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기대에 너무나 어긋나는 첫째 복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불치병과 평생 고질병에서 기적적인 고침을 받았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날아갈 듯이 활기차고 기쁨에 겨워 인생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 같을 것이다. 또 고쳐준 사람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서 평생에 보은을 할 것이라고 다짐할 것이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허다한 무리가 바로 그런 마음으로 주님을 좇아 왔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중풍에서 일어나고 암이 나은 것을 두고 그렇게 흥분하고 기뻐할 것 없다. 하나님을 믿어 그분의 자녀가 되어 누리는 복이 얼마나 좋은지 아느냐? 병이 낫는 것 정도는 시작도 아니고 정말 더 신나는 것은 따로 있어”라는 뉴앙스로 이제 복에 관한 여덟가지 강화를 시작한다. 따라온 무리들로선 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이며 세상에 이런 대박이 어디 있는가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첫번 째 복은 사람들의 예상과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고질병에서 나으면 어떻게 하는가? 그 동안 치료비로 가산을 탕진했고 아무 일도 못했으므로 우선 직업을 구해 정상적인 사회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육신이 정상으로 돌아 왔으니까 그 동안의 빚도 갚고 이제는 가족의 생계도 돌봐야 하며 장래에 다시 아플지 모르니까 재정적으로도 정상화 시켜 놓아야 한다.
반면에 예수님의 첫마디는 심령이 가난해야 복을 받는다고 한다. 물론 심령이 가난한 것과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이 다른 뜻인 줄 짐작은 하지만 왜 하필 ‘가난’이라는 단어를 골라 썼을까? 육신을 고쳤으니 이제 정신을 고치라는 것일까? 낭비하지 말고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아라는 것일까? 병 나은 것에 너무 흥분해서 설치면 감정이 앞서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차분하게 절제하며 살아라는 것일까? 큰 기적을 맛보았으니 더욱 낮아지고 겸손하게 사람들을 대하라는 것일까?
팔복은 신자의 영적인 성장을 단계별로 설명하고 있다. 그럼 첫째 복은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된 직후에 느끼는 감격과 누리는 복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의 감격이 어떠했는가?”이다. 과연 심령이 가난해졌고 그래서 천국이 나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는가? 아니면 단지 정말 기쁘고 좋았다는 것은 기억나는데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가? 도대체 심령이 가난해진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시 말하건대 기도해서 병이 낫고 사업이 형통하는 복은 아니다. 이미 그런 복을 누린 자에게 주는 첫 단계의 영적 축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신자가 신자로 바뀐다는 근본적인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털어 먼지 안 나는 자가 어디 있는가?
불신자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얻으십시오”라고 전도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가끔은 “내가 왜 죄인인가? 나는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격렬하게 반발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자신이 죄인임을 어느 정도는 수긍한다.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사람은 다 죄인이지. 그래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아니고는 사람이 죄 사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도대체 수긍할 수 없어”라고 한다. 막상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는 구원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딱 막힌다.
왜 그런가?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죄와 죄인에 대한 개념이 기독교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인을 실수였든 고의든 몇 가지 과오와 허물이 없거나 나쁜 짓 한번이라도 안 해 본 자 없다는 뜻으로만 이해한다. 당연히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을 이유에 대해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자기 스스로 노력하면 그 정도 허물과 죄는 고칠 수 있고 또 고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죄와 이천 년 전 로마의 한 사형수의 죽음과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도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만 한다고 하니 종교적 억지인 것 같다. 반면에 예수 믿는 자들이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짓는 것 같은데도 아무 하는 일 없이 구원 받았다니 신자들이 위선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일전에 드라마 제목은 기억나지 않은데 우연히 한국 TV 드라마를 잠시 보는데 이런 장면이 나왔다. 엄마가 불치병에 걸려 수술비가 엄청났고 수술 후에 운이 좋아도 평생을 핸디캡으로 고생해야 할 형편이었다. 요즘 말로 커리어 우먼(Career Woman)인 잘 나가는 외동딸이 모시고 있었던 모양인데 엄마 일로 골치가 아파 스탠드바에서 친구랑 술을 먹으며 의논하는 가운데 대충 이런 식의 솔직한 고백을 했다.
