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죽기보다 싫은 것은?

조회 수 4226 추천 수 329 2005.04.24 14:39:36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어떤 천재 여자 성악도

1900년대 초 영국의 유명한 작곡가 Elgar에게 어느 날 한 소녀가 노래 실력을 테스트 받으려 왔다.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운 천부적인 목소리를 지녔고 음정 박자 기교에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했다. 그녀의 노래를 다 듣고 난 엘가는 “자네는 장차 위대한 성악가가 될 수 있을 것이야. 단 자네의 마음이 완전히 부셔져 버릴 만큼 큰 슬픔을 겪는다면 말이야. 귀로 듣기에는 아름답지만 아직 다른 사람의 심령을 울릴 만큼은 안 돼”라고 평해 주었다.

인생의 참 맛과 깊이를 알려면 실패와 환난을 통해 슬픔을 겪어 보아야 한다. 친구에게 배신 당한 자가 우정이 아름다운 줄 알며, 실연의 상처를 맛본 자라야 사랑의 깊이를 알고, 중병에 걸려야 건강이 소중한 줄 깨닫고, 눈물 젖은 빵을 먹어봐야 삶에 겸손해지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러나 이는 따로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체험에서 터득할 수 있는 지혜에 속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부어주는 두 번째 복의 상태를 애통해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고된 인생살이에서 누구나 겪게 마련인 일반적인 슬픔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예수님의 강화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평생을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기도 하고 삶의 온갖 질곡을 겪어 볼 대로 다 겪은 자들이다. 주님이 그런 사람들보고 또 다시 병을 앓아 봐야 건강이 소중한 것을 알 것이라는 상식적인 교훈을 주실 리 없다.

그렇다고 불쌍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만 힘든 일을 겪으면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유달리 테레비 드라마나 영화에 감동적인 장면이 나오면 크리넥스 한 통으로도 모자라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본문의 애통한 사람이 그런 자들을 의미한다면 성격이 곰 같아 무덤덤한 사람들은 당연히 복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은 차별하는 분이 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따라서 팔복에 묘사된 신자의 상태를 인간의 기질이나 성격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천성적으로 감정이 풍부하고 예민한 자가 있는 반면에 아무리 힘들고 슬픈 일에도 동요하지 않고 꿋꿋하게 잘 견디는 사람도 있다. 성격과 기질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가장 적합하게 나눠 준 은사일 뿐이다.

본문에 ‘애통’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클라이에인’으로 슬픔 중에서도 가장 큰 슬픔을 뜻한다. 가슴을 부수며 뼈를 깎고 골수가 마르며 심장을 꿰뚫고 마음과 육신 전부를 훑어 내려 완전히 산산조각을 만들어 버리는 그런 슬픔이다. 표현이 거창해서 이해하기 어렵다면 쉽게 말해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 주체 할 수 없이 속에서 복받쳐 나오는 슬픔이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에도 불구하고 주위에 누가 있던 없던 터져 나오는 울음이다. “내가 이게 무슨 꼴이람 부끄럽게시리”라는 생각이 들어도 전혀 통제가 안 되는 울음이다. 남이 말려도 되지 않고 말릴 수도 없는 그런 울음이다. 꼭 큰 소리를 내어 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흐느끼더라도 슬픔이 물밀듯이 밀려 오기 때문에 도저히 중단할 수 없는 그런 울음이다.

여러분은 한번이라도 이런 ‘애통’에 젖어 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어떤 경우에 이런 울음을 울게 될 것 같은가? 오랜 유행가 제목에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것이 있다. 단장(斷腸), 즉 창자가 끊어질 듯이 슬펐던 미아리 고개였다는 뜻이다. 육이오 사변 때에 미아리 고개를 넘어 오는 수 많은 피난민들 틈에 휩쓸려 사랑하는 부모처자나 애인을 생이별하는 바람에 그런 슬픔을 느꼈다는 것이다. 세상 사는 동안 혈육이나 배우자를 사별했을 때 느끼는 슬픔만큼 애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고 주위 사람의 시선과 상관없이 속에서부터 울음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부모 잃은 슬픔은 모든 사람이 한 번은 다 겪게 되는 일이라 신자가 누리는 두 번째 복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낼 때 본토 친척 아비집과 이별하라고 했다. 또 백세에 난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셨지만 순종하면 복을 주겠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를 자기 외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해 바치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도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10:37)라고 말씀하셨다.

