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새 노래의 찬양 시리즈 3/6)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찌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찌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찌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시96:1-5)
시편에 여호와께 새 노래로 찬양 드리라는 말씀이 6번 나오는데 본문은 그 세 번째입니다. 본 시편의 내용을 한마디로 줄이면 창조주 하나님을 만민 중에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찬양의 궁극적이고 일차적 대상이 되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구태여 새 노래라고 묘사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이 시를 지은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나, 오늘날의 기독교적 상황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때도 믿음의 새로운 전기가 분명 필요했었고 지금도 절실한 것 같습니다.
먼저 이 시는 그 내용이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하기에 동일한 내용으로 이어지는 100편까지 왕의 취임시로 분류되고 또 그런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류와 적용은 어디까지나 후대 사람들의 작업이지, 저자가 그런 저작 혹은 편집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저자로선 성령의 감동으로 이스라엘 백성더러 “광대하신 하나님을 극진히 찬양”토록 할 목적으로 기록한 것뿐입니다.
말하자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대한 하나님을 극진히 찬양하지 않았거나 그분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것이 전제가 됩니다. 특별히 온 땅이 그런 찬양을 해야 하고 또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이젠 그들이 제사장 백성으로 만민더러 하나님의 높으심을 제대로 알게 만들어야 할 소명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경외 받아야 하고 만방의 신들은 헛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는 여호와 외의 이방 신들이 만민들의 경외함을 받고 있었는데 그 모두가 헛것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신들과 하나님과의 차이가 확연하게 구별되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온갖 미신과 잡신들이 많았기에 그 때가 지금보다 영적으로 더 혼탁했거나 미숙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방 신들이 많은 것은 하나님에게나 참 신자에겐 전혀 문제꺼리가 아닙니다. 어차피 하나님 한 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헛것이니까 말입니다.
자칫 간과하기 쉬운 점은 이 시편의 독자는 분명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정작 문제는 이스라엘도 그런 신들을 경외했고 또 헛것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적 부패상은 항상 있어왔지만,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된 자들마저 그랬던 것입니다. 세상을 하나님께로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 물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더러 지금껏 너희들을 보호 인도하신 그분의 기이한 행적을 묵상해보라고 한 것입니다. 또 하늘과 땅을 창조한 광대하신 하나님인 줄 익히 알지 않느냐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여호와와 함께 다른 신을 경외할 수 있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새 노래는 헛된 우상을 향한 신탁, 의지, 경외 등의 불순물을 단 한 치라도 남아있지 않게 제거한 상태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시의 후반부(10-13절)에는 메시아의 도래에 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심리로다”(13절)고 본 시편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의와 진실로 땅을 판단하여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구세주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대하신 하나님의 공평한 통치가 마침내 이 땅에 이뤄지리라는 믿음과 소망을 갖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 때 메시아의 구원은 본 저자가 의미하는 새 노래로 찬양을 했는지 여부로 가름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단지 하늘을 창조하고 기이한 행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했기에 광대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와 진실로 온 땅을 통치하기에 그분은 광대하시며, 또 그래서 극진히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런 의로운 통치를 소망하기는커녕 헛된 이방 신을 함께 경외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도 오직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의 형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자가 그들더러 새 노래로 찬양하라고 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새 노래에 대한 바람은 저자보다 하나님 쪽이 더 절실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음악(CCM)으로 찬양한다고 새 노래가 아닙니다. 감정이 고양되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고 다 그분을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우선적으로, 또 기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부터 찬양해야 합니다. 정작 오늘날의 찬양 가사는 인간의 감성적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성삼위 하나님과 그 기이한 행적을 찬양하는 가사는 찾기 힘듭니다.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 기쁨과 평강이 차게 되었다는 점을 찬양합니다. 이를테면 인간이 스스로 인간을 찬양하고 있는 꼴입니다.
