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기적(1) - 받은 도시락도 한 개였다.

조회 수 4866 추천 수 25 2013.02.27 20:4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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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 기적(1) - 받은 도시락도 한 개였다.
마태복음 강해 (155)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마14:13-21)


믿음이 아니라 요행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예수님 당시의 한 사람이 한 끼 먹을 수 있는 즉, 도시락 한 개에 해당되는 양이다. 한 소년이 도시락 한 개를 바쳤더니 예수님이 축사하셔서 남자만 5천 명, 여자와 아이까지 합치면 최대 약 2만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에 남았다.

예수님은 삼 년간의 공사역 기간 중에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다. 그 중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이 바로 이 오병이어 사건이다. 당시에 그 현장에 있었던 유대인들이나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에게 제일 인상 깊었던 사건이라는 뜻일 것이다. 또 그렇게 인상 깊었던 이유는 피부에 곧바로 와 닿는 먹고 사는 문제와 연관된 기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히 오늘날도 설교에 가장 자주 인용된다. 거의 모든 신자가 그 의미도 잘 알고 있다. 그 중에 가장 강조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신자가 자기가 가진 아주 적은 것이라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수천, 수만 배로 갚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

여러분은 이 극심한 불경기 가운데 생활비를 쪼개고 쪼개어서, 좀 죄송한 말로 손을 떨면서 헌금한다. 비즈니스를 하는 그 바쁜 와중에도 겨우 짬을 내어 봉사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제 사정을 잘 아시지요?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갚아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드린다. 그런데 과연 그런 기적으로 보상 받은 적이 있는가? 솔직히 없지 않는가?

단순히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을 뜻하지 않는다. 수천, 수만 배의 축복으로 되받은 적은 없지 않는가 말이다. 혹시라도 언젠가는 평생에 한 번쯤은 그런 대박 같은 은혜를 받겠지 기대하는가? 그럼 그것은 요행이지 믿음이 아니다.

오병이어는 정반대의 뜻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도시락 한 개로 만 배 이상의 축복을 주셨다. 그러나 절대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이 하나 있다. 정작 도시락을 바친 소년은 몇 배를 받았는가? 똑 같이 한 개다. 두 개도 아니었다. 성경 어디에도 돈 $10을 바치면 10만 불로 불려준다는 약속은 없다.

오병이어의 사건을 가장 정확하고도 길게 기록한 것은 요한복음이다. 지금 마태는 9절로 그쳤지만 요한은 6장 전체 무려 71절에 걸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요한의 메시지는 우리가 지금껏 이 기적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내용과 정반대다.

우선 유대 대중들이 그 기적을 보고 열광을 했다. 자기들을 고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로 인정한 것은 분명히 사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억지로 당신을 왕으로 삼을 줄 아시고 그 자리를 떠나 갈릴리 바다 건너까지 피해버렸다. 그런데도 대중들이 배를 타고 끝까지 따라오자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눈에 보이는 육신의 떡을 구하지 말라고 했다. 대신에 영생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령한 떡인 당신을 먹으라고 했다. 그러자 그 말씀이 어려워 이해를 하지 못하고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요즘으로 치면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교회 출석하여 교회가 시키는 대로 다 했지만 전혀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서 실망해서 교회를 떠난 셈이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달픈 상황을 잘 아신다. 정말로 보잘 것 없는 헌금을 드리면서 손이 부끄럽고 마음이 송구스러운 줄도 아신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어려운 형편에 그렇게나마 바친 것을 너무나 귀하게 여기고 기쁘게 받으신다. 그리고 은밀히 갚아주신다.

하나님이 은밀히 갚아주신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당신께서 언제 어떻게 얼마나 은혜를 베푸실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직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달렸다. 신자의 신령과 진정과 함께 드려진 것이라면 하나님만의 신기하고 오묘한 방식으로 역사를 이루신다. 신자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단 번에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주신다. 신자에게도 가장 큰 유익이 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반드시 드러난다.  

오병이어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은?