목사가 된 박사 유학생

한국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유학 와서 박사 공부하다가 진로를 바꾸어 목사가 된 분께 직접 들은 이야기다. 유학 오기 전에는 하나님과 예수에 대해 전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세상에서 최고로 똑똑하고 착한 의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많이 보편화 되었지만 그 당시에 미국 유학 올 정도면 세상적으로는 어느 모로 따져도 하나 부족한 것 없었다. 그러니 “당신은 죄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구원을 얻으시요”라는 권면에 코방귀도 뀌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 막상 유학 와서 말도 잘 안 통하고 문화와 관습이 달랐고 동료 학생과의 관계에서 시기와 모함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았고 미국 교수에게 매일 공부 못한다는 야단을 맞게 되었다. 그로선 생전 처음으로 고난다운 고난을 맛본 것이다. 한국 최고 명문대를 나왔지만 영어가 입국 첫날 공항에서부터 막히기 시작하더니 수업시간에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첫 시험의 점수를 엉망으로 받고 나니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너무 힘들다 못해 기도하여 그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고 그렇게도 외면했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으며 어느 정도 마음의 평강을 회복하곤 했지만 언제나 일시적일 뿐이었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교회에서 부흥회를 마친 강사 목사가 누구라도 기도 받을 일이 있으면 앞으로 나오라고 권유했다. 그는 너무 힘든 사정을 말씀 드리고 기도를 받았는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차츰 걷잡을 수 없이 속에서부터 통곡이 솟구쳐 올랐다. 강대상 곁에서 누가 듣던지 보든지 전혀 개의치 않았고 부끄럽다는 의식도 전혀 못한 채 정말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 울었다. 털썩 엎드린 채 앞뒤 양 옆으로 뒹굴면서 실컷 울고 나니 교인들은 다 가고 없고 2시간도 넘게 흐른 뒤였다.