“나는 내 자신이 이럴 줄 전혀 몰랐어. 지금까지 나만큼 똑똑하고 착하고 교양이 넘치는 자가 없다고 자부해 왔어. 최소한 남들에 비해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라고 확신했어.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아주 큰 착각이었어. 그 동안 엄마를 큰 불편 없이 부양하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효도를 꽤 잘 하고 있다고 믿었어. 그런데 이일을 겪고 보니 수술비와 그 후에 평생을 수발할 일이 엄마보다 더 걱정되는 거야. 왜 저런 불치병에 걸려 나를 고생시키나? 차라리 일찍 죽어버리지. 나 혼자 모른 척 외국에 나가버릴까라는 생각이 끝까지 모셔야 한다는 생각보다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것 있지. 생전 처음 내가 겨우 이런 사람이었던가 발견하고는 너무 놀랬어. 또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니까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해졌어.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나는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 있지. 지금까지는 나의 진짜 모습이 밖으로 드러날 기회가 없었던 것 뿐이지 사실은 나는 죽 이런 사람이었어. 이번에 이런 큰 곤경이 없었다면 아마 평생 나는 잘나고 착한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살다 죽었을 거야.”
기독교와 다른 모든 종교인들을 포함한 불신자들 간에 죄와 죄인의 정의가 다른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 여인은 말은 그렇게 했을지라도 틀림 없이 모든 수를 동원해 엄마를 수술 받게 하고 핸디캡이 되더라도 평생을 보살필 것이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선 도덕적으로 전혀 죄가 없으며 오히려 선행을 한 그럴 수 없는 효녀로 끝까지 남을 것이다. 세상적 윤리와 종교에선 죄를 범하지 않으면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 된다. 죄인의 정의는 오직 죄된 행동을 했느냐 안 했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실제 속마음은 어떠했는가? 엄마가 죽어 버렸으면 싶었다. 아마 너무 힘들다 보면 자신이 직접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도 수시로 들 것이다. 나아가 비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일지라도 죽일 수 있는 방법마저 궁리할 수 있다. 그녀는 겉으로는 아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과연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자신마저 자기는 원래부터 철저하게 추악한 존재였지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갑자기 나빠진 것이 아니었다고 실토했는데 세상은 여전히 그녀를 최고의 의인으로 대접해 준다.
기독교에선 이 여인의 경우에서 보듯이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지적한다. 죄란 인간의 영혼 자체가 부패되어 있고 내면의 자아 전체가 썩어 있어 인간 속에서부터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튀어 나오는 것이다. 외부 환경이나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같이 휩쓸려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 여인은 지성, 교양, 인격, 의리, 도덕성 심지어 종교성마저 모든 주위 사람들로부터 평균 이상 아니 최상급(A+)으로 인정 받았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런 평가와 칭찬과는 전혀 상관 없이 스스로는 자신을 더럽고 추하게 만드는 것이 따로 있더라고 정직하게 고백했다. 심령이 가난해지기 위해선 자신의 존재를 그 폐부까지 완전히 뒤집어 있는 그대로 대면하여 솔직히 그 실체를 인정해야 한다.
두 종류의 가난
헬라어로 ‘가난’을 표현하는 단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품삯 받는 일용직 노동자, 요즘으로 치면 Blue Color는 대체로 최저 생활밖에 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쨌든 굶어 죽지는 않고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다. 이 때는 상대적 가난을 의미하는 ‘페네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프토코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단돈 10불도 벌 수 있는 능력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가난이다. 소경, 문둥병자, 고아 같이 아무런 생활 대책을 세울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helpless) 절대적 가난이다. 예수님의 뜻은 심령이 ‘프토코스’의 절대적 가난의 상태가 되어야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죄란 전적으로 인간 속에 숨겨진 자아와 영혼의 상태가 이미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는 것에 기인한다. 궁핍한 재정 상태, 나쁜 친구의 꾐, 부모의 잘못된 고집, 주위 환경의 피폐함 등 그 어떤 것으로도 죄에 대한 핑계 거리가 될 수 없다. 또 도덕 선생의 권면이나 목사의 거룩한 충고로도 절대 그 죄성을 다스릴 없다. 도덕적, 종교적 훈련과 연습은 비록 죄된 행동을 일시적으로 억제하는 효과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썩어 있는 영혼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완전하게 통제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자기 속에서 끊임 없이 우러 나오는 것이라고는 분노, 시기, 음란, 질투, 궤휼, 사기, 이기심, 자존심, 교만, 불평, 저주 같은 더럽고 추한 것 뿐이다. 마치 아무로 망치로 두드려도 이쪽 저쪽에서 자꾸 머리를 내미는 두더지 게임을 하듯이 이 죄를 죽이면 저 죄가 튀어 나오고 저 죄를 없애면 다시 이 죄가 생기는 것이 인간 심성의 본 바탕이다. 모든 문제의 궁극적 원인, 최종적으로 그 잘못의 책임을 져야 할 곳,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 철천지원수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자신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발견하여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의 전부가 완전히 죄의 덩어리라는 것을 처절하게 인식하고 그 자아를 완전히 산산조각 내어야 한다.
