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31) 팔복강화(5)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여자들의 화려한 변신
가정 사역을 전문으로 하시는 한 장로님이 이런 비유를 했다. 여자는 10대에는 단장만 하면 된다고 한다. 이 때 ‘단’은 화장한다는 붉을 ‘단’(丹)이 아니라 홀로 ‘단(單)’을 사용한 단장(單粧)이다. 건강미가 넘치고 피부도 탱탱하므로 입술 연지만 살짝 바르거나 예쁜 머리 핀만 하나 꽂아도 예쁘다는 뜻이다. 그러나 20대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는 부분만 가꾸는 ‘치장(治粧)’을, 30대에는 본격적으로 찍어 바르는 ‘화장(化粧)’을, 40대에는 연극 배우처럼 떡을 칠하는 ‘분장(扮裝)’을, 50대에는 칼로 긁어도 안 벗겨지는 ‘무장(武裝)’을, 60대에는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로 바꾸는 ‘변장(變裝)’을 해야 한다는 조크를 했다.
비록 여자의 얼굴 화장으로 비유했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에 남자들에게 적용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자들도 자기 동년배와 아파트 평수, 골프나 해외여행 같은 취미 활동, 벤즈 같은 수입 자동차, 로타리 크럽 같은 사교 모임 등에 뒤 쳐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남녀 공히 나이가 들수록 외면적으로 치장해 자기의 진짜 실체를 감추려 든다. 남들이 자기를 제대로 알아봐 주고 대우해 주도록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한다.
성경의 한 인물에게서는 이와 정반대의 경우를 발견한다. 그것도 신약 성경 27권 중 13권이나 저술하여 기독교 역사상 예수님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인 사도 바울이 그렇다. 서신서를 통해 그가 나이가 들어가매 자기를 소개하는 것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살펴보자.
“사람들에게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1:1) 본서는 그의 사역 초기에 쓴 것으로 사도라고 했다. 사도란 초대교회 당시로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고 가르침을 받은 제자 가운데 가장 높은 직임이다. 물론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 때문이었다는 것이 근본적인 뜻이지만 은연중에 본인의 권위를 앞세운 감이 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15:9) 사역 중기 에베소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 본서에서는 사도 중에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베드로도 성경을 2권 밖에 저술하지 못했는데 13권이나 지은 그가 사도 직책에 도저히 어울리지 못한 자라고 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8) 사역 말기에 와선 사도는커녕 평신도 중에서도 가장 못난 자라고 한다. 그러다 마지막 처형을 당하기 직전에 저술한 디모데 전서에선 어떻게 표현했는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가장 위대한 사도가 죄인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의 자리에까지 내려 왔다.
같이 예수를 믿어 성도라 부름 받는 우리로선 언뜻 이해가 안 되기도 한다. 오히려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에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누구나 처절하게 깨닫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게 되면 차츰 이전의 나쁜 습관을 고치고 죄 된 품성을 깨끗이 고쳐가며 기도와 구제와 선행에 열심을 내기 때문에 비록 완전하지는 못해도 이전보다는 많이 선해졌다는 인식은 한다. 그런데도 바울은 죽기 직전에 오히려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다. 그럼 흔히들 말하는 대로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 겸손을 표시한 것일까? 아니면 이제 곧 하나님을 대면할 테니까 죄인임을 과장이 좀 섞인 고백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인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객관적 위대한 사도와 주관적 죄인의 괴수
바울은 잘 아는 대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빛 가운데 대면했고 천국의 삼층천까지 직접 갔다 오는 영적체험도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기독교 진리 체계를 확립한 자로 객관적으로는 누가 평가해도 사도 중의 최고였다. 그러나 그의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은 본인의 실제적이고도 주관적인 인식 하에 이뤄진 것이다. 표현 그대로 너무나 큰 죄인에서 하나도 과하지 않고 덜하지도 않은 철저한 자각이 있었다.
그는 분명 예수를 만난 후에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영적 체험을 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러나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7:15), 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2,23)라고 실토했듯이 그에게는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갈수록 그 죄가 없어져야 함에도 여전히 그렇지 않음을 확신했기에 절대 겉으로만 가장된 겸손이 아니었다.