그럼 오병이어 기적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은 과연 무엇인가? 헐벗고 굶주린 무리를 배불리 먹이신 은혜를 말하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아니다. 당시에 한 끼 굶는 것은 예사였다. 인류가 하루 세끼 밥을 먹게 된 것은 아주 근래의 일이다. 한국만 해도 1960년대까지 보리 고개가 있었지 않는가? 가을 추수한 쌀 양식이 떨어지고 이듬해 여름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얼마 동안에 끼니를 잇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오병이어 사건은 유대인들의 유월절 절기를 앞두고 일어났다. 모인 무리 중에 상당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행객들이었다. 지금도 여행을 하다 보면 한두 끼 건너뛰는 일은 종종 있다. 여행객들은 반드시 노자 돈을 갖고 있기 마련이며,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가는 유대인들은 가서 희생제물을 사야하기에 더욱 그렇다. 제자들 말대로 동네에 들어가서 저녁을 사서 먹으면 그만이다. 아니면 율법에도 규정이 있듯이 당시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것이 관습이라 아무 집에나 들어가 신세를 지면 되었다.

이 기적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너무 어렵게 따질 필요 없다. 기록된 사실 그대로다. 예수님이 이만 명의 유대 공동체에게 한 명도 빠짐없이 도시락 한 개씩을 당신만의  즉,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식으로 선물한 것이다. 비유컨대 여의도에서 수만 명 참석하는 부흥집회를 마친 후에 주최 측에서 식사를 제공하고는 집회에서 받은 은혜를 나누며 교제한 것과 같다.

도시락 한 개를 바친 소년으로선 그렇게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른들이 와서 달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주었을 수 있다. 그보다는 예수님이 방금 온갖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목격했기에 예수님이 가져오라고 하자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뭔가 하실 일이 있는가보다 막연히 믿고 드렸을 것이다. 그가 이것을 바치면 만 배나 되는 복으로  갚아주시리라 기대는커녕 꿈도 꾸지 않았다. 요컨대 단순히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바치면 수십 수천 배로 갚아주신다는 것은 성경에도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    

지금껏 잘못된 메시지를 접하다 보니까 오병이어 기적을 우리는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하는가? “너무나 보잘 것 없지만 제가 가진 전부인 도시락 한 개를 기꺼이 바칩니다. 하나님이 축사하셔서 만 배로 불려 주십시오. 여기 모인 사람이 여행객들이라 어차피 도시락을 사먹어야 할 형편인데 제가 즉석에서 도시락 배달하면 아주 편하게 밥을 먹을 것입니다. 그럼 제가 돈을 벌어 헌금 많이 하면 하나님도 좋을 것 아닙니까? 정말 일석 삼조이지 않습니까? 제가 바치는 이 도시락을 통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그러나 과연 이런 마음으로 바칠 때에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실까? 솔직히 따져보면 그럴 리 만무한데도 사실은 거의 모든 신자가 그런 기도 내지 기대를 하고 있지 않는가?

헤아릴 수 없는 행복

물론 예수님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게 해주겠다고 명시적으로 약속한 적은 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다.(마13:23) 천국의 비밀을 품은 씨앗인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영혼에 뿌려지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죄와 허물로 더렵혀진 한 인격체가 완전히 뒤집어져 흑암의 세력으로부터 빛 가운데로 나오게 된다.

그렇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에도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에 그 삶에 역사하는 성령의 은혜는 엄청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심령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일으키는 변화는 인간의 말로 구체적으로 도무지 표현하지 못할 만큼 신기하고 위대하다. 예수님은 그래서 제자들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치로 설명했을 뿐이다.    
  
성령이 신자의 심령 안에 맺게 하는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절제”를 어떻게 삼십, 육십, 백 등의 수치로 측정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예수 믿기 전에는 그런 열매와는 아예 거리가 멀었으나, 아니 그런 열매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세상의 쾌락과 죄악을 쫓기 바빴다. 그러다 성령이 내주 인도하면 말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거룩한 참 생명이 신자의 속에 역동적으로 역사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바울도 성령의 그런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사탄을 비롯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신자를 통해 일하시고자 하는 바를 절대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백 배, 육십, 삼십 배의 열매가 맺힌다는 뜻인 것이다.