사실은 부모나 자식이 죽어도 슬퍼하는 기간은 훨씬 오래 갈 수 있지만 어지간해선 앉은 자리에서 단번에 두 시간 넘게 울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선 부모 장례 때에 불효 자식을 대신해서 계속해서 곡(哭)을 해주는 사람을 일부러 돈을 주고 고용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본문의 애통은 부모나 자식이 돌아간 슬픔보다 더 큰 비통을 말한다. 그러나 그 슬픔의 의미와 내용은 전혀 다르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강사 목사는 단지 여러 가지로 힘든 일들, 영어가 안 되고 학점이 나쁘고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 받은 문제들에 관해 기도해 주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조금 지나고 보니 그런 문제들이 서러워서 우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하나님 교수가 저를 좀 편하게 대하게 해 주시고, 영어에 귀가 뚫리고 입이 열리게 해주시고, 동료 학생들과 사이 좋게 지내게 해주시고…. 엉엉!”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명색이 최고 지성인으로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힘든 일이지 슬픈 일은 아니고 애통해 할 문제는 더구나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강사 목사로부터 기도 받고 있을 동안은 그런 문제가 조금 서럽기도 했지만 혼자서 정신 없이 울 때는 분명히 자기 속의 알지 못했던 슬픔의 웅덩이가 터진 것 같았다.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수가 솟아 나듯이, 내 속에 이렇게 눈물이 많았던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수건으로 그 눈물을 닦을 엄두도 내지 못했고, 온 얼굴이 비 오듯 땀방울로 흠뻑 적시면서 그럴 수 없이 서럽게 울었다. 구체적으로 그 울음의 원인을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었고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을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단 한가지 자기 심령 속에 분명하게 각인(刻印)된 것은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다, 나를 알고 계시며, 지금 바로 내 곁에 와 계신다”는 사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답고도 포근하고 따뜻한 영적 기운이 자기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동안 교회 출석한 이래 수십 번이나 들었지만 말도 안 되는 엉터리였다가  아주 가끔은 어느 정도 타당한 것 같기도 했던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완전히 실감할 수 있었다. 설교 말씀만으로는 알 듯 모를 듯 했던 주님의 사랑이 머리가 아닌 가슴에 가득 채워져 더 이상 한치의 의심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주님 감사합니다. 이 어리석고 못난 저 같은 자도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셨군요. 예수님 감사합니다.”는 고백만 쉴새 없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가 무지하고 어리석고 완악한 인간의 영혼에 섬광처럼 비취고, 그 분의 십자가 은혜가 아담의 원죄로 완전히 썩어 있던 죄인의 가장 깊은 내면을 터치하는 순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그도  강사 목사로부터 기도 받는 순간 뭔가 뜨거운 기운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체험을 했다고 간증했다. 예수님의 영이 최고로 교만하고 의롭다고 자부했던 유학생의 완악한 심령을 어루만진 것이다. 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불 세례 즉 성령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 얻을 때에 꼭 동일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성령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모르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밤중에 찾아와 구원의 길을 물은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했지만, 성령 세례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리도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고 했다. 그는 아마 주의 종으로 택함을 받았고 세상에서 너무 자기만 최고인줄 알았기에 더 뜨겁고도 확실한 성령 세례를 체험 시킬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예수를 모르고 원죄 하에 있는 모든 자연인은 내면의 가장 깊숙한 부분이 항상 텅 비어져 있다. 그곳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채워져야 할 것이 따로 있음에도 채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당연히 세상에서 아무리 출세하고 온갖 형통을 맛보더라도 항상 공허하며 충족을 느끼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실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의 아비 사단의 영이 차고 앉아 있는데, 그 본성대로 인간을 속여 자기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기에 인간이 왜 항상 갈급한지 알지 못한다. 간혹 뭔가 부족하고 비어 있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무엇이 비어있는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이란 사실상 인간을 통제 조종하는 곳이요 인간의 본성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곳에 차지하고 있는 사단의 영을 예수의 영이 몰아내고 좌정하게 되면 어떤 흉악한 죄인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참다운 인간으로 회복된다. 거짓에서 참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죄에서 의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공허에서 충만으로 바뀐다. 인간의 안과 밖이 완전히 뒤집어지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유학생 목사의 경우 두시간이 넘게 통곡하면서도 자기가 왜 우는지 지성적으로 이해가 안 되었다. 감정적으로도 크게 슬프거나 억울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분노와 상처를 쏟아 붓는 한풀이나 육체적인 고통이 심해 운 것도 아니었다. 남들이 보니 부끄러워 빨리 울음을 그쳐야지라는 의지적 결단은 생각조차 못했다. 말하자면         그 울음이 현실적인 문제와 구체적으로 연결된 된 것이 아니었고 평소에는 지정의로 인식 못했던 내면의 본성에서 터져 나온 울음이었다. 자기라는 인간 전체가 너무나 비참하고 더럽고 죄 많은 존재였음을 깨닫게 된  비통의 탄식이었다. 나아가 그의 죄로 찌들은 옛사람을 완전히 산산조각 내어 부수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넣듯이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영을 부어 넣어 주시는 작업을 한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모든 인간에게 가장 갈급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항상 부족해서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무엇인가? 누구나 심령 깊숙이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위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영인가? 그렇게 쉽게 대답하고 치울 문제가 아니다. 정답이긴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틀린 대답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은 복음의 진리를 알고 예수를 믿기 전에는 절대 그런 대답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대답을 할 줄 아는 자는 사실 이미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부족하고 갈급한 것이 없다. 반면에 불신자는 평생을 가도 자기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은 절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사람이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갈급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따로 있다는 것이다.  

미국 이민 와서 혼자 사는 나이든 여자 분이 있었다. 온갖 고생을 겪은 후에 풍족하지는 않지만 자기 소유의 콘도를 하나 장만해 은퇴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저히 견딜 수 없고 괴로운 고통이 하나 있는데 놀랍게도 회사에서 퇴근하고 자기 집에 가는 것이라고 했다. 말이 좋아 미국 회사지 사실은 공장이었고 하는 일도 단순 육체 노동이었다. 상식적으로는 하루 종일 일에 시달려 피곤하니까 어서 빨리 집에 가서 샤워하고 쉬어야 할 텐데 정말 예상 밖의 말을 했다.  

늙어서 그런 노동을 감당하기에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고, 아직 결혼도 못한 사십이 가까운 두 아들이 있고, 경제적으로도 결코 풍족하지 않는 등 현실적 고통이 많지만 그런 것들보다 더 힘들다고 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에 들어가려고 현관 키를 돌리는 순간이 죽기보다 싫다는 것이다. 방 두개짜리  콘도지만 혼자 있으면 완전히 텅 빈 것 같고 바로 감옥이자 지옥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에 서로 사랑하고 사랑 받는 존재로 만들었다.  인간은 함께 돕고 섬기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야만 가장 인간다워질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서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느끼도록 처음부터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웃에게 소외되어 혼자 있는 것을 당연히 가장 싫어할 수 밖에 없다. 병들어 고통스럽거나 돈이 없어 쩔쩔 매는 것보다 더 힘들다.

