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각본 없는(?) 드라마.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찌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찌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하고”(왕하 7:3,4)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본문의 네 문둥이 사건도 그러합니다. 엘리사의 예언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너무나 신묘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마저 삶아 먹어야 할 정도로 핍절했다가 하루 만에 식품이 흘러넘치게 만드신 그분의 ‘권능’에 대해선 이미 살펴봤습니다. 전후 사정을 잘 따져보면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지는 그분만의 또 다른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적군의 풍부한 보급품을 몽땅 그대로 이스라엘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성중에는 그런 낌새를 눈치 챈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람 군대가 물건을 버려둔 채 황급히 퇴각할 정도라면 얼마나 부산하고 시끌벅적했겠습니까? 성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이스라엘로선 불침번을 세우거나 정탐꾼을 보내어 적진을 항상 감시했을 텐데 어찌된 연유인지 아람 군대가 완전히 퇴각한 후까지 어느 누구도 몰랐습니다.
대신에 이 네 문둥이를 통해 성중에 알려지게 했습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절묘하신 정도를 넘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문둥이는 성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마저 아람 군대의 움직임을 전혀 몰랐습니다. 엘리사가 아람의 일차 침공 때에 그들의 눈을 감겼다가 다시 열게 했던 이적이 이번에는 이스라엘에게 거꾸로 적용된 셈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놀라운 능력 때문에 가장 하나님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에 살지 못할 정도로 그 사회에서 소외된 자에게 하나님이 승리하셨다는 소식 즉, 복음(福音)이 가장 먼저 전해졌습니다. 또 그들을 통해서 성안 사람들에게, 자기들을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로 간주해 상대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 복음이 전해지도록 했습니다.
문둥이들은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죽을 운명인지라 조국을 배반하고 아람에게 항복하러 갔을 뿐입니다. 그들은 성 밖에 살면서 성중의 친인척이 대주는 음식으로 연명해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성중 사람들로선 자기들도 굶어 죽을 판에 그들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허기졌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이판사판 죽을 판이 된 것입니다.
이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속수무책으로 당신 앞에 항복할 때에 비로소 은혜를 베푸십니다. 심지어 인간이 죄 중에 빠져서 하나님을 전혀 찾지 않았음에도 당신만의 구원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렇게 구속한 자를 여전히 영적으로는 전혀 보잘 것 없음에도 당신의 일꾼으로 세웁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가지 인간 유형이 나타납니다. 인간사회에선 최고의 위치에 있는 왕의 장관은 여호와가 하늘에 창을 낸들 이스라엘엔 아무 소망이 없다고 완전히 체념하고 불평만 쏟아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평소 이스라엘에선 어떤 소망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적국에 투항해서라도 살 길을 찾았던 최하층의 문둥이가 있었습니다.
지금 문둥이들의 믿음이 좋았다는 상투적(?)인 설명을 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장관이나 문둥이나 둘 다 절망에 빠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문둥이가 칭찬 받을 점이라고는 생명을 귀하게 여겨 어떻게든 살 길을 찾으려 노력했다는 점뿐입니다. 누구라도 죽음 앞에선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항거하게 마련입니다.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곤 전혀 없던 문둥이로선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의 범위가, 적국에 항복하는 것까지, 좀 더 넓었을 뿐입니다.
자녀들을 삶아 먹을 정도의 최악의 상황에서 고급식료품이 염가로 팔릴 정도의 최상의 상태로 바뀐 이사건의 배경에는 하나님 한분만 계셨습니다. 당신께서 각본을 짜고 배우를 뽑아 출연시키고 무대 장치도 마련하신 후에 극적반전의 드라마를 시종일관 지휘 감독했습니다.
특별히 이루시려는 일의 특성에 맞게끔 신분이 극명히 대조되는 두 사람에게 주역을 맡겼습니다. 당신의 연출 의도를 현장에 있던 당사자들이나 후대의 성경 독자더러 선명하고도 정확하게 깨닫게 하려는 깊은 배려였습니다. 최고위 왕의 장관의 체념에 빠진 불신앙과 최하층 문둥이의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몸부림, 너무나 절묘한 대조 아닙니까?
엘리사의 경우도 배우로 쓰임 받았다는 면에선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의 성정도 우리와 일반일 뿐이었습니다. 그도 솔직한 현실적 판단으로는 이스라엘에 소망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던 선지자인지라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성령님의 간섭으로 깨달았던 것뿐입니다.
물론 그의 담대한 믿음은 분명 돋보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확신이 있다면 어찌 잠잠히 있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선지자로서 할 바를 다 했을 뿐이라고 간단하게 치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그도 자신의 상식적 판단과 하나님의 계시 중에 어느 쪽을 따를지 자기 이성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했습니다.
또 그 계시를 선포했을 때에 이스라엘 왕이나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할지 생각해보면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임을 확신하고도 그대로 따르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평소 말씀과 기도에 능하며 실제 계명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몸에 베이도록 맛본 자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라도 작은 일에서부터 믿음으로 충성, 순종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온 천하에 오직 엘리사만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확신하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한 나라의 명운(命運)이 한 사람 선지자에게 달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단 한 명의 당신이 남겨둔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주지할 사항은 하나님이 누구도 짐작은커녕 상상도 못하는 당신만의 너무나 신묘한 방식으로 당신의 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동원된 사람들마저 극히 신령하고 초자연적이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사도 비록 당시로선 유일하게 담대한 믿음을 가졌어도 하나님의 뜻과 일을 단순히 대언, 대행 했을 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선포하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지는 전혀 몰랐지 않습니까?
왕의 장관, 문둥이, 아람 군대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모두가 스스로 경건하고 신령해졌거나, 그 반대로 귀신에 홀린 듯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드라마를 연기했던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평소 늘 해왔던 방식대로 지극히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했던 것뿐입니다.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대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행동들을 종합해 일의 전후 사정을 찬찬히 따지면서 그 결과까지 살펴보십시오. 국외자의 입장에서 순차적으로 잘 따져보면 하나님의 절묘하심을 깨달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분의 드라마에 동원된 당사자들은 그분의 각본대로 충실히 연기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전후 사정은 전혀 모릅니다. 그래도 아주 감동적인 하나님의 드라마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극적 반전의 결말까지 온 몸으로 열연하게 됩니다.
인생이란 대본을 미리 알고 외워서 하는 연극과는 전혀 다릅니다. 다음 막의 장면이 어떻게 진행될지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의 연출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의 경우는 대본을 전혀 몰라도 됩니다. 아니 모르는 쪽이 나중의 감동이 훨씬 더 커집니다. 극의 진행 과정이 도무지 상상도 안 되는 하나님만의 절묘한 방식에 따라 이뤄지고 있고, 또 결말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된다는 원리는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제대로 깨닫는 신자라면 환난 중에도 오히려 소망을 키우며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분의 드라마에서 왕의 장관, 문둥이, 엘리사 중에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알려고 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그저 주께 하듯이 작은 일과 소자에게 충성만 하면 됩니다. 단 그분의 드라마에는 실패라는 결말이 절대로 없다는 사실은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7/8/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