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32) 팔복강화(6)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교회 출석하는 이유
예수를 믿어 기독교 신앙을 갖는 근본 목적은 현실적인 형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특별히 이민 교회의 경우 직장이나 가게에서 언어와 문화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며 가정은 가정대로 갈등이 끊이지 않고 교회 안에서마저 인간관계에 상처를 받아 솔직히 참 평안을 누리는 자가 극히 드물다. 거의 매일 밤 침상을 눈물로 적시며 골수가 마르는 안타까움으로 지새는 분도 상당히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가 교회에 출석하는 가장 일차적인 이유는 사실상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애통할 때 위로를 받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에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분명히 보장하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1-13) 예수님도 산상수훈의 이어지는 말씀에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7-11)라고 약속하셨다.
그럼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 볼 질문은 열심히 기도했더니 그때마다 정말 위로를 받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이다. 아니면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고 평안이 없을 뿐 아니라 마음 한구석에 계속해서 불안이 살아 있는가? 현재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경기가 좋지 않으며 갈수록 경쟁이 극심해져 살기가 빠듯해 신자라도 그럴 수는 있다. 그렇지만 신자가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물질적 풍요까지는 안 바라더라도 어려움이 닥치면 최소한 정신적, 영적인 평강은 유지해야 하지 않는가?
불안 염려를 없애려 찬양하고 기도하는데도 그렇게 되지 않은 까닭은 신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에 대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정신적 상처든 현실적 고난이든 기도한 후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야만 겨우 위로를 얻는다. 그 응답도 항상 질적으로 좋고 양적으로 풍성해야 된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은 신자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같은 일을 불신자가 수행할 때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편하고, 더 신나야 한다. 흥부 대박이 터지듯 단숨에 번쩍하고 화끈하게 끝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자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항상 초과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다.
초과(超過)는 반드시 미리 정해 놓은 목표치가 있고 그것을 질적 양적으로 넘어야 한다. 신자가 소원하며 기도하는 내용 대로 이뤄지되 더 크고 더 좋은 것이 초과다. 월 수입이 현재 이천 불인데 제발 삼천 불은 되어야 형편이 좀 풀릴 텐데라고 기도했다면 오천이나 만 불이 되어야 초과다. 물론 삼천일, 삼천이 불도 당연히 초과이지만 십만 아니 백만 불이 되어도 여전히 초과이지 초월은 아니다. 초월(超越)은 신자가 예상, 기대, 작정, 서원해 놓은 한계나 범위와는 전혀 무관한 영역서 엉뚱한 방향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스펄전의 회심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일종의 영적인 천재였다. 인간이 날 때부터 영적으로 천재인 자는 없지만 현실에서 행하는 모습을 보아 그렇게 표현해도 될 정도라는 뜻이다. 대대로 목사 집안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온갖 신앙서적을 섭렵했고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평생에 백번 이상 독파했다. 14살에 이미 로마 카토릭의 교황 제도에 대한 비리를 폭로하는 책을 저술 했을 정도다.
