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35) 팔복강해(9)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모든 인간이 가장 크게 괴로워하는 것은?
미전국에서 한 달에 수십만 통의 편지로 인생의 고충을 호소 받아 그 해결책을 신문에 연재하는 론 애슐리라는 상담가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사람들이 어떤 문제로 가장 많이 괴로워하는가?”라고 물었다. 질문자로선 아마 돈, 사랑, 인간 관계, 출세, 건강 중에 하나를 댈 것이라 기대했겠지만 전혀 다른 대답이 나왔다. “모든 사람의 문제는 결국 한 가지 주제로 귀결 되는데 그것은 Fear(공포)다.”
불경기라 수입이 줄어 Mortgage(주택대출금)를 제 때에 못 갚아 집이 혹시 차압 되는 것은 아닌가? 회사에서 Lay-off(해고) 당하면 어떡하나? 아이들이 혹시 나쁜 친구랑 어울려 마약이나 범죄에 빠지지나 않을까?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가슴이 답답해지는데 혹시 폐암인가? 차가 너무 낡아 가다가 서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 새 차는 무슨 돈으로 사지? 이처럼 염려 불안이 끊이지 않는 것이 인생살이다. 하나가 해결 되면 또 다른 문제가 꼬리를 물고 발생한다. 그 직접적 원인이야 무엇이 되었던 일생에 걸쳐 사람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한 마디로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단순히 천성과 기질이 온순하고 연약하여 정이 많고 겸손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함을 확신하므로 자신의 인간적 세상적 기질의 절제가 가능하여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흔들림이 없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온유한 신자란 모든 사람이 평생을 두고 힘들어 하는 인생살이의 두려움이 없어진 자란 것이다.
솔직히 여러분은 어떠한가? 현실의 삶에서 두려움과 염려가 없어졌는가? 고충 상담할 거리가 있는가 없는가? 아니면 여전히 사방이 꽉 막혀 있거나 조금만 힘든 일이 있어도 안절부절 못하고 신경질이 폭발하는가? 현실의 어려운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시련과 환난이 닥쳤을 때에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아니면 그런 어려움 중에도 두려움 대신 하나님이 주신 평강으로 온유해져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신자가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녔어도 여전히 참된 온유와는 거리가 멀고 두려움을 제대로 극복 못하는 쪽일 것이다.
신자가 현실의 삶에서 온유가 드러나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고 말을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믿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자가 자신들이 처해 있는 어떤 장애와 위험을 제거해 줄 때만이 그분이 함께 하셨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단순하게 수호신 혹은 수호천사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포커스를 오직 그분에게 의탁하여 고난과 시련을 싸워 이겨내는 것에 둔다. 자연히 신앙 생활의 중심도 기도 뜨겁게 하고, 봉사 많이 하고, 헌금도 힘에 부치게 하며, 전도와 성경 공부에 열심을 내는 것에 두고 그러면 장애와 위험 자체가 신자의 눈 앞에 얼씬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신자가 갖는 착각 중에 가장 큰 착각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흔히 시련을 아예 없게 해달라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면 적게 해달라고, 적게 발생하더라도 그 발생의 빈도를 낮추어 시련과 시련 사이의 시간 간격을 최대한 넓게 잡아 달라고 하고, 또 이왕 발생하는 시련은 고통을 약하게 해서 두려움이 많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소원하는데 믿음을 동원하고 있다. 심지어 고통을 덜 느끼게 해주거나 아예 잊게 해주고 나아가 다른 일에 몰두하게 해달라고까지 요구하기도 한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박수치고 찬양하고 울며불며 기도만 하고 있거나 교회 일에만 죽기살기로 매달려 현실의 삶은 방관 내지 포기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믿음이 일종의 진통제, 수면제, 마취제나 도깨비 방망이 중의 하나로 전락해 버렸다.
신앙 생활 열심히 하면 환난이 없어지거나 현실에서 축복을 받는다고 믿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며 하나님과도 아무 관계가 없다. 최초 인간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부패된 피조 세계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꿔 주시기 전까지는 시련과 환난이 신자 불신자 구분 없이 닥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신자가 이런 착각을 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불신자 시절부터 갖고 있던 기복적 신앙관이 본인도 미처 인식 못할 정도로 잠재 의식에 뿌리 박혀 있거나, 때때로 사단의 꾐에 넘어가 순간순간 그런 생각을 갖게 되거나, 심지어 강단에서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이런 착각을 제거하지 않고는 믿음이 바로 설 수 없으며 믿음이 바로 서 있지 못하니 환난이 닥치기만 하면 그저 불안에 떨 수 밖에 없다.