친구, 애인, 직장 동료, 교회 성도, 심지어 형제, 부모, 자녀들에게 상처를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현실적인 문제에 곤란을 겪는 것보다 심령의 고통은 더 심하며 밤새 끙끙 앓는다. 다윗이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시22:14,15)라고 고백한 것이 정말 실감난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에서 왜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을 느꼈겠는가? 부모형제를 잃어버린 슬픔도 크지만 “세상 천지에 이제 나 혼자 고아가 되었구나.  언제든지 나의 힘과 위로가 되어 줄 사람이 내 곁에 아무도 없구나.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사람이 다 사라졌구나”가 더 큰 아픔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심층을 파고들면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소원이 깔려 있다. 어떤 일을 계획하여 이뤄지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사실은 고독을 없애고자 하는 작업이자 사람들 앞에 인정 받아서 사랑을 획득하려는 몸부림이다. 남들이 자기를 자기답게 알아 봐 주기를 원하는 욕구가 그 어떤 욕망보다 인간에게는 가장 크다. 남에게 사랑 받고자 하는 욕구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참 사랑을 제대로 주고 받지 못하는데 있다.  

영혼의 빈 방에 예수를 모셔라

목사가 된 그 유학생은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사업가는 돈으로, 젊은 여자는 화려한 옷과 미모로 그러는 것과 똑 같이 그 또한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스스로 고독을 없애는 방법으로 지식을 동원한 것이다. 그 작업을 미국 유학 길에 올랐을 때까지는 단 한 치의 차질도 없이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제 곧 유포피아가 자기 눈 앞에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성공한 인생으로 수많은 사람의 박수 갈채를 받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헤아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평생 처음으로 큰 장애를 만났다.

그런데 영어가 힘들고 교수와 동료 학생간의 관계가 뒤틀려 상처 받은 것은 사실은 그 장애의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 이면에는 정작 자신의 가치가 사람들로부터 아주 낮게 평가되어 인정 받지 못하게 되지 않나 하는 불안감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그 장애를 없애려 노력했다. 원만한 인격, 남보다 우월한 도덕성, 가장 자랑하는 똑똑한 머리, 그 동안 쌓아 온 인간관계 처세술 등으로 얼마든지 자기 인생을 올바른 궤도 위로  올려 놓을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내가 누군데, 그래도 한국 최고 명문대 출신 아닌가?”라고 큰 소리 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정반대로 자기의 열심과 정성만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을 심각하게 깨닫기 시작했다. 점차 다른 사람과 사이의 벽은 더 높아지고 본인으로선 전혀 의도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았는데도 세상으로부터 자꾸 따돌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모든 인간이 죽기 보다 싫어하는 고독의 감방 안으로 떠밀려 들어간 것이다. 급기야 그 동안 그토록 싫어서 상대도 안 했던 예수쟁이에게 찾아가 솔직히 털어 놓고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바로 그 때 어떤 현상이 벌어졌는가? 독방 감옥과 같았던 그 영혼의 빈 공간에 절대적인 사랑, 조건 없는 사랑, 영원한 사랑, 거짓과 변개가 없는 사랑,  하나님의 독생자와 맞바꾼 십자가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러자 지난 30여년 동안의 하나님을 외면했던 자기 인생이 너무나 헛되고 헛되었고, 자기라는 존재 전부가 너무나도 썩어빠져 단 한 부분도 의로운 곳이 없다는 통한의 고백과 함께 울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다른 사람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에 들어갈 수 없다. 평생토록 고독을 면할 길이 없다. 고급차, 화려한 옷, 대궐 같은 집, 세상의 명예와 권력 등을 아무리 풍성하게 누려 봐야 오히려 더 외로워질 뿐이다. 그 근본적인 갈급함을 부모, 형제, 친구, 배우자, 자녀라도 채워주지 못한다. 외면이 화려해질수록 내면은 오히려 더 철저하게 공허해지는 것이 인간이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 하나님의 영이 좌정해 있었던 그 공간이 다시 그 분의 영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신자가 되어 두 번째 누리는 복은 첫째 복의 연장선상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첫째 복은 베드로처럼 ‘나’라는 존재가 정말 겨우 이것 밖에 안 되는가라고 처절하게 깨닫는 것이다. 자기 심령의 상태가 상대적 빈곤이 아니라 절대적 빈곤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절대적 빈곤이란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선 아무리 해도 참 사랑을 주고 받을 길이 없기에 온 천하에 자기 혼자 뿐인 절대적 고독 속에 철저하게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두 번째 복인 애통은 바로 그 고립무원(孤立無援-helpless)의 상태가 너무나 비탄스러워 자기 속의 눈물 샘이 터지는 것이다.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자신의 심령 상태가 너무 더럽고 추해서 통곡했다. 결국 그 이면에는 자기는 이제 스승과 철저하게 분리되어 정말 이 세상에 자기 혼자 밖에 없구나라는 것을 실감한 울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애통의 복은 이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돌아 보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눈길을 발견했고, 그 유학생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이 관통하는 것을 느꼈듯이,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간 죄인의 가난한 심령에 예수님의 영이 채워지면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내팽개쳐진 혼자만의 존재가 아니다는 은혜를 맛보고 감격에 겨워 우는 울음이기도 하다. 사단이 차지했던 더럽고 추한 내면의 가장 깊숙한 방을 눈물로 씻어내고 또 씻어내는 작업이 바로 애통이다.  