몇 년 전에 미국 TV에 흥미로운 크레딧 카드 광고가 하나 있었다. 먼저 사랑하는 연인끼리 고급 식당에서 근사하게 식사를 하는 장면을 비춰준 후에 카드로 $100을 지불한다. 또 크루즈 여행을 하고선 $1,000을, 나아가 신형 자동차 대금 $20,000 마저 카드로 결제한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프로야구장에 가서 hot dog도 사먹으면서 즐겁게 경기를 관람한다. 돈으로 치면 $100이 채 안 된다. 그런데 자막에는 금액 대신에 생애 최초의 메이저리그 경기관람이라고 나온다. 이어서 수치로 헤아릴 수 없는 행복(countless happiness)이라는 글자가 뜬다.    

이 광고는 돈이면 무엇이든, 심지어 행복도 살 수 있다는 부정적 의미다. 거기다 카드로 외상 결제하더라도 일단 신나게 즐기라는 유혹이다. 그러나 마지막 메시지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그날 밤의 아이에겐 평생 잊지 못할 가장 소중한 추억이 생긴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에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아이의 인격성숙과 장래 인생에 나타날 긍정적 효과를 절대로 수치로 환산할 수 없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어찌 만 배, 2만 배인들 그 은혜를 못 베푸시겠는가?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요14:12)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지 않는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오늘 날의 신자의 일생 가운데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십, 육십, 백배 남게 하는 장사는 현실에선 없다.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구태여 그런 수치로 표현한 것은 그만큼 하나님 역사의 풍성함은 셀 수 없다(countless)는 뜻이다.

오병이어 기적의 올바른 적용  

처음에 하나님께 드리면 수만 배로 축복해주신다는 해석이 틀렸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반드시 들어가야 할 한 구절이 빠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만 따지면 유대인만큼 많이 바친 자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제발 그만 갖고 오라고 야단쳤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1:11)

혹시라도 하나님께 바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마치 학생이 공부하고 교실 청소하지 않으면 학생이 아닌 것과 같다. 또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대학을 가고 훌륭한 사회인이 되려는 것이다. 공부는 열심히 해놓고 막상 대학을 안가겠다면 그 본인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 부모는 실망이 크겠지만 부모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헌금은 신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이지 하나님에게 직접 유익이 되거나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다. 당신께서 인간과 아름답고 충만하게 교제하는 것이다. 인간의 찬송과 감사와 경배를 받기 원하신다. 또 그러기 위해서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 아래 노예로 묶여서 죽어가는 생명을 예수님의 보혈로 살려내는 것이다.

오병이어 기적을 우리 삶에 정확하게 적용하려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 신자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분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온전한 사랑까지 하기가 힘들다면 최소한 관심을 갖고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 그럼 참 불쌍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도 불쌍하긴 하지만 나보다 더 불쌍하다는 점을 발견하고는, 내가 굶더라도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바친 나에게가 아니라 그 불쌍한 이웃에게 수백, 수천 배의 참 생명으로 살려주는 것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저 죄인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저는 비즈니스에 바빠서 찾아갈 여유가 없고 또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재간이 없기에 저는 기도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가 드리는 이 헌금으로 이 교회에 신령한 복음의 용사들과 능력 있는 주의 종들을 많이 세워주시고, 그들이 제 대신에 그 이웃을 찾아가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십자가 복음의 은혜 안에 그들도 들어오게 하는 일에 이 보잘 것 없는 헌금이 유용하게 사용되게 해주십시오.” 이런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최근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이 미국 땅이 어디까지 타락할지 참으로 걱정 된다. 과연 이 땅에서 우리의 2세 3세를 계속 키워도 될지 두렵기까지 하다. 주님이 이 땅을 고쳐달라고 금요찬양예배나 새벽기도에 교인들이 합심해서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를 주님이 외면하겠는가? 그 견고하던 독일 베를린 장벽이 동독의 작은 교회가 불을 붙인 기도 운동으로 인해 여리고성처럼 단번에 무너졌지 않는가?

너무 거창한 기도까지 필요 없다. 오병이어 기적이 꼭 외형적으로 위대한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갈수록 갈등의 골이 깊어져 가는 이민 가정 안에도 그 기적은 일어난다. 신자는 정말 진정으로 가정을 살리고 싶은 소원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처럼 내 남편과 아내의 이런 저런 잘못과 허물을 고쳐달라는 기도를 해선 안 된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손에 물도 묻히지 않았을 아내를 미국까지 데리고 와서 매일 험한 일을 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불쌍합니다. 저도 힘들지만 절대 아내에게 짜증 내지 않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내를 끝까지 이해하고 포용하며 사랑할 수 있도록 저부터 변화시켜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

부부 사이란 인간적 노력과 의로움만으로는 절대 올바르게 세울 수 없다. 똑 같은 모습의 죄인끼리 만나 함께 살기에 예수님의 사랑으로라야 참된 부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 남편과 아내 각자가 먼저 예수님의 사람으로 성숙되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 둘 사이에 함께 하신 예수님의 사랑만이 두 사람 사이를 주관토록 해야 한다.    