그러나 15살이 넘자 차츰 자신이 너무나 죄인임을 깊이 깨닫기 시작했다. 물론 남이 이 소년을 볼 때 비난할 소지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장엄하심 앞에 자신이야말로 죄악 투성이로 너무나 가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다. 점차 자기 비하와 학대의 기가 막힌 웅덩이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감을 절감하면서 그 반작용으로 더 이상 나쁜 죄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쓰면 쓸수록 자기 속에 죄악이 충족해져 그 구렁텅이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가 없었다. 선행과 구제로 그 죄를 상쇄하려 시도해 보아도 마음에 평강과 위로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주일날 폭설이 내려 출석하던 교회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이름도 없는 작은 교회에 예배 드리러 갔다. 마침 그 교회 목사님도 교통이 막혀 나오지 못하고 열명 남짓 모인 가운데 평신도 대표가 예배를 인도했다. 갑자기 설교하게 된 그 신자는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사 45:22)는 말씀을 읽고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를 바라 보시오, 예수를 바라 보시오, 예수를 바라보시오….”라고 큰 소리로 반복해서 외치기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스펄전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 동안 죄책감으로 가득 차서 절망의 구렁텅이를 헤매고 다녔던 자기 심령이 하나님께 건져 올림을 받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살아 계시고 지금 나에게 임재하셔서 정말 죄로 가득찬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이 당신만의 무한하신 긍휼로 주홍같이 붉었던 자기의 죄를 깨끗이 씻어내고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신자를 위해 계획하신 일은 천기까지 변화시켜서 이루신다. 그날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전까지의 스펄전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아무리 여러 모로 추측해보아도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의심으로 가득 찼을 것 같다. 틀림 없이 본 교회에 가지 못한 불만이 당장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날 유명한 부흥 강사님의 집회가 있거나 담임 목사와 상담 약속을 했을 수도 있다. 더 이상 자신의 죄를 씻어 볼 수단이 없는 절망의 벼랑 끝에서 그날 마지막으로 교회를 출석해보고 도저히 해결책이 안 보이면 믿음마저 포기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필 오늘 같은 날에 폭설이 내려 이름도 없는 이 작은 교회에서 어쩔 수 없이 예배는 드리겠지만 내가 이제부터 타락해도 내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 잘못입니다라고 불평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을 지키려는 성의를 봐서라도 은혜로운 예배가 되어야 할 텐데, 왜 개척교회에 그것도 담임 목사가 아니라 장로인지 집사인지 모르지만 설교는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성경 읽고는 고함만 지르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성경이나 신학적 지식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한 평신도를 통해 이 영적인 천재의 심령을 산산조각 내고 그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역사를 일으켰다. 단순히 “예수를 바라보시오!”라는 한 마디 말로 말이다. 스펄전으로선 꿈도 꾸지 못했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찼을 때에 오히려 생전 처음으로 그분께 완전히 항복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그의 기대와 예상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타난 초월이었지 초과가 아니었다.
닭살 돋는 경험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일하시는 모습을 신자의 입장에서 한 마디로 알기 쉽게 표현하면 소름이 끼치면서 닭살이 돋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신자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너무나 신비하고 오묘하며 경이롭기 때문이다. 이 일은 도저히 세상과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사방이 꽉 막힌 여건에서 내 힘으로는 절대 이뤄낼 수 없으며 우연의 일치로도 생길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마이너스 무한대의 절망에서 플러스 무한대의 소망으로 눈깜짝할 새 바뀐다. 영원의 이쪽 끝에서 영원의 저쪽 끝으로 순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분은 무한하신 하나님 한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은 절대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철저하고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제 삼자가 힌트를 주거나 구태여 깨우쳐 줄 필요도 없다. 너무나 확실하고도 거룩하신 그분의 권능 앞에 완전히 항복하여 무릎 꿇고 경배드릴 수 밖에 없다. 또 그 자비와 긍휼하신 위로가 너무나 풍성하기에 찬양과 감사의 반응 외는 보일 수가 없다.
바울 사도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나게 하려 하심이라”(엡3:8)고 고백했다. 이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당부하기를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8,19절)고 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신자가 쉽게 측정 가능하니까 신자더러 재어 보라는 당부가 아니다. 물론 질적 양적으로도 너무나 풍성할 때도 있지만 그에 앞서 초월적이라 오히려 측정 불가능 함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을 감히 인간이 어떻게 잴 수 있겠는가? 인간으로선 단지 그분의 사랑이 자신에게 충만하게 채워지기만 간구하고, 또 채워지고 난 후에는 그 넓이, 길이, 높이, 깊이가 도저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초과는 어쨌든 측정이 가능하다. 아무리 큰 숫자라도 논리적으로 계산할 수 있으며 심지어 무한대라는 수치도 수학 공식에 등장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무한대조차 초과하는 초월이기에 아예 측정조차 불가능하다. 측정이 불가능한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한두 살 난 어린아이가 미적분은 커녕 구구셈도 상상을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아가 상상을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를 도저히 인간의 의지로는 막을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일단 간섭하기 시작하면 방조제가 터진 것처럼 물밀듯이 밀고 들어와 그저 채워질 뿐이다. 인간의 의지로 대충 은혜를 받고 치우거나, 심지어 감히 제 같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식의 겸손을 떠는 것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평소 때 세상과 사람 앞에선 그렇게 위세 등등하던 체면, 위신, 자존심 따위는 완전히 휴지조각처럼 구겨져 ‘찍’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심령 가득 채워진 당신의 충만함으로 인해 기쁘면서도 울음이 나오고, 울면서도 즐겁기 그지 없다. 그분의 위대하심에 대한 감격의 울음이자 내 자신의 너무나 가난함에 대한 울음이다. 동시에 그런 나를 영원하신 절대자께서 찾아오셨고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신다는 것에 대해 이전과는 달리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귀해 기쁨이 넘쳐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신자에게 예수 믿는 자들이 방정맞은 광신자요 울다가 웃는 정신병자로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반면에 신자 자신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화려한 수사(修辭)가 필요 없고 그저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만 연발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은혜의 강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이다. 그 순간 신자에게는 세상의 어떤 염려 불안도 없어지며 자신의 전 존재를 주님께 의탁하게 된다.