그러나 애통의 복에는 마지막, 어쩌면 가장 큰 은혜의 측면이 따로 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고 했다. 예수 믿었다고 항상 형통하고 기쁨이 넘친다는 말이 아니다. 당신의 영으로 채워지지 않은 인간은 누구라도 언제든지 목마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로 나아가 당신의 영으로 채워야 그 목마름이 해소되며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신자 시절의 자기와 똑 같이 아직도 이 영원한 진리를 알지 못해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비방하며, 세상과 사단을 따라 자기 욕심대로 행동하는 다른 영혼을 볼 때에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 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현실적 형편에서 신자보다 낫고 못하고는 전혀 상관 없다. 신자 속에 이미 임재해 있는 예수님의 영으로 그런 자들을 바라 볼 때에 자기도 모르게 신자의 영이 눌리고 탄식하며 애통하게 된다.  

인간의 겪는 모든 고통과 환난의 뿌리가 무엇인지 아는가? 어떤 인간도 진정한 사랑의 관계에 단 한번도 들어간 적이 없고 철저하게 혼자인줄 알면서도 혼자가 아닌 것처럼, 남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는 양 가장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가장 갈급해 하면서도 사단에 속아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거짓 사랑이라도 얻어보려고 시간과 경비를 허비하기 때문이다. 원죄 하에 있어 예수의 영이 없는 자연인들끼리는 아무리 사랑하려 해야 참 사랑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들은 단 한번도 자기들의 심렴이 얼마나 가난한지 깨달아 본 적이 없으며 그래서 그 사실이 얼마나 애통한지 울어 본 적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단순히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정도로는 팔복에 들어갈 수 없다. 자칫 도덕적 겸손밖에 되지 못한다. 반드시 그 심령이 절대적 가난의 상태로 부숴져야 하고 또 그것이 너무나도 큰 아픔이 되어야 한다. 부모나 자식을 잃은 것 보다 더 큰 슬픔, 아니 그것과도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슬픔 중의 슬픔이 되어야 한다. 부모를 잃더라도 예수님을 몰랐던 것이 더 애통해져야 한다. 세상 모든 것 부모와 자식까지 포함해 다 잃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면 바로 그 순간이 지옥임을 알아야 한다.

심령이 절대적 가난으로 내려가면 자연적으로 애통하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의 영도 충만하게 채워지기 때문에 그 울음은 동시에 하나님을 발견한 환희의 울음이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일대일로 만난 자는 자기 심령에서부터 반드시 통곡이 터져 나오지만 절대적 가난과 절대적인 기쁨이 순간순간 교차한다. 그리고 회심할 때의 그런 일회적인 애통의 단계가 지나면, 즉 구원 이후의 신자가 평생을 사는 동안에는 다른 미혹된 영혼을 보면 언제나 애통해진다. 이것이 바로 애통의 복이다. 당신은 진정으로 애통해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박용대

2010.04.16 10:39:32
*.173.33.151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이죠. 물론 저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한 명이구요. 정말로 주님만을 바라본다면 그것이 행복인데 아직 세상적인 것을 사모합니다. 그래야 도전이 생길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하지만 그것은 핑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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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죽기보다 싫은 것은? [1] 운영자 2005-04-24 4226
3 가난에도 두 종류가 있다. [4] 운영자 2005-04-15 4679
2 암이 낫는 것은 복도 아니다 [3] 운영자 2005-04-02 3524
1 인간은 과연 간사한가? [2] 운영자 2005-03-15 4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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