그런 깨어짐 없이 단순하게 윤리적 의미로만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쉽게 고백해선 안 된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자 없지” 식의 의미라면 도덕적 회개도 아니다. 그런 고백은 오히려 속 깊이 감추어 놓은 교만을 교묘하게 치장한 위선일 뿐이다. 대부분의 회개들이 그것도 신자가 하는 것들도 하나님을 일대일로 대면하지 않고 단지 사람들 앞에 자기 위신을 세우기 위해 겸손을 가장한 체면치레일 수 있다. 자신이 남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회개의 모습으로마저 가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인간의 썩은 본성이다.
저도 예수를 알기 전에는 똑 같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욕을 들어먹지 않을 정도로 비교적 의로웠다. 남에게 해로운 짓은 전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절 바르고 친절하며 심심찮게 선행을 베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속을 완전히 까뒤집어 보면 모든 다른 사람을 우습게 보는 교만이 그 배경에 아주 견고한 성채로 자리잡고 있었다.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가 감히 갈 수 없다는 식이었다. 나 혼자 백로였고 남은 모두 까마귀였다. 백로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남들 앞에 더욱 친절하고 겸손해야 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바로 까마귀 중의 왕 까마귀였던 것이다.
예수가 왜 구세주인가?
기독교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선 안 되는 말, 품어선 안 될 생각, 저질러선 안 되는 행동을 날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했습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행동, 말, 생각 그 전부가 사실은 나의 실수, 과오, 약점이 아니라 내 본연의 실체였습니다. 그래서 정작 뜯어 고쳐야 할 것은 내 행동, 말, 생각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입니다.”
아직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나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자들의 경우 예수가 내 죄와 크게 관계가 없고 구세주로 실감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는 아직도 몇 가지 단점을 고치고 자주 실수하는 나쁜 습관을 의지로 이겨내면 된다고 생각하며 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물론 마음 속으로는 항상 자기가 죄인이라는 죄책감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누구누구보다는 나은 사람이야. 교회 집사라는 정도가 저 정도밖에 안되면 나는 장로도 충분히 하겠다. 저 집사를 보면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해져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딱 맞아. 나는 그런대로 낮아졌는데 저 집사는 아직 가난해지려면 멀었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페네스’의 가난이지 ‘프토코스’의 가난이 된 것이 아니다.
중풍병과 문둥병이 나은 자들에게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걸어가야 할 영적 순례의 첫걸음으로 주님은 ‘프토코스’의 가난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자부가 얼마나 새빨갛게 자기를 스스로 속였던 거짓말이었는지 솔직히 인정하라는 것이다. 자기는 처음부터 세상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더 죄가 많은 정말 별볼일 없는 사람인 것을 실감해야 한다.