초과는 신자의 몫이다.
혹시라도 그런 닭살이 돋는 것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처음 예수 믿을 때 영적으로만 체험했지 그 이후 현실의 삶에선 별로 겪은 기억이 없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할 때만 은혜를 주고 다른 때는 은혜를 주지 않는가? 아니면 죄에서 꼭 구원을 해야 하니까 더 큰 은혜를 주고 구원했으니 은혜를 아주 드물게 주거나 약하게 주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게 충만하다. 인간의 눈에 아무리 작아 보이는 현실의 문제에도 예외는 전혀 없다.
페인트 업을 하는 젊은 교포 신자 한 분이 이런 간증을 했었다. 그분은 이빨이 아주 좋지 않아 부드러운 음식도 가위로 잘라 먹어야 할 정도였다. 거의 모든 이빨이 못쓰게 되었고 계속 놓아두면 잇몸이 다 내려앉을 판이었지만 알다시피 미국의 이빨 치료비는 엄청나게 비싸고 사업에 바빠 도저히 치과에 갈 엄두도 못 내고 한 마디로 거의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한 치과병원이 내부 페인트를 다시 하기위해 이분을 불러 견적을 받았다. 약 2,500불 정도의 견적이 나왔는데 예정에도 없던 요구를 하나 더 추가해 그 값에 해 달라고 했다. 말하자면 구두쇠 고객에게 걸려 손해 보며 해주어야 할 판이었다. 마침 누구 아는 사람이 소개한 일이라 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 그대로 수락했었다. 그런데 우연히 이분의 이빨 상태를 보게 된 의사가 불쌍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자기가 치료를 전부 책임져 줄 테니까 페인트 비용은 받지 말라고 요청했다. 또 시간 나는 대로 언제든지 오면 치료해 주겠다고 했다. 이전에 여러 치과에서 치료비를 알아 봤을 때 최소한 35,000불의 견적이 나왔는데 페인트 작업 2,500불 그것도 실제 경비를 계산하면 약 1500불과 맞바꾼 셈이 되었다.
그러나 35,000불의 치료를 1,500불에 할 수 있게 됐다고 해서 금액으로 따질 문제가 결코 아닌 것이 디스카운트를 많이 해 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공짜로 해 준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초과 달성 시킨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간섭을 하신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신자가 하나님께 공짜로 치료해 주는 치과 의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고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실제로 이 분도 치료할 수 있는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정직하고 실력 있는 의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뿐인데 이렇게 응답해 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는 자기가 꼭 필요한 것을 정해 놓고 자기 힘으로 감당 못하는 초과치만 하나님이 대신 해 주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초과는 하나님의 몫이 아니라 사실은 신자의 책임이다. 하나님은 이미 신자에게 생업을 허락해주셨기에 신자는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하여 그 치료 비용을 모아야 한다. 또 그럴 수 있는 은사와 재능과 건강과 여건도 다 마련해주신다. 나아가 그런 질병이 생기기 전에 자신의 육신을 아름답고 강건하게 가꾸어야 한다. 하나님은 초과의 하나님이 아니라 초월의 하나님이다. 치료비 35,000불과 전혀 상관 없이 심지어 거꾸로 금액상으로 그것 이상 손해가 나더라도 당신께서 고쳐주시고자 원하시면 당신만의 때와 방법으로 반드시 고쳐 주신다. 그리고 그 혹시 금전적으로 손해난 것도 나중에 반드시 다른 것으로 더 이상 보충해 주신다.