그로선 예수님을 알아가면 갈수록, 그분의 은혜에 잠기면 잠길수록, 남들 앞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들어내면 낼수록, 하늘의 본향의 면류관을 소망하며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가면 갈수록 자신은 도저히 그런 일을 감당할 만큼 의롭고 선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무능하고 어리석으며 더럽고 추하더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마치 로우(Low) 싱글 핸디의 골프 강사는 그 자격을 딴 후 얼마 동안은 주위 사람들 앞에 마음껏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아주 어려운 코스에서 프로 선수들과 한 게임을 해 완전히 창피를 당했다면 밤새워 끙끙 앓으며 “나는 아직 골프의 ‘골’자도 모르는구나!”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지 않겠는가? 이 경우는 절대 겸손이 아니다. 실력은 다른 사람에 비해 월등하고 골프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다. 그럼에도 아직 골프를 시작한 것조차 아니라고 한탄한 까닭은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와 지향점을 최고의 수준에 두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거짓말을 하거나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돈을 떼먹었거나 더러운 쾌락에 빠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당시로선 그 만한 의인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직 예수를 닮고자 하는 것에,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합당한 사도가 되는 것에 목표를 두었기에 여전히 죄인 중의 괴수요 아직 하나님의 ‘하’자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탄식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의로운가의 기준을 주위 사람들에게 둔다. 나는 그래도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안주한다. 그렇지만 그들도 나이가 들수록 자기의 실체가 얼마나 음흉스럽고 사기와 궤휼의 단수가 점점 높아 가는지 알며 자기 속의 죄성을 스스로도 통제 할 수 없음을 절감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절대로 그 기준을 하나님보다는 문자 그대로 ‘세상’에 둔다. 남과 비교해 크게 뒤쳐지지 않고 또 몇 가지 앞선 점이 있다고 세상 사람이 조금이라도 알아주면 마치 자기가 세상의 최고 의인인양 착각하고 산다. 당연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산다고 큰 소리 친다. 그러나 그 하늘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드물지만 불신자 가운데도 정작 하늘에 대해 심각하게 갈등해 본 자는 절대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 않는다. 겁이 나서 뿐만 아니라 정작 절대자의 면전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니더라도, 자기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비춰 볼 줄 알았다면 자신이 없어서도 하지 못한다. 성전에 기도하러 왔던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가슴만 쥐어뜯을 수 밖에 없다.
주님 닮기를 진정으로 원하는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신자들이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심령이 가난해져 정말 주님을 더 깊이 알고 닮아가는 삶을 살고자 결심하고 실천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정한 것과 실제 삶에서 반영되는 모습은 전혀 별개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다. 단순히 신자니까 죄를 안 짓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일반론으로 따져선 안 된다. 신자 각자가 스스로 정한 목표가 구체적으로 있어서 실제로 그렇게 살려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그 기준과 목표에서 얼마나 가까운지 아니면 아직도 먼지 모른다. 쉽게 말해 수학 공부 하면서 미적분까지 떼기로 목표 했을 때만 아직은 일차 방정식의 수준에 있으며 앞으로 더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반면에 미적분이라는 목표가 없고 또 그것을 향해 한 단계씩 공부를 하고 있지 않으면서 단순히 수학을 잘해야지 하면 이차 삼차 방정식을 순서대로 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할 필요를 크게 못 느낀다. 어쩌다 이차방정식의 해법이라도 터득하게 되면 자기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줄 착각하게 되는 것과 같다.
바울은 회심한 이후로 전 평생에 걸쳐 오직 한 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로마 카타콤의 지하 감옥에서 사형 날자를 통보 받고서도 마찬가지였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1,12) 그래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을”(딤후4:6) 그 때에도 여전히 이 서신의 수신자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고 권면했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그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빛에 가까이 갈수록 자신의 부족한 모습이 이전보다 더 세밀하게 그 티끌 같은 자국마저 드러남을 보고 너무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주여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이 괴수라는 표현이 절대 신자, 특별히 사도로서 모범을 보이고자 하는 겸손이 아니었다. 또 그렇게 해야만 불신자에게 더 복음이 잘 전해지리라 기대한 것도 아니다. 여전히 인격이 성숙되지 않았고 모든 면에 경건하지 못하며 그 영성은 목표로 삼았던 주님에 비해 너무나 형편 없다는 진짜 솔직하고도 생생한 토로였다.
신자는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이 내주하게 되고 그러면 심령이 산산 조각이 나며 자신의 도덕성이 완전히 무너져내리고 지금껏 하나님 없이 살았던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가를 절감하여 애통하는 울음이 터져 나온다. 그 울음은 동시에 새 빛 아래 들어온 감격으로 인한 기쁨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애통하는 울음은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팔복은 영적성장을 나타낸다. 매일매일의 신앙 생활 가운데 애통해야 한다. 혈육을 잃은 슬픔보다도 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겪어야 한다. 바울은 틀림 없이 날이 갈수록 눈물이 헤픈 사람이었을 것이다. 신자가 진실로 주님의 빛 가운데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부족함, 무능함, 연약함, 더러움이 더 샅샅이 보여지므로 날마다 “저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고 가슴을 찢게 된다.