두려움의 본질
신자가 쉽게 범하는 잘못은 환난 중에 느끼는 두려움만 당장 없애려 하지 그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왜 생기는지에 관해선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환난을 통해 현실에서 겪게 되는 온갖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고통이 싫고 힘들어서 두려움이 생긴다고 생각하는데 이것 또한 착각이다. 말하자면 직장에서 해고 당하면 그에 수반되는 경제적 궁핍함이 두려우니까 해고 자체를 두려움의 원인으로 간주하고 해고만 안 당하면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자마저 인생을 아주 단순한 수학 공식으로 해석하여 믿음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불신자 시절에 상관을 찾아가 뇌물을 바치거나 동료를 모함하는 등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해고를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그 힘과 정성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해고만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열심히 간구한다. 두려움의 원인은 불신자시절이나 신자가 된 후에나 동일하게 해고다. 그 두려움을 없애는 해결책도 해고를 당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달라진 것이라고는 해고 당하지 않는 수단이 세상적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인가의 차이뿐이다. 이는 믿음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근본적으로 두려움도 사라지지 않는다.
911 테러의 여파로 사람들이 항공기 여행을 꺼려하자 US Air Way라는 굴지의 항공사가 큰 적자가 나 수천명의 직원을 해고하게 되었다. 그럼 불신자만 골라 해고했겠는가? 신자 중에도 기도 많이 한 자는 그 해고 대상에서 빠지고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한 자만 해고되는가? 아니다. 평소 때에 근무 실적이 나쁘고 그 태도가 성실하지 못한 자부터 해고하게 마련이다. 회사가 판단하여 가장 손 쉽게 경비를 절감하면서도 업무에 크게 지장이 없는 부서부터 폐쇄 조치를 한다.
신자가 이런 때도 자신만은 해고 대상에서 빼 달라고 기도한다면 혹시 자기보다 훨씬 형편이 딱한 자가 그 신자를 대신해 직장을 잃게 되는 경우는 생기지 않을까? 신자라면 오히려 정말 궁핍하고 어려운 자 대신에 자신이 희생당하겠다고 나서야 하지 않는가? 또 하나님이 수호신이라면 인사담당자의 정신을 혼미케 하여 영업 실적도 그리 좋지 않은 신자마저 무조건 해고 대상에서 빼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오해는 말아야 한다. 물론 하나님이 기적적인 간섭으로 신자를 보호해 줄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항상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는 아주 예외의 경우에 한정되지 일상적인 일에서마저 그런 방법을 동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듯이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 두려움의 원인이자 실체라면 단순히 그 힘든 일만 없어지면 두려움도 당연히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형통하여 남 부러울 것이나 부족한 것 전혀 없는 백만 장자들에게도 두려움은 일반이거나 오히려 더 많다. 가장 쉬운 예로 팝의 제왕 마이클 잭슨은 집 내부 전체를 병균 하나 없는 Clean Room으로 만들어 놓고 살면서도 불안에 떤다지 않는가? 그에게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라곤 하나 없을 텐데도 말이다.
육체, 정신, 현실에 가해지는 어떤 직접적인 고통, 아픔, 쓰라림은 두려움의 본질이 아니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거나 군대에서 상관에게 방망이로 기합 받을 때는 그 육신적 고통으로 인해 솔직히 두렵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방망이나 주사가 얼마나 아픈지 이전에 직간접으로 경험하여 이미 그 위력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신경 조직에서 나타나는 조건 반사적인 긴장이다. 이런 경우의 두려움은 체험이지 공포 그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이전에 한 번 당했을 때 눈 한 번 찔끔 감았더니 견딜 만하더라 차라리 매도 제일 먼저 맞고 말지라는 각오가 생기면서 두려움이 줄거나 없어진다.
두려움의 본질은 다른 것이다. 할로인데이 때에 미국 곳곳에 유령 집을 만들어 놓고 돈을 받고 구경 시킨다. 그러나 구경하는 사람 어느 누구도 그 속에 귀신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구경하기 전부터 모든 것이 다 기계로 조작되는 인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겁이 나는가? 캄캄해서인가? 그럼 사람이 캄캄하면 무조건 공포가 생기도록 본능적으로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밤에 캄캄해도 평안하게 잠만 잘 자지 않는가? 캄캄한 유령 집이 무서워지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 무엇이 어떤 모습으로 튀어 나올지 몰라 무서운 것이다. 막상 튀어 나오고 나면 아무리 기괴하고 무섭게 분장을 했어도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두려움은 사라진다.