찬양의 멜로디나 가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내용부터 잘못되어가고 있습니다. 우선 창조 진리가 교회 안에서조차 제대로 증거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 세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창조론은 미숙하고 비과학적 이론으로 치부하려 들고, 또 개중에는 진화론과 타협하여서 진화적 창조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모든 사고를 창조주 하나님을 근간으로 분별, 해석, 판단, 적용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동성애를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거역한 절대적 죄로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인간의 자유와 권리 차원에서 해석합니다. 창조주가 실종이 된 것입니다. 창조주가 부인 되는데 아무리 찬양을 해도 그는 찬양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저자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기에 만방의 족속들이 영광과 권능을 그분께 돌리라고 합니다. 온 땅이 그 앞에서 떨지어다라고 합니다. 온 땅의 우주 만물은, 모든 족속을 포함하여 오직 그분께만 의존하여 살아야 하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연약하며 무능하고 어리석은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그분을 멀리한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본 시편은 심지어 하늘이 기뻐하고 땅이 즐거워하며 바다에 충만한 것들과 삼림의 나무들도 그분을 찬양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호산나 찬송하는 당신의 백성들 입을 막으면 돌들이라도 찬양할 것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기뻐하지만 이 땅의 찬양을 주도해야 할 인간은 오히려 창조주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것도 명색이 기독교인이 바다의 생선보다, 산의 나무나 들풀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현대에도 온갖 헛된 우상 신들이 범람합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그러합니다. 깎아 만든 형상보다는 오히려 무엇이 되었든 하나님의 위치와 권능을 대신하면 바로 우상입니다. 돈, 권력, 명예, 지성, 건강, 심리적 평온 등이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보장해 주리라 착각합니다. 교회마저 그런 것들에 의지하라고 고무 선동 격려합니다.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그런 것들을 더 많이 차지하려 듭니다. 하나님께 신자가 품고 섬기는 우상을 더 높여달라고 기도하는 꼴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와 이방신들을 혼합해서 함께 믿은 차원에서 단 하나도 변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대한 찬양이 듣기 힘들어졌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인정합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의 구원의 유일성, 절대성, 영원성 등을 기독교인들 스스로 나서서 부인하고 있습니다. 본 시편의 저자만 해도 예수님이 오시면 바다의 생선들과 산의 나무들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라고 했는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과 홍해에 드러난 여호와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을 만방에 선포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 크신 능력을 찬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 기적 자체가 꼭 기이할 것은 없습니다. 가나안 땅의 관영한 죄악을 씻어내고 거룩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당신의 백성을 사백년 넘게 노예생활을 하도록 허락했던 것이 더 기이합니다. 따라서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노예의 처지에서 해방시켰다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을 선포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직 고기로 배를 채워주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평을 쏟아 놓으며 그 소명을 등졌습니다. 새 노래가 너무나 필요했던 이유입니다.
예수님 오신 이후의 신자는 하나님의 어떤 기이한 행적을 선포해야 합니까? 바로 십자가 구원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아직도 죄 중에 거할 때에 그분은 우리 대신에 모든 죄 값을 감당하시고 죽으시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지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를 향한 하나님 사랑을 끊을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으며 천국의 영광스런 구원의 완성도 이미 완전히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9,10)
대체 이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 이런 하나님을 세상의 어떤 종교가 가르칩니까? 어찌 새 노래로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세상에는 아직도 온갖 종류의 종교가 있고, 종교마다 수많은 신들을 섬기지만 그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은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신음할 인간을 구원하여서 그들로 새 노래의 찬양을 부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으며, 바로 그 목적으로 온 땅과 모든 족속을 창조하셨습니다.
본 시편은 예수님의 초림을 바라며 새 노래로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 시편을 보면서 그분의 재림을 소망하며 새 노래로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작금 종말과 재림에 대한 증거와 가르침이 너무나 드물지 않습니까? 천국의 영광은 거의 선포되지 않습니다. 신자들도 그런 소망을 갖지 않습니다. 오늘이야말로 더더욱 새 노래의 찬양이 절실하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확실하게 기억할 것은 본 시편 기자가 의미하는 새 노래로 찬양하는 것이 구원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런 종교적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 구원을 진정으로 맛본 신자라면 당연히 새 노래로 찬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가 부르는 찬양이 과연 새 노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11/28/2011
자신의 감정, 생각... 너무도 많은 것들이 불순물처럼
끼여있기에 항상 문제가 생김을 봅니다.
지혜를 구하며 조용히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야함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