흔들어 넘치도록 주리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이 말씀도 하나님께 바치면 수백 배로 갚아 주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문맥상의 뜻은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에 자비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듬뿍 주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헤아림이 헌금 드리는데 앞뒤 계산하여서 치사하게 바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남을 용서하고 긍휼을 베푸면서 그가 나에게 한 잘못이나 허물을 일일이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서 자신의 기분, 이성, 의지로는 자꾸만 인색하게 주려는 그 한계를 넘어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신자에게 재물이나 현실적 형통으로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시간, 기회를 계속해서 끊이지 않게 마련해주신다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된 이유는 간단하다. 먹고 사는 일이 모두에게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자라도 육신은 연약하기에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수시로 넘어지기 일쑤다. 재물이 없거나 부족하면 누가 뭐래도 고달프기 마련이다.  

그런 어려운 가운데도 내 것을 쪼개어 갖다 바쳤기에 당연히 하나님은 나에게 넘치도록 복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아무리 찢어지게 궁핍해도, 그 반대로 차고 넘치도록 풍족해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마음껏 쓰시도록 돌려드리는 것이다.

헌금과 봉사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 바친 자에게 몇 배로 돌려주신다는 것은 다른 종교의 가르침일 뿐이다. 기독교는 다르다. 신자가 헌금과 봉사를 하면 할수록 다른 이에게 수십 배의 복이 돌아간다. 혹시라도 내가 복을 받으려 교회를 나왔으면 더 늦기 전에 다른 종교로 옮기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곳에는 하나님이 없어서 그렇게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혹시 되더라도 우연의 일치일 뿐이지만.....

그럼 바친 신자만 손해인 것처럼 여겨지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하신다. 바친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풍성히 넘친다는 뜻이다. 다른 이에게 흘러가게 하려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는가?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너무나 불쌍한 저 사람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절절해져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데 안 들어주신다면, 좀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의 자격이 없지 않는가? 당장 도와주도록 돈으로 주신다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를 찾아가 함께 어려움을 나누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부터라도 반드시 주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 없는 재벌 회장이 출근할 때마다 차 문을 열어주는 예수 믿는 수위를 도와줄 수 있는 방도는 돈뿐이다. 연말에 금일봉 하나 하사 하는 정도인데 팔자를 고칠 정도까지는 안 된다. 반면에 예수 믿는 수위가 그 회장을 도울 수 있는 길은 무궁무진하다. 수위가 능력이 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할 수 있는 방도는 수백만 가지가 넘기 때문이다.

재벌 회장은 다른 회사와 경쟁 때문에, 또 자식들 간에 재산 다툼 때문에, 그 외에도 골치 썩을 일이 산더미 같이 많다. 그런데 수위는 반지하 단칸방에 쥐 꼬리 만한 월급으로 여러 식구가 사는데도 회장이 출퇴근 때에 차 문을 열어주면서 한 번도 찡그린 얼굴을 본 적이 없다. 회장에게 아부하느라 그런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쁨과 감사와 만족과 평강이 넘치는 모습이다. 회장으로선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살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러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그랬듯이 밤중에 몰래 수위를 찾아와서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할 수 있다.  

타 종교에선 이런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재벌회장이 되는 것이 그 믿음의 최종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 목표를 이룬 사람에게 다른 이가 도울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런 분을 모셔놓고 가르침을 받기 바쁘다.

반면에 예수를 아는 수위만이 예수를 모르는 재벌 회장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 날마다 기도할 수 있다. 또 그럴 때에 회장이 오히려 그 수위에게 상담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 진정한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다시 말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고 싶다고 해서 멀리 거창하게 찾아 나설 필요는 전혀 없다. 바로 자기 곁의 아내와 남편, 자녀들에게 주님의 참 사랑으로 안고 나아가면 된다. 십자가 복음의 은혜가 그들 위에도 넘치도록 함께 해달라고 진정으로 간구할 때마다 주님은 참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반드시 함께 해주신다.  