사람이 두려워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캄캄한 암흑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캄캄하면 바로 앞에 절벽이 나타날지 사자가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 두려운 것이다.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어떤 위험이 닥칠지 전혀 모르니 아무 대비도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위험을 있는 그대로 몽땅 덮어 쓸 수 밖에 없으니 두렵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위험에 대한 대비가 내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므로 그 일을 스스로 조정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천둥 번개가 치면 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가? 그 소리가 굉장히 크고 번쩍하는 빛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도 하지만 그런 자연의 위엄에 비춰볼 때에 인간이 정말 아무 힘도 못쓰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결국 두려움의 본질은 앞으로 일어날 사태를 전혀 예측할 수 없어서 자기 힘으로 도저히 통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모든 일의 결국이 예측 가능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 통제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졌을 때는 어떤 일이 닥쳐도 두렵지 않고 흔들림 없이 온유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언제 함께 하시는가?
그렇다면 신자는 어떻게 해야 자기 앞날을 예측할 수 있고 자신이 가는 길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가? 예언의 은사를 받아 점쟁이처럼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신통하게 알아 맞출 수 있어야 하는가? 도깨비 방망이 같은 신통한 능력을 받아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여 잘 믿고 기도만 열심히 하면 기도한 대로 다 이뤄진다는 뜻인가?
아무리 영성이 뛰어난 목회자라도 환난이 닥치면 앞 길이 어찌 될지 모르고 그 과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는 여느 신자와 다를 바 없다. 신자가 두려움을 없애는 것은 불신자와 정 반대다. 오히려 앞날을 ‘예측’하지 않고 ‘통제’하려 하지 않아야 한다. 자기 인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게 그 두 가지를 온전히 내어 맡길 때에 오히려 온유를 유지할 수 있다. 신자와 함께 하시는 전지전능하시며 우주만물을 섭리하시는 그분의 예측과 통제 아래 온전히 들어가면 된다. 또 바로 이점이 신자가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따라서 신자가 가장 먼저 따져야 할 것은 언제 어떻게 환난이 끝날 것인가를 알려 하기보다는 과연 이런 환난 중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는가여야 한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는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했는가? 또 왜 혼자 두지 아니 한다고 했는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고 또 보냄을 받은 예수님은 보내신 이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인데도 성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니까 혼자 두지 않는다고 한다.
신자도 마찬가지다. 신자더러 당장에 목사, 선교사가 되거나 교회 봉사나 전도에 열심을 내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것의 본질이 단순하게 구원을 얻어 천국가게 되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당신의 자녀로 불러 세상으로 내어 보내셨다는 철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내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분이 나에게 시킬 일이 분명히 있고 그 일에 목적하신 바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모습으로 이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그 보내심의 필연적인 과정임을 확신하여야 한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이 계획 하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함께 하시지 않고는 그 계획을 이룰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이 단순히 신자를 ‘어떤 위험에서 지키는 분’이 아니라 ‘어떤 지점으로 이끌어 가는 분’이라는 확신이다. 그래서 참 신자는 자신을 둘러싼 외부 사정의 Up-and-down 때문에 자신의 신앙이나 평강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향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필요하다면 신자에게 돈이나 건강을 줄 수도 뺐을 수도 있으며,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또는 나빠지게 할 수 있으며, 자존심과 세상의 평판을 세워 줄 수도 망가트릴 수도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자가 환난 중에 온유를 얻지 못하는 것은 신자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거나 그런 계획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것조차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또 신자가 해고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인 반면에 신자가 형통하고 풍부한 가운데 삶을 즐기는 것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자기 편한 대로 적용하려 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 삶에 일어나는 어떤 일에 대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싫어하실까에 대한 인식도 전혀 없고 단지 자기 편한 대로, 하고싶은 대로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만 바라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한 지각이 전혀 없고 단지 현재의 고통만 없애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하나님이 신자와 함께 하심의 근본적 의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신자가 당신의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자로선 그 일에 대한 예측과 통제를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고 나아가 장래의 결말마저 분명한 정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길 외에는 신자에게도 끊임 없이 일어나는 인생의 환난과 시련들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지 못한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자신의 삶이 앞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진행될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는 없다. 오직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나만을 위한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시므로 현재의 내 인생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신실하신 일정표(日程表)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계획을 다 이루실 때까지 내가 단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통제 밖에 있었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신 뜻이 신자더러 교회를 위해 열심을 내고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라고 독려하신 것만은 아니다. 그 이전에 신자에게 너무나도 간단하고 자명한 이치를 밝혀 주신 것이다. “신자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이 분명히 서 있다면 그 일에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일의 결말을 선하게 보장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또 그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비록 힘들고 고달플 때도 있겠지만 이미 선한 결말이 보장되어 있는데 신자로 실패케 할 리가 없지 않는가?”