결국 실패하는 성화의 삶
우리 모두 솔직히 자신에게 물어보자. 매일 우는가? 뼈를 깎고 골수가 마르는 심령의 피폐함을 절감해서 침상을 눈물로 적시는가? 아니 예수를 믿으면 형통하고 즐거워야 하는데 거꾸로 울어야 한다니까 이상한가? 그럼 바울이 그렇게 주님을 닮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모든 수고는 실패로 끝났다는 말인가?
그렇다. 죄를 짓지 않고 예수님을 닮아 이 땅에서 거룩해지는 성화에선 단 한명도 이 땅에서 성공할 수 없다. 모두 실패로 끝나며 천국에서야 완성된다.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우리가 현재 어떤 모습에 있던 심지어 죄악 중에 있던 나아가 앞으로 지을 죄 중에서도 용서해 주신다. 다른 종교에 비해 어떤 면에서 땡 잡은 것이다. 그러나 참 신자라면 그 불완전함이 자기 심령을 비수처럼 찔러 자기도 모르게 애통하게 된다. 나는 교회 십년 다녔는데도 그렇지 않던데 어떻게 신자라면 자동적으로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의심이 드는가?
사람이 애통하고 슬퍼하려면 부모가 죽었던지 실연을 당했던지 가정에 문제가 있든지 반드시 그 슬픔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지금 팔복의 두 번째 단계로 애통해 하는 자를 두고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따지고 보면 “너는 믿은 후에 과연 애통해 하는가? 지금 슬퍼하는 대상이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과 같다. 그냥 덤덤하게 사느라 아니면 내 코가 석자라 도저히 슬플 겨를도 없어 그런 일이 꼭 있어야 하는지 생각도 못해 보았는가?
원어적으로 본문의 애통은 슬픔 중의 가장 큰 슬픔이다. 가장 큰 슬픔이란 그 슬픔을 유발하는 대상이 내게 지금 없기 때문에 그 부재(不在)가 가장 아쉽고 괴롭고 미치고 힘들고 아프고 안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옛날 데이트 했던 시절을 생각해 보라. 실연을 당해 사랑하는 연인을 두 번 다시 못 보게 되었을 때 밤잠을 못자고 슬픔에 겨워 미칠 것 같지 않았던가? 진짜 골수가 마르고 뼈가 어그러지는 것 같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현재 자기한테 없어서 최고로 아쉽고 정말 안타깝고 날이 갈수록 더 갖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솔직히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무엇이겠는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안 풀리고 자꾸 꼬이는 것, 병이 들어 힘들어 하는 것, 남에게 싫은 소리 들은 것, 내일 모레 당장 돈이 얼마만큼 필요한데 은행 잔고는 적자가 나 있는 것, 자식이 기대대로 자라지 않고 자꾸 어긋난 길로 가는 것,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픈 것들 아닌가? 반면에 바울은 무엇을 가장 괴로워했는가? 자기 속에 있는 죄의 법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데 자꾸 방해하는 것 때문에 자기를 ‘오호라 곤고한 자, 사망의 몸’이라고 슬퍼하지 않았는가?(롬7:24)
나아가 과연 우리는 그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다”(롬9:3) 하면서 자기는 죽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이스라엘 자기 민족의 구원을 가장 절실한 문제로 삼았던 것처럼 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그래서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禍)가 있을 것임이라”(고전9:16) 할 정도로 믿지 않는 영혼들의 구원을 갈망하는가? 또 40에 감한 매를 다섯번이나 맞고 세 번 태장에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여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내는 등의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난을 수없이 겪어도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고후11:28)인가? 그래서 혹시라도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11:29)라고 애통해 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팔복은 어떤 목회자가 말하는 식의 삼박자 축복론 같은 현실의 형통에 관해선 전혀 말씀하지 않았다. 예수 잘 믿으면 하늘에서 복이 쏟아져 내린다고 하지 않았다. 첫번째 복에 해당하는 심령이 가난해진 적이 한 번도 없고 하나님 앞에 눈물 콧물 흘리며 뒹굴어 본 적도 없으면서 기도하면 병이 낫고 무엇이든 소원하는 것 이룰 수 있고 세상에서도 앞서 나갈 수 있다고 하는 법은 성경에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바울이 말하는 애통의 단계로는 더더욱 넘어갈 수 없고 아예 그런 애통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신자라면 최소한 내 신앙이 지금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느 정도인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중에 어떤 복을 누리고 있는지라도 심각하게 갈등해 보아야 한다.