11/11/2012

운영자

2013.02.27 20:53:48
*.205.34.240

아시다시피 작년 년말에 설교했던 동영상은 유튜브에 이미 올렸습니다만,
text를 이제서야 이 사이트에 올리는 이유는 그 때에 설교한 것 3편 외에
추가로 시리즈 글을 써 올릴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샬롬!

사라의 웃음

2013.02.27 22:25:02
*.109.85.156

성경의 문구 중 눈에 쉽게 들어오는 부분들이 "이삭이 백배의 복을 받았다" 또 "오병이어의 기적"... 들인 것 같습니다. 오래도록 드리는 만큼 되돌려 받는다라는 가르침, 처음 교회 다니기 시작할 때 부터 아주 아주 오랫동안 배워왔던 것이 드린만큼 더더욱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되돌려 받는 법칙, 어쩌면 뇌리에 세뇌되어진 것 아닌가 싶을 때가 참 많습니다.

세뇌되어졌다라 느껴질 정도로 일상에 제자신에게 발견되는 기복신앙이 얼마나 많은지요~~ 바르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대할 때, 아멘!!으로 화답하고선 또 어느순간에 그 말씀이 살그머니 잊혀지고 다시금 바친만큼 돌아오리라는 기대가 뭉게 뭉게 솟는 제 맘을 보게될 때, 정말 이렇게도 뿌리 깊게 드리워진 탐욕 그리고 예수님 뒤에 살그머니 숨어서 자기 이름 드높이고 싶은 이런 제 모습을 볼 때가 정말이지 너무 많습니다.

도시락 한개 드릴 때 저에게도 도시락 한개만 돌아오는 것임을, 아니 그 도시락 속엔 생각지도 못했던 아버지 사랑이, 현실적으로 추구했던, 생각 속에서 꿈꾸어왔던 그런 복이 아닌, 정말 정말 말로 형언치 못할 아부지의 맘이 담뿍 담뿍 담긴 사랑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는 그 도시락을 받을 수 있음이, 그 도시락은 주변 모든이들이 함께 받아 누리고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이루신 십자가 사랑의 노래이며 이야기이며 찬양이 되도록 인도하시는 아부지의 따뜻하신 맘을 자꾸만 자꾸만 발견하고 그 사랑 앞에 절로 무릎 꿇게되는,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게 되는 그 자리로 이끌어 가시려는 성령님의 손길이심인 것을 오늘도 말씀을 읽으며 또 배우게 됩니다.

날마다순종

2020.08.16 16:54:31
*.14.99.253

'잘못 가르쳐진 성경'에도 반드시 있어야 할 말씀이네요.

나의 작은 기도가 주님을 통하여 그분의 풍성하신 은혜의 역사로 쓰임 받아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며 이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에 우리 모두 아버지를 찬양하는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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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교회출석중단이유(3)-스스로 알아서 천국을 찾아가라. [1] master 2021-08-10 234
38 교회출석중단이유(2)-하나님이 무엇을 도와준다는 건가요? master 2021-08-06 272
37 교회출석중단이유(1)-하나님은 고난을 방치하는가? master 2021-08-02 422
36 오병이어 기적(5) - 우상숭배의 정확한 의미 [3] 운영자 2013-04-09 1891
35 오병이어 기적(4) - 정통교회 안에 만연한 기복주의 [3] 운영자 2013-03-16 1236
34 오병이어 기적(3) - 지금도 참된 오병이어를 체험하라. [2] 운영자 2013-03-05 1208
33 오병이어 기적(2) -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지 말라. [3] 운영자 2013-02-28 1286
» 오병이어 기적(1) - 받은 도시락도 한 개였다. [3] 운영자 2013-02-27 4866
31 예수 믿은 증거가 있는가? (5/5) [1] 운영자 2012-07-16 849
30 예수 믿은 증거가 있는가? (4/5) [1] 운영자 2012-07-16 628
29 예수 믿은 증거가 있는가? (3/5) [1] 운영자 2012-07-16 613
28 예수 믿은 증거가 있는가? (2/5) [1] 운영자 2012-07-16 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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