초과만 바라는 신앙
초과의 하나님만 바라는 신자는 자기의 목표치와 기대치 달성에만 관심을 둔다. 그래서 처음부터 자신의 능력에 버거울 정도의 범위를 정해야만 하나님께 간구할 체면이 서는 것 같고 또 마치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인양 착각까지 한다. 그래서 자신의 계획을 하나님의 수준에 맞추어 크게 잡아 기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속마음에 혹시라도 그에 조금 못 미쳐서 응답되더라도 자신만은 손해 안 보려는 얄팍한 계산이 포함되어 있지나 않을까? 아니면 그 반대로 겉으로는 겸손하게 조금 달라고 기도하면서 속으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왕창 주시면 더 좋은데 은근히 초과를 꿈꾸지는 않는가?
신자가 초과를 기대할수록 그 신앙에 사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신자에게 위로도 없다. 오히려 점차 신앙이 힘을 잃는다. 하나님의 응답이 자기 기대치-여유분이나 공상한 분을 뺀 순수 필요치는 반드시 채워져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만약 만 불이 꼭 필요한데 7천불 밖에 생기지 않았다면 대뜸 어떤 생각을 갖는가?
“이 정도가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하나님은 신자가 절제하고 검소하게 살기 원하시는 분이지 않는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는데 나를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미리 막으셨나 보다.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고 했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으니 이 일에도 감사해야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더 깊은 속 마음에 만약 “하나님이 하셨으니 어쩔 수 없지 뭐! 순종하는 수밖에…”가 조금이라도 숨겨져 있다면 단지 믿는 척하는 위선이지 믿음은 결코 아니다. 잘 봐주어야 교리대로 억지로 따르는 종교 행위일 뿐이다. 하나님은 기뻐하지도 반응하지도 않는다.
신자가 지금 간구를 드리는 대상이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요 하나님이라면 그리고 만 불이 진짜 꼭 필요하다면 왜 끝까지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하는가?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모르시거나 일부러 적게 주어 신자를 골탕 먹이는 분도 아니지 않는가? 야고보 사도가 하나님은 신자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씀을 반대로 풀이하면 정욕으로 쓰려는 것 즉 신자가 미리 계산하거나 은근히 기대하는 여유분을 덧붙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주님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했으며 ‘일용(日用)할’이란 말은 반드시 꼭 필요한 것이라는 뜻이지 않는가?
물론 신자가 현실에서 너무 힘들다 보니 로토에 당첨되는 헛 꿈도 꾸고 매주 사볼 수도 있다. 꼭 죄라고 할 수 없으며 하나님도 그 일 때문에 신자를 미워하거나 징계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만큼 다급하고 어려운 신자의 사정을 잘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자에게 분명히 섭섭해 하고 실망하는 것은 따로 있다. “네가 정말 고난 가운데 있다는 것은 내가 더 잘 안다. 그러나 아직도 네가 나를 이렇게도 몰라 주느냐? 나는 초월의 하나님 아니냐? 최소한도 내가 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다는 것만은 잊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하나님은 신자가 만 불을 달라고 기도하면 그대로 주실 때도 있지만 십만 불을 빼앗아 갈 때도 많다. 하나님의 초월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작용된다. 궁극적으로는 신자에게 백만 불 이상의 효과 아니 금액으로는 도저히 측량이 안 되는 당신만의 뜻이 은혜와 위로를 동반하여 반드시 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당신의 영광을 절대 훼손 당하지 않으시며 홀로 영광을 받으신다.
신자들이 좋아하는 바울의 그 유명한 고백을 보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어떤 형편에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해서 근검 절약과 절제의 미덕을 깨우쳐 실천했다는 뜻이 아니다. 서두에 분명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만불 달라고 기도했는데 오천불 밖에 응답이 안 되었지만 그래도 감사했다는 것이 아니다. 비천에 처할 때도 있었지만 풍부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 처했든 그 일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또 그런 형편과는 전혀 상관 없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이뤄지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과 사람의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심지어 신자 자신의 기대와 믿음이 약해지더라도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너무나 신비하고 오묘한 하나님의 초월적인 간섭을 자주 체험하다 보니까 외적 여건이 풍부하든 궁핍하든 자신의 내면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그라고 해서 초인적으로 항상 담대해져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일종의 아슬아슬한 스릴을 즐기면서 산 것이다. 여전히 현실은 힘들고 고달파도 매사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신기한 방법으로 어떤 장소와 여건에서 누구를 통해 언제 이 일을 해결하시고 또 나에게 어떤 위로와 은혜를 베푸실까?” 속으로 거룩한 호기심을 품고 손에 땀을 쥐고 기다렸던 것이다.