에스더는 자기 민족의 절대절명의 위기를 구하려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면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갔다.그녀가 단순히 자기의 결단과 헌신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할 일을 선하게 여기신다면 반드시 이뤄주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기꺼이 죽겠다고 나선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실 리가 만무하니까 당연히 죽을 수 밖에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를 인정한 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로다.”(롬5:1-4) 바울 사도는 신자란 환난 중에 두려워 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워 할 수 있는 자라고 했다. 신자에겐 환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반드시 드러날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신자가 어떻게 해서 그런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가? 기도해서 병이 낫고 사업이 형통하는 것을 많이 체험해서 그러한가? 아니다. 그 소망의 바탕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한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 대신 죽이셨다는 확신이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5-8)
신자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 자신의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또 그분의 부활 하심에 동참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자다. 예수님의 생명과 ‘나’라는 존재 전체가 일 대 일로 맞바꾸어졌고 하나님이 그분의 피 값으로 내 인생을 사주셨다는 것을 개인적 인격적 체험으로 아는 자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의 피로 자신을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을 믿는 자다. 신자가 정녕 하나님의 이런 확증을 믿을진대 더 이상 어떤 증거와 보증이 필요하겠는가? 나아가 십자가 사랑이라는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정답을 갖고 있기에 자기가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알게 되었지 않는가? 말하자면 예측이 가능하고 통제가 가능한 인생을 살게 된 자다. 당연히 두려움이 없어지고 자유함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본질이며 ‘온유’를 누리는 유일한 길이다.
불신자의 인생과 다른 신자의 인생
그래서 신자의 인생은 특이하다. 자기 인생에 대한 정답을 갖고 있고 또 그 정답으로 가는 길도 알고 있지만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열심히 앞날을 예측하고 계획하며 살아선 안 된다. 대신에 전지전능하시고 우주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 신자의 인생을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예측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기만 하면 된다. 자신이 예측하여 통제하려는 어떤 시도도 완전히 중단하고 자기의 전 존재와 삶과 일생을 전적으로 그분의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
지금껏 말한 대로 하자면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신자를 떠나시는 법은 절대 없다. 신자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 심지어 죄악 가운데 있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신자의 곁에 계신다. 그러나 신자가 자신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확신하여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드림 없이는 하나님이 그 계획을 수행하지 않고 잠시 보류해 두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단지 함께 하고만 있다면 사실은 함께 하심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는 그런 상태를 두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믿고 있다.
불신자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전지전능함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끝까지 고개를 쳐들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의 통제 아래 들어가야 하는 것이 죽기 보다 싫은 것이다. 시련과 환난이 겹쳐 어떤 위험과 장애가 닥칠지라도 자기 인생을 자기가 예측하고 통제하려 든다.
신자가 된 뜻이 무엇인가? 이젠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자기 인생을 완전히 내어 맡겼기 때문에 구태여 예측과 통제를 하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신자가 환난을 만나면 두렵고 심지어 기도하고 말씀 보고 찬양해도 평강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환난 자체를 없애주리라 기대해서 그렇다. 기도와 말씀은 환난을 없애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키우는 수단이다. 시련과 환난 중에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키우지 않고는 절대 온유해지지 못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가 환난을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떼 쓰는 데만 기도를 동원하고 있다. 신자가 되고서도 환난이 어떻게 끝이 날지 몰라 두렵기 때문이다. 신자마저 불신자처럼 자신의 인생을 자기가 예측하고 통제하겠다고 덤비는 셈이다. 여전히 자신의 일생이 어떻게 결말이 날 것인지에 대한 정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보증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아프리카 최초의 탐험가이자 선교사였던 리빙스턴이 사자에게 물려 구사 일생으로 살아나고 그 팔이 덜렁덜렁 달린 채로 살면서 평생을 두고 좌우명으로 삼은 말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룰 때까지 불사(不死)다.(I am immortal until his works be done.)” 어찌 보면 불경스러울 정도의 말을 했다.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immortal’ 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자신이 불사신이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하나님에게 보냄을 받은 자로서 그분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동안에는 그분이 자기를 절대 혼자 버려두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지금 리빙스턴이 가졌던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세상과 사람 앞에 언제 어디서나 담대히 그렇게 선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이 걸어가는 앞 길의 수풀 속에 아무리 많은 사자가 숨어 있어도, 아니 눈 앞에 나타나 삼키려 들어도, 또 실제로 사자에게 물려도 절대 여러분을 두렵게 할 수 없고 온유를 뺏어 갈 수 없다. 그 어떤 일에도 신자의 일생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스런 계획은 절대 방해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사자에게 물려 죽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말씀이 마취제, 진통제가 되어주길 바라면서, 기도하면 두려움의 증상이 좀 식는 것
같아서.. 정말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 왔었지요.
자신이 앞날을 예측하고 통제하려 했던 결과였던 것이군요. 하나님 손에 꼬옥 붙잡힌
신자의 삶은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에만 의탁드리면 될 것을...
전에는 그걸 몰라서, 아니 이론으론 알았지만 도무지 그리되질 않아서 입을 굳게 다물고
그저 인내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입을 굳게 다물수록 믿음이 좋은 것인지 알고..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