과 회개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무능, 무지, 갈증, 상처, 환난, 죄악 등 모든 연약한 부분이 그분의 무한하신 긍휼과 은총 안에서 해결 받아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의 보혈로 그분과 화목하게 되었지만 지난 주간에 발에 붙은 먼지들을 다시 그분으로부터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또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와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다시 확인하고선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요컨대 예배 참여자의 철저한 자기 깨트림 위에 예수님의 놀랍고도 신기한 은혜가 한없이 부어지는 일이 예배 가운데 실제로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예배라면 성령이 하시는 역할이 온전히 드러나야 합니다.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참 복음이 되게 하는 일만 하십니다. 죄인의 심령을 완전히 새롭게 하여서 그를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세상 앞에 사망 아니면 생명 둘 중의 하나로 나타나게 만듭니다. 자기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만을 위해 살게 만듭니다. 예배는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을 위해 모두 바치는 헌신이자 주님만으로 호흡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초대 교회의 예배는 단순 투박했습니다. 인간이 기획하여 물 흐르듯이 잘 짜여진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같은 근사한 예배당, 은혜로운 기도, 충만한 찬양 등이 없었습니다. 단순히 예배 참가자의 감정을 쥐고 흔들어 눈물까지 흘리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뤄진 것과는 별개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예배는 십자가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되짚어가며 그 의미를 추적했습니다. 또 예수 이야기만으로도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오직 예수를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살아서 신자를 주관하시는 예수님이 예배에 함께 임재하시어 각자의 심령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주는 성령의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 예배를 드린 자는 산 채로 사자 밥이 되더라도 얼마든지 사단의 세력 앞에 맞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첫 본을 보인 부활에 참여할 것을 확신하며 천국에서 영화롭게 변할 열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큰 군왕도 신자 한 사람을 굴복시킬 수 없었지만, 정말 예수님을 회상하는 예배로만 어떤 흉악한 죄인도 십자가 군병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궁극적 목적도 심오하고 경건한 도덕적 종교적 계명을 지키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당신과의 화평입니다. 그 후에 죄 많은 인간끼리도 화평케 만드는 것입니다. 그 화평은 반드시 한 신자를 통해 먼저 한 죄인을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케 만든 후에, 그분과 화평 된 자들끼리 자연히 화평케 되는 방식입니다.
이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예언할 때 상호 간에 혹은 신자들이 분변해야 할 내용이 명백해졌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만 하는지, 또 얼마나 정확하게 하는지를 따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처럼 신약성경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예배에는 예수 이야기꾼들과 그에 반응시키는 성령의 역사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심령에 찔림이 있어 주님의 보혈에 의지한 영적 씻음과 주님을 향한 새롭고도 강한 헌신이 일어나는지 안 나는지 살피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예언을 듣고 예수 일꾼으로 거듭나면 질서의 하나님이 바르게 예언시킨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철학과 세상의 사조로 오염된 강론이라고 보면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진짜 하나님 말씀이라면 모든 세대 모든 신자에게 완전하게 적용되는 진리여야 합니다. 본문의 권면이 초대 교회, 그것도 방종한 은사자들의 말썽이 많았던 고린도교회에만 주어졌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의 예배에서 그대로 이뤄져야 합니다.
그럼 방언과 예언의 은사자들을 순서대로 질서 있게 세워야 합니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방언은 기도 시간에, 그것도 질서 있게 하는 것으로 제한되어야 합니다. 예언은 현재 예배 가운데 목사 같은 전임 사역자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럼 예언은 질서 있게 운영되고 있다는 뜻입니까? 또 목사만 예언의 은사를 받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가 예언의 은사를 정말 받았다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으니까 문제입니다. 예언의 은사가 설교를 매끈하고도 감동적으로 잘 할 수 있는 실력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정확하고도 깊이 있게 전해서 듣는 자로 심령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물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과 충만함에 힘입어야만 그렇게 되고, 또 그렇게 되면 신자들의 존재와 삶과 인생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예언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전하는 실력이라면 목사뿐 아니라 회중 가운데도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기본적으로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며 열심히 읽고 묵상하는 자라면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분변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오늘날의 예배 가운데도 본문 그대로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신자라도 목사가 예수 이야기만 온전히 전하는지,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십자가 구속계획에 비추어서 해석하고 적용하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아니면 초대교회처럼 일어나 자기가 받은 계시를 전해야 합니까? 그러면 목사는 자기가 행하던 예언을 그치고 잠잠해야 합니까? 이것은 아닙니다. 이것 역시 교회 안에 질서와 연관됩니다. 조용히 개인적으로 찾아가 목사님께 성경대로의 설교를 부탁하셔야 합니다. 그 부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런 설교가 행해지는 교회로 조용히 옮기셔야 합니다.
성령의 사역은 반드시 그 열매로 판단해야 합니다. 목회의 열매가 교회가 얼마나 양적으로 성장했느냐가 절대 아닙니다. 지성적 프로그램과 깔끔한 설교와 감동적 찬양과 뜨거운 기도로만 즉, 예수님 십자가 없이도 얼마든지 외적 성장은 가능합니다. 참 성장은 오직 신자들의 삶의 변화로, 그것도 정말 천국을 소망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십자가 군병이 되었는지 여부로만 따져야 합니다. 단 한명의 그런 성도가 있는 교회가 수만 명의 그렇지 않은 교인이 있는 교회보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훨씬 더 크게 성장한 것입니다.
비록 현실적으론 목회가 어쩔 수 없이 숫자로 판단되어진다 해도 신자들은 잘 분변하여야 합니다. 십자가가 빠진 교회라면 빠져 나오는 것이 목사나 교회를 위해서라도 좋습니다. 정말 목을 매다는 숫자적 열매가 줄면 어디에 잘못이 있는지 점검이라도 해볼 것 아닙니까? 만약 다시 찾아갈 만한 교회가 정말 없다면 그때야말로 이미 예언의 은사를 받은, 다시 말하지만 성경 진리를 온전히 해석하고 따르는 그런 신자들끼리 함께 모여 성령의 역사하심만 바라며 각 자가 받은 예수 이야기로 질서 있게 가정에서 예배를 보면 됩니다.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 말씀임을 자증하기에 논리적으로는 따로 증거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다른 사람들로 확인케 하려면 신자들이 말씀대로 따라서 그 말씀이 뜻하는 결과가 실제로 드러나야 합니다. 아니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기에 그대로 따르면 결과 또한 그 약속대로 나타납니다. 오늘 날에는 초대교회와 달리 완성된 신구약 성경을 이미 소지하고 있기에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본문대로 하여 정말 질서 있는, 그래서 영혼을 살리는 예배를 회복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려면 예배의 형식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를 성경 진리대로 분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예배의 무질서가 없어지는지 따져야 합니다. 외적 질서만 세워서 무질서를 없애려 들면 일시적 위선적 의무적 화평 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교회 예배에 질서가 있습니까? 예수님과 죄인의 화평이, 그래서 죄인끼리의 화평도 예배 가운데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5/14/2010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예배에 대한 제 견해와 태도를 다시 점검해 보고 정리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배가 교회생활의 중심에서 한 일부분으로 밀려 난 것이 아닌가는 생각이 얼핏 스칩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무래도 나이지 싶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내게 주는 유형 무형의 이익을 얻기 위함은 아닌가? 올바른 예배를 통해 나의 거룩과 성숙은 자연스레 이루어질 터인데, 내 영적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예배조차 그 한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은 아닌지? 우리가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동기도 우리의 거룩과 성숙을 예배와 교제보다 대형교회의 규모와 프로그램과 명성에 기대거나 그 속에 감추고자 하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