예를 든 TV 드라마의 여인의 실토를 보라. 십계명에도 하나님 경배 다음이 부모 공경이듯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선 최고의 도덕적 가치는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다. 그들도 부모를 모시지 않으면 천륜을 저버린 최고의 죄인으로 친다. 말하자면 엄마가 그런 불치병에 걸린 것은 그녀에게는 비록 하나님을 몰랐다 해도 인간으로선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녀의 형편과 여건이 뒷받침 안된 것도 아니요, 효성과 정성이 모자란 것도 아니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을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전혀 예상치도 심지어 꿈도 꾸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자신의 실체가 천륜을 져버리는 자임을 발견했다.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가장 추하고 더러운 인간, 사단이 광명의 천사의 탈로 변장 시켜 놓은 짐승이 자기 속에 있었다. 죽기보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자신이 실토한대로 어쨌든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면 들수록 더 자신이 비참해지지만 다른 어떤 변명과 핑계를 댈 수 없었고 어떤 도덕, 사상, 종교적 해명도 전혀 먹혀 들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평생에 몇 번은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에 사람이 취할 길은 두 가지 뿐이다. 우선 자신의 실체가 너무나 더럽고 두려워 다시는 그 실체를 쳐다보지도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어떻게 할 수 없다면 외부에서 어떤 힘이 그 전체를 변화시키는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자기를 구원해 보려 노력하거나 아니면 아예 문제 자체를 망각하는 것이 그 하나요 자기 외부에서 다른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더러운 영혼의 실체를 발견은 했지만 두 번 다시 그 실체를 되돌아 보지 않으려는 쉬운 길을 택하고 만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각이 전혀 없고 또 그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으니까 단순히 자신의 모습을 망각하는 수 말고는 다른 어떤 길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내면의 실체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치는 자도 아주 많다. 사단이 모든 불신자의 영혼을 흑암 속에 가두어 놓았기 때문이다.
또 은연중에 자신의 실체를 일부라도 발견해도 영혼이 부패되는 바람에 지정의 자체도 왜곡되어 자기가 발견한 실체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 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구원의 길과는 정 반대의 길로 가버린다. 죄책감을 느낄수록 세상의 것들로 자신의 그 더러운 실체를 감추려고만 든다. 지성, 교양, 도덕, 사상, 종교 등을 그 해결책으로 삼아보지만 끝없는 실패와 좌절만 맛볼 뿐이다.
신자는 다르다. 자신의 본연의 실체가 죄인 중의 괴수임을 자각한다. 비록 남들이 나를 좋게 평가하고 칭찬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자신만은 안다. 아무리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고 교회 일이나 불우 이웃을 위해 때로는 뭉치 돈을 내더라도 자신의 영혼의 실체를 벌거벗겨 놓으면 절대로 부모, 친구, 목사, 배우자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부끄럽다. 남들에 비해 나는 그래도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것이 얼마나 위선이요 교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자기야말로 사망의 몸이요 곤고한 자로서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실체를 변화시킬 수 없음을 실감한다. 그래서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시51:4)라고 고백한 대로 그 영혼을 깨끗케 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오장육부를 다 들어내어 놓는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여 죽을 놈은 정말 저입니다. 왜 주님이 저를 대신해서 죽었습니까?”라는 고백이 절로 나온다.
인간이 어떤 방법으로도 스스로 죄를 씻어낼 방법이 전무하므로 하나님 당신이 인간의 모든 죄를 안고 십자가에 돌아 가셨음을 깨닫게 된다. 정말 예수님의 보혈 말고는 부패한 심령을 고쳐낼 방법이 없음을 알기에 저절로 “주여! 어찌 저 같은 자도 택하시고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나이까?”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또 그런 고백이 이미 철저하게 부패한 자신의 지정의로 깨닫고 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찾아 오셔서 간섭하셨기에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이 직접 자신에게 찾아 오시고 깨우쳐 주시는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 크신 사랑과 은혜 앞에 “주님 없이는 저는 한 시도 살 수 없습니다.(Helpless) 인간으로서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가난한 심령이다. 예수님이 거룩한 품성과 고매한 인격을 심어 주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인인 자신을 단지 당신의 십자가 앞에 진정으로 무릎 꿇었다는 것에만 근거하여 의인이라 칭해준 것 뿐임도 안다.
베드로는 언제 가난해졌는가?
베드로가 언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었는가? 제자들 중에 최초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the Great Confession)한 때인가? 아니다. 그 고백을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닭 울기 전에 세 번 배반할 것이라고 지적을 받았고 실제 그렇게 했다. 스승을 배반한 자가 진정한 제자일 수는 없다.
교회사적으로도 기념비가 될만한 베드로의 그 유명한 고백 직후에 주님은 그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고 천국 열쇠를 받을 것이라는 격려와 약속의 말씀을 주었다. 당연히 기고만장해진 그는 주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라고 큰 소리쳤다. 쉬운 말로 바꾸면 “제가 누구입니까? 의리나 인격으로나 삼년간 주님의 수제자로 따라 다닌 것으로 보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만은 스승을 절대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스승을 보호하겠습니다”이다.
