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 만연한 실족한 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눅7:23)
작금 교회 안에 실족한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목사가 성적 스캔들에 휘말리고, 장로가 금전적으로 부정하고, 집사들도 세상 사람과 똑 같은 방식으로 산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지 않는 실족은 모든 세대의 교회 안에 항상 있어 왔습니다. 신자도 여전히 죄의 권세 아래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실족은 다른 차원입니다. “나를 인하여” 즉, 당신으로 인한 실족입니다. 예수 잘 믿다가 어디선가 실망하고 교회 출석을 그만두는 일입니까? 그래서 실족하면 복을 못 받고 실족하지 않으면 복 받는다고 한 것입니까? 그 정확한 뜻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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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으면서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 즉, 메시야가 당신인지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할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가 예수님이 메시야인줄 가장 먼저 알아봤고 또 직접 침례까지 주었습니다. 그 침례 현장에서 성령이 주님께 비둘기 같이 임하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하늘의 음성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메시야인지 다시 물었을까요? 물론 그 후에 예수님의 사역하는 모습들이 조금 석연찮았기 때문입니다. 죄인, 세리, 병자, 과부 등 유대 사회의 소외 계층들과만 어울리고 제자들도 어부와 세리를 비롯해 똑똑한 자 하나 없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신 이의 행적으로서 합당한지 혼동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전하라고 답했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22절)
본 것은 병이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난 것입니다. 예를 든 병 전부가 현대첨단의학으로도 고치지 못하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과연 이런 초자연적 기적을 행할 수 있다면 누구이겠는가? 마술로 눈속임만 했겠는가? 인간이 도무지 행할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그럼 내가 누구인가? 그 답은 하나뿐이다. 내가 하나님이다.”
또 들은 것은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셔서 구원의 일을 행하고 있는데 가난한 자에게 들려지는 복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병의 치유와 구원은 별개라는 것입니다. 성육신의 일차 목적이 치유가 아니기에 치유 받은 자는, 혹은 치유 받아야만 구원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더러 “보고(예수님의 정체성) 들은 것(복음의 메시지)을 종합하여” 이스라엘의 오실 이에 대해 다시 잘 판단하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이 성립되려면 그 둘이 합쳐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정체성을 정확히 파악한 바탕 위에서 그분이 전해준 복음을 온전히 믿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요지로 대답하고선 곧바로 당신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연장이기에 일차로 적용되어질 대상이 요한입니다. 요한이 곧 실족한 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실 이가 당신인지 묻게 된 의문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면 실족의 첫 단계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가 처음에는 성령의 깨우침으로 예수님이 구세주인 줄 알고 침례까지 주었어도, 옥에 갇히는 바람에 그 정체성을 실제 눈으로 보면서 확인하고 또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 믿음으로 굳힐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말하는 당신으로 인해 실족한다는 의미가 정확히 나왔습니다. 그분의 정체성을 모르고 복음의 메시지도 정확하게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정체성은 확인했지만 복음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거나, 그 반대로 메시지는 들었어도 그분의 정체성을 확신하지 않는 것도 해당됩니다. 요컨대 그분의 성육신하신 뜻 안에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은혜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우선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뜻도 모르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의 역사적 죽음과 부활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대속 죽음을 믿는 은혜로만 얻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구원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가장 좋았던 예수의 믿음을 본받는다거나, 그분의 가르침대로 따르면 구원의 합격점 안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정작 그분이 하나님이라면 세상의 고통과 모순은 물론 모든 죄악을 제거시켜 주어야만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같은 의인에게 더 많은 복을 주되 저런 천하의 악당들은 당장 이 땅에서부터 망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기독교의 예수는 그러지 못하는 것 같으니 믿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도 인간적 정의감에 불타서 대체 예수가 교회 안의 별 볼일 없는 죄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두고 보자고 팔짱 끼고 있는 자들도 지칭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임을 철저하게 믿는 자들 가운데도 얼마든지 실족하는 자가 나옵니다. “귀머거리도 들리게 하고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주님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이 꼴로 내버려 두십니까?” 새벽기도마다 이런 섭섭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분명 확신하면서도 십자가 복음은 온전히 모르거나 잊어버린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진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궁핍한 자 형통하게 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을 말합니다. 성전 구석에서 하늘도 바로 쳐다보지 못하며 회개하는 세리처럼 죄에 찌들어 도덕적 종교적으로 계속 실족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 전체가 너무나 가난한 것을 애통해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로 가난한 것입니다. 돈이 없거나 병들거나 신분이 천한 것과 천국에 입성하는 일과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신자는 우리의 모든 죄책을 주님께서 십자가에 지고 죽으셨기에 그 은혜로 구원 받은 것만으로도 일생을 두고 감사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보고 복음을 듣고 그 앞에 겸손히 엎드린 것이 신자가 받을 복의 전부인 것입니다. 그 후는 언제 어디서나 죄악과 사단과 죽음 앞에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그분이 항상 함께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재물과 하나님 두 주인을 함께 섬기지 못함에도 주님의 정체성은 확신하면서 실제로는 재물을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실족입니다.
다윗은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37:31)고 고백했습니다.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모세의 율법을 넘어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언제 주었습니까? 애굽에서 구출해 내어서 홍해의 세례를 거친 후에 시내 산에서 당신의 소유이자 거룩한 백성이며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신 후입니다. 일방적 구원의 은혜를 받은 당신의 자녀답게 살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율법은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율법이 바로 십자가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마음에 율법이, 신약 신자는 십자가 복음이 없으면 실족하게 마련입니다. 아니 마음에 그것을 두지 않는 것이 바로 실족입니다. 그런데도 작금 교회 안에는 실족한 자들이 만연할 뿐 아니라 실족에서 건져줄 생각도 않습니다. 아니 무엇이 실족인지도 모르고 도리어 실족하는 것을 잘한다고 부추기고 있으니.....
11/3/2010
이 곳에 와서 얻어 먹게된 말씀들, 그 말씀들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 하나씩 눈이 뜨여가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지, 말로만 십자가 십자가를 외치는 교회들이 태반이기에 그 십자가는 자기 우상을 포장질하는, 자기의 어떠함과 자기의 소원성취를 위해 존재해야하는 십자가라 여기는,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들을 보게되면서 저 또한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음을 매일 매일 발견하도록 하시는 이 말씀들...
이런 말씀들이 있기에 저는 이 곳이 참 좋습니다. 자신을 들여다 볼 때마다 쓰리고 아프지만....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