당신의 신앙 생활의 목표는 어디에 두는가?
신앙 생활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세상이며 그것을 점검하는 기준이 성경 밖에 있다면 노력하는 내용도 자연히 달라지고 애통해 하는 대상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라도 내가 어느 것을 가장 부러워하며 어떤 일에 의미와 가치를 두며 그래서 그것을 어떤 기준으로 달성할 것인가 정해 놓고 살아가게 마련이며, 그것이 이뤄지지 않고 도리어 멀어진다면 당연히 안타깝고 애통해지는 법이다.
예수 믿어서 병을 고치겠다고 작정한 자는 40일간 기도원까지 갔다 왔는데 왜 이 병이 안 고쳐지는지 의심하며, 경제적 풍요를 이루겠다면 새벽 기도 때마다 쥐꼬리 같은 수입을 두 배로 해달라고 부르짖게 되며, 죄 안 짓고 착하게 사는 것이 목표면 집사가 사기 친다고 시험 들어 교회를 멀리하게 된다. 심지어 그 목표를 새벽 기도, 제자 훈련, 금식, 전도 등에 두는 사람은 나는 왜 이런 훈련에 자꾸 게을러지는가 만 따져서 신앙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
예수님은 그런 것으로 신앙의 목표로 삼으라고 한 적이 없다. 당신을 닮는다고 해서 흠 잡을 곳 하나 없이 완벽한 자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요, 형제를 ‘라가’라 욕해도 살인한 것으로 보는 주님의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자는 우리 가운데 단 한명도 없다. 또 우리가 평생을 두고라도 노력하다 보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면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도 없었다.
주님을 닮아가는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면 갈수록 바울 같이 자기 인생의 목표와 가치가 오직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으로 바뀌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가장 애통해 하는 대상이 믿기 전과는 달라진다.
그래서 지금 당장 이 힘든 일들을 없애달라고 울며 부르짖는 대신에 하나님의 일과 십자가 복음이 자기 인생을 통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것을 더 애통하게 된다. 물론 힘든 일에서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그럴 때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올바로 되어지길 소원하고 내 영혼 속에 그 분의 위로와 간섭하심을 더 갈급해 한다. 수십 년간 교회 다녀도 자신에게 성령이 충만한 은혜로 임재해 있지 않는 것을 가장 애통해 하지 않는다면 헛 다닌 것이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채 그저 무덤덤하게 신앙 생활의 분명한 목표와 기준이 없이 단지 죄만 안 짓고 교회 봉사에 게으르지 않으면 된다는 식은 기독교에선 없다. 신자가 애통한 적이 없다면 신자가 아니던지 성화가 100% 완성되었던지 둘 중에 하나일 뿐이다.
최대한 양보해서 우리 전부가 바울 같은 수준까지 도달하는 것은 무리라 치자. 그 정도의 핍박과 박해를 꿋꿋하게 이겨내는 자 그리 많지 않다. 또 형제의 구원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고 항상 교회를 위해 믿지 않는 영혼을 위해 심령에 눌림을 안 받아도 된다. 나아가 그처럼 땅끝까지 복음을 들고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최소한도 신자는 자신의 문제 만큼은 애통해 해야 한다. 어떤 문제 말인가?
“내가 또 현실의 당장 힘든 것에만 매달려 애통해 하고 있구나. 지금까지도 수 없이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어도 그때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 은혜로 결국은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셨다는 사실을 또 잊었구나.”를 가지고 애통해야 한다. “그런 하나님이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독수리 날개처럼 나를 보살피시는데 왜 또 염려했던가? 하나님을 묵상하기 보다 세상과 사람의 눈치를 보았구나. 하나님의 뜻은 인생으로 근심케 하는 것이 아니며 심판 대신 구원임을 왜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잊어버리는가? 하나님이 나를 예수님을 통해 구원해 주셨을 때는 분명한 계획과 목적이 있어 그 영광을 향해 나를 지금도 이 환난을 통해 이끌고 계신다는 믿음은 어디 갔는가? 그분의 전지전능하심, 약속, 자비, 긍휼을 바라보기는커녕 최소한도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요 영원히 내편이며 살아 계신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구나.” 바로 이런 자신의 믿음의 수준이 얼마나 가난한지 그것을 애통하고 안타까워 해야 한다.