그 호언장담이 심지어 비천한 하녀의 추궁에 스승을 저주하며 세 번째 부인한 것으로 완전히 공수표가 되었고 그 순간 새벽 닭이 울었다. 성경은 바로 그 때에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1-62)라고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의 통곡의 내용이 무엇이었겠는가? “왜 내가 스승을 배반하는 죄를 지었는가? 왜 내가 자원해서 한 약속도 하루도 못 지나 어겼는가? 이제는 더욱 내 성급한 기질을 고치고 인격을 갈고 닦아 다시는 이런 큰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지. 정말 기도하고 말씀 보면서 믿음을 키워야지”인가? 과연 이 정도 회개한 것으로는 통곡까지 했겠는가?
“‘나’라는 인간이 겨우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가? 열 두 명의 제자 중에 그래도 내가 가장 용감하고 담대하고 의리가 있었지 않는가? 수제자로서 스승을 끝까지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착각 중의 착각이었어. 기껏 하녀의 추궁에도 겁에 질려 스승을 배반하는 졸장부 중의 졸장부야. 그 동안에 큰 어려움이 없었기에 그래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자부했었는데 정말 겨우 이런 수준의 인간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자신의 내면의 자아 전부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통곡이었다. 주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한 믿음의 반석이 완전히 모래알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생전 처음 심령이 가난해진 것이다. 주님의 삼년 간 공생애를 가장 앞장 서서 따라 다녔지만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전까지 예수님은 단순히 랍비였고 그는 수제자였다. 그러나 그가 스승을 세 번 배반한 후에 주님이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본 순간 비로소 예수님이 그에게 참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예수님 아니면 자기의 영혼에 어떤 만족과 기쁨이 없음을 처음으로 실감한 것이다. 그는 드디어 천국의 문 안에 한 발자국을 들여 놓은 것이다.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부인한 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도저히 다시 되 담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 참담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자비로운 눈 빛 하나 만으로 그는 온전한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다. 인간의 절망 위에 주님의 은혜가 넘치는 생명력으로 풍성히 부어졌다. 바로 이것을 두고 예수님은 암이나 중풍병이 낫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축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도 이제 계속해서 말씀하실 여덟 가지 복 중의 처음이자 가장 초보적인 복이라고 말이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진정으로 실감 나는가? 말하자면 예수님을 처음 믿고 난 후에 암이나 중풍병이 나은 기쁨보다 더 큰 기쁨과 감격을 누린 적이 있는가? 혹시 실감이 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주님이 그런 복을 주지 않은 것도 아니요, 우리가 둔해서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심령이 진짜로 가난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내려 갈래야 갈 수 없는 제일 밑바닥의 절망까지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베드로처럼 차라리 세 번을 그것도 저주하며 부인하더라로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로 씨름 해본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단지 세상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조금 죄 지은 것을 후회하는 정도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자신의 전존재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완전히 부패한 아담의 후손임을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아도 정말 구역질 날 정도로 싫어져야 한다. 자존심, 체면, 위신, 이기심, 교양, 지성, 도덕성, 종교심 등이 견고한 울타리를 치고 있는 성채를 뚫고 들어가 심령의 맨 안쪽을 뒤집어 엎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진짜 실체에 너무나 절망하여 도저히 더 살아갈 힘과 소망이 없어졌을 때에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통곡하며 울부짖어야 한다. 그 순간 베드로를 사랑이 넘치는 눈으로 쳐다보시고 지금도 찾아 오셔서 똑 같은 사랑으로 나를 바라 보고 있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 인간이 천국을 차지하는 길은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 그것도 ‘프토코스’의 절대적 가난으로 내려가는 길 외에는 없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일 뿐이다.
네, 까마귀 중에 왕 까마귀였음을 너무도 몰랐었습니다.
그래서 옳곧음이 곧 진리인 줄 알고 도덕적 윤리적 부분만 해결해 보려 애썼고 또 남의 잘못도 현미경
같은 눈, 망원경 같은 눈으로 귀신같이 찾아내는 그런 옳곧음을 줄곧 믿음이라 착각했었지요.
내면 속의 흉물스런 자신의 자아는 굳이 눈을 감아 버리는 그 죄가 얼마나 짐승같은 짓인 줄 모르고서는..
몇 번을 읽어도 목사님의 글은 또 다른 부분을 건드려 주십니다.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