갓난 아기 같은 신앙
갓난 아기가 울 때는 어떻게 해야 울음을 그치는가? “얼렐레 깍꿍!”하며 달래면 그치는가? 그칠 때도 있고 오히려 더 울 때도 있다. 더 울 때는 왜 그런가? 배가 고파 미치는데 코메디 프로 보고 웃을 사람이 있겠는가? 애기는 그저 달랜다고 울음을 그치는 것이 아니다. 꼭 필요한 것이 채워져야 울음을 그친다. 잠이 오는데 젖병은 소용 없고 기저귀가 젖어 있는데 장난감은 필요 없다.
많은 신자가 교회에서 하는 종교적인 활동 말고 실제로 사는 삶의 현장에서 계속 애통하는데도 그 믿음이 능력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떨어지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제자 훈련에 빠지고 죄를 많이 짓고 성경을 보지 않아서가 아니다. 아무리 새벽 기도를 40일간 뜨겁게 개근해도 자기 기도한 제목대로 응답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가 애통해 하는 내용이 갓난 아기가 보채는 수준에서 하나 나아진 것 없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어쩌면 신자라고 할 수조차 없다. 신비하신 하나님, 신묘막측하신 하나님, 초월의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지 않는다. 오직 초과달성 시킬 수 있는 하나님만 찾고 믿는다. 이방인이 구하는 하나님이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우리 대신 못 박으신 하나님이 아니다.
애통하는 자 하나님이 위로를 주신다고 했을 때 그 애통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내가 하나님을 떠나고 찾지 않았더니 내 앞에는 기가 막힌 웅덩이만 가로 막고 있습니다. 제발 제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저를 외면하지 마시고 이 갈급한 심령을 당신의 생수로 적셔주시옵소서”가 아니었는가? 신자의 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지 못해 자신이 풍부하든 궁핍하든 관계 없이 밑이 터진 웅덩이처럼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피폐함을 슬퍼하는 것이지, 열심히 기도했는데 기도대로 응답되지 않아 힘든 것이 아니다. 이미 열심히 기도했다면 그것도 정욕이 개입되지 않고 진정으로 기도했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며 따로 애통해 할 것이 사실 없다. 현실의 고난은 단지 육신적으로 불편하고 힘든 것이지 신자가 진정으로 애통해 할 문제가 아니다.
본문의 ‘위로’란 단어의 언어적인 뜻도 ‘곁에서 부른다’는 것이다. 또 ‘성령’의 헬라 원어도 마찬가지로 ‘곁에서 위로하는 자’란 뜻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잠시 비뚤어진 신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바로 곁에 임재케 해서 위로하시되 당신이 어떤 분인가를 제대로 깨닫게 해서 그 관계를 바로 잡아 주신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신자가 자기의 욕심과 계획을 내세워 40일이나 100일간 작정하여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쥐어짜듯이 기도하면 어쩔 수 없이 응답해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신자에게 주시는 그분의 위로는 신자가 더 많은 열심, 치성, 수고, 희생을 바치면 그 정성을 봐서라도 신자의 계획을 초과 달성해주는 분이라고 믿거나 기대하는 것부터 뜯어 고쳐주는 데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요나가 당신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을 갔고 또 폭풍이 몰아치는 험한 바닷물 속에 던져지게 되는 경우를 겪더라도 때를 맞추어 고래를 준비시켜서라도 당신의 자녀에게 계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는 분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능력이나 은혜가 엄청나고 신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분에게는 정말 식은 죽 먹기요 손바닥 뒤집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신자가 초과의 하나님만 기대하면 갈수록 신앙이 떨어진다. 기도의 응답도 그것을 체험하는 인간에겐 어떤 형태였든 자극(刺戟)이 되는데 자극이란 동일한 크기로는 계속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갈수록 더 큰 자극을 찾게 된다. 만약 갈수록 초과의 양이 커지지 않으면 어지간한 은혜를 받고도 실감도 못하고 오히려 불만이 더 쌓이게 되기 때문이다.