모두가 죄인 중의 괴수인 신자
바울이 죽기 직전에 죄인 중에 괴수라고 밝힌 것이 나이 들수록 술수가 늘어 음흉스러워졌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함에 하루하루를 온전히 바치다 보니 그 은혜의 양이 무궁무진해 도저히 측량할 수 없고 상상조차 못할 정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는 더욱 왜소하게 느껴지고 천국 문에 가까워질수록 더럽고 추한 모습은 하나 감춤 없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나 같은 죄인에게 하나님은 왜 이렇게도 많은 은혜를 베푸시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자신의 능력, 조건, 자격은 단 하나도 내세울 것 없더라는 진실된 고백이다.
간단하게 그가 파선 당한 일만 한 번 생각해보라. 첫번 파선되었을 때는 그도 우리와 다름 없이 죽기 살기로 기도했을 것이다. 바울이 처음부터 신앙심이 신실해서 내가 죽어 지옥 가더라도 형제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할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이번만 살려 주시면 더욱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겠다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래서 구원 받고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성전에 감사의 결례까지 바쳤을지 모른다.
두 번째는 물론 열심히 기도는 했겠지만 이미 한번의 기적을 경험했던 그로선 “아마도 이번에도 살려 주시겠지”와 “하나님이라도 두 번이나 살려 주시겠나 이번에 죽으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천국 가야지” 사이에서 반신반의했을 수 있다. 그러다 세 번째는 이젠 나도 꼼짝 없이 죽는가 보다 이것으로 끝이다라고 거의 체념했을 것이다. 성경기록에 따르면 세 번째는 일 주야를 파도 속에 있었다고 했으니 분명 그랬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다시 살려 주셨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감사보다 두려움, 공포가 아닌 경외함으로 인한 떨림이 전신에 소름처럼 솟아났지 않겠는가? “주여! 주님 앞에 저는 완전히 엎드립니다.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제가 지금껏 갖고 있던 신앙 지식은 휴지 조각에 불과하며, 더더구나 은혜에 대해선 단 하나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지 않겠는가? 다메섹 도상의 회심 사건 이후로 그는 이런 비슷한 일을 수도 없이 겪었다. 그 모든 은혜를 다 체험하고 난 후에 과연 그가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외의 무슨 말로 하나님 앞에 나가 고할 수 있겠는가?
그가 아무리 사도 중의 으뜸이고 인류 역사상 그만큼 바른 신앙을 가진 자 없었다 해도, 미약하고 불완전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인 그로선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 계산도 측량도 할 수 없다. 평생을 두고 주님과 동행한 그도 그렇다면 우리 같은 존재야 두말하면 무엇하겠는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 사역자라도 하나님 존전에 바로 설 수 있는 자 아무도 없으며, 감히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 목표라고 큰 소리칠 수조차 없다.
신자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단 한가지 진실은 이것이다. “내가 이 땅에 존재하고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는 오직 내 모습이 어떠하든지 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아래와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것 하나 뿐입니다.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주님이 저를 외면하지 않는 것 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이것 외에는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심지어 신앙에 관해 말하는 것조차 저에 관한 이야기일 수 없습니다.”
바울이 자신은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도 부족한 자라고 고백한 후에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며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우리에게 이 고백이 없다면 아직 예수님과 그 분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요 애통의 복을 누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절대로 죄를 덜 짓는 싸움에 그쳐선 안 된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오직 신자의 전 존재와 삶과 인생의 기대를 하나님 외의 것에 두었던 것을 매일매일 하나씩 부셔 나가는 싸움이다. 따라서 세상의 기준과 가치로 따져선 갈수록 그 모습이 후패되어야지 형통으로 갈 수는 절대 없다. 반면에 그와 반비례 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과 능력과 은혜가 얼마나 크며 또 소중하고 고귀한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께만 오직 소망을 두는 것이다. 혹시 자신의 실수로라도 십자가 은혜 밖에 있음을 알게 되면 그 인생에 아무런 빛이 없고 흑암 뿐임을 절감하는 것이다.
지금 당신에게 없어서 가장 아쉽고 괴로운 것이 정말 솔직하게 무엇인가? 돈, 집, 차, 건강, 학식, 사람의 칭찬, 자식의 재롱, 아내의 아양, 직장에서 승진, 노후대책, 등인가?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문제에 대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것이다. 당신이 신앙을 완전히 포기하거나 죽음 직전에까지 가 있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라도 무한정 응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가장 소망할 때 그래서 하나님과의 비뚤어진 관계를 진정으로 당신의 죽음보다 더 애통해 할 때까지 만은 그렇다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진실로 무엇을 애통해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