초과를 바라는 신앙은 신자가 기대하고 계획 해 놓은 수치 안에서만 반드시 그 응답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만약 힘들 때에 즉각적으로 채워지지 않거나 시간이 경과함에 비례해서 은혜의 양도 늘어나지 않으면 더 초조해지고 불안해진다. 나아가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자기의 목표치 안에 가두어 한정시킨다. 따라서 초과만 바라면 신자가 오히려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교만의 죄를 범하는 것이므로 도저히 어쩔 수 없어 죽게 되는 경우에서 건져 주시는 일 외에 하나님이 응답을 주실리가 없다.
하나님이 신자를 향한 간섭과 위로는 초과의 모습을 띄긴 하지만 매번 그렇지는 않다. 신자가 느끼기에 초과 되는 모습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니며 그 반대로 부족한 모습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하시지 않았다는 법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초월적이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반드시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먼저 움직이고 그 결과가 눈에 보이는 현실에 드러나기 때문에 항상 초월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가시적 세계 안에서 눈에 보이는 것에 먼저 반응하게 되는 인간은 항상 그 영역 안에서만 인식하고 사고하기 때문에 초과를 먼저 떠올리며 초월은 뒷전이 된다.
그러나 신자가 초과보다 초월의 하나님을 소망하게 되면 전혀 신앙의 능력이 달라진다. 더 큰 자극을 요구하며 응답의 수치만 붙들고 기도하지 않는다. 언제 응답이 될까, 왜 아직 응답이 되지 않는가 초조해 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일은 궁극적으로는 선하고 영광스런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이 너무나 당연하므로 응답에 연연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 하나님의 일에 자신이 쓰임 받기를 소원하며 나아가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바울처럼 자신이 궁핍하든 풍부하든 상관 없이 심지어 자기 생명을 앗아가든 자족하게 된다.
초월의 하나님을 단순히 초과가 더 크게 나타나는 것으로 오해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신자의 지정의적 인식과 믿음의 범위를 넘어서 일하시고 있다. 초월의 하나님을 의지하면 기도 응답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신자 스스로 분석하고 판단한 것에 의존하여 불안해 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그대로 믿고 따르기 때문에 무제한의 가능성이 신자 앞에 펼쳐진다. 정말 신자가 바라보는 지경과 발로 밟는 땅 전부를 하나님이 주신다. 초월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만 비록 현실에서 아무리 애통하더라도 그분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면 더 이상 “예배에 참석했으니 복 주시겠지, 뜨겁게 기도하면 언젠가는 내 기대치는 아니더라도 적당하게 응답해주시겠지, 어느 정도 시간과 돈에 여유가 생기면 주위 어려운 사람도 도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 주시겠지 …?” 식의 차지도 덥지도 않는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실재(實在)하시는 하나님과 날마다 순간마다 함께 호흡하며 닭살 돋는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 당신이 너무 좋아 오로지 그분만 찬양하고 경배한다. 또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슴이 터지도록 채워지고 사단이 그 자리에서 물러가게 된다.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같이 살아 운동력이 있게 되고 신자 영혼 속의 모든 더럽고 추한 것을 잘라 버리고 거룩하게 변화시켜 준다. 하나님의 약속 한 마디 한 마디가 신자의 존재, 삶, 인생 전부를 생명력 넘치게 바꾸어 주는 살아 있는 참 능력이 된다.
그래서 평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그분의 일에 헌신한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신29:29)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 현실의 불편하고 힘든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신묘막측한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삶의 모든 현장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면 순간순간마다 자꾸 초과의 하나님을 찾으려는 본성을 죽이고 초월의 하나님을 대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위로는 젖 달라고 우는 아기에게 단순히 젖 주어 달래는 정도가 아니다. 떼를 쓰면 더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신자의 필요는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시고 반드시 채워 주신다. 대신에 신자가 진정으로 애통해야 할 것을 애통해 한다면 하나님 당신이 아니고는 하실 수 없는 방법과 때와 장소에서 당신의 당신 되심을 확실하게 알도록 해 주신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고 오직 하나님 당신만을 사랑하며 더 이상 당신과의 관계가 비뚤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신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애통할 때에 받는 위로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