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9:9-13) 누구를 구원으로 예정하시는가?

죄인 구원 담화 (13)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9-13)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구원은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차원이 결코 아닙니다. 살펴본 대로 원시 복음을 비롯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해서 구원해주시므로 인간의 개입은 처음부터 완전히 배제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해주시며 누구를 구원하시는지라는 두 가지 의문이 따릅니다. 

 

첫째 질문에 대해선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성령이 한 죄인의 타락한 영혼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 자기중심의 인생관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어주어야만 합니다. 그럼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그분이 이 땅에서 걸어가셨던 길을 따라가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둘째 질문인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해주시는지 알아볼 차례입니다. 모든 신앙적 이슈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답을 얻어야 하는데 구원의 문제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태를 제자로 택한 후에 그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 교제를 나누는 중에 바리새인들이 유대의 규율을 위반하고 있다고 따졌습니다. 예수님이 그에 대해 주신 답변에 누구를 구원하는지 원칙이 계시 되어 있습니다. 그전에 마태를 제자로 택하는 일에서부터 사실상 구원의 기준이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관에 마태가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단순히 나를 좇으라고 제자로 부르셨고 마태도 곧바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선도적 주도적 일방적 적극적인 선택으로 마태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열두 제자로 삼을 계획이라서 예수님이 직접 골랐다고 여겨선 안 됩니다. 모든 신자가 주님의 제자이고 마태는 제자이기 이전에 구원받은 신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누가 구원받을지는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원리를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9:21)는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도자기 물레에 올려진 진흙과 같은 처지로 어떤 그릇으로 빚어질지 그 흙 스스로 노력은커녕 아예 계획조차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도공이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획에 따라 이뤄집니다.

 

하나님이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다고 하니까 처음부터 편애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를 나누는 불공평한 분이라는 반박이 생깁니다. 이는 어떤 그릇으로 만들지 오직 도공의 의지에 달렸다는 뜻을 강조하려는 비유이지 하나님이 인간을 미리 차별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솝 우화에서 목이 가늘고 긴 병에 담긴 물을 여우가 마시지 못했고, 넓은 접시에 담긴 음식은 두루미가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릇은 종류별로 기능만 다르지 그릇 자체에 신분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쪽에서 구원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비유일 뿐입니다. 

 

문맥상 의미도 그런 내용과 무관합니다. 로마서 9-11장의 주제는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오셨는데도 오히려 이스라엘이 그를 배척했고 구원받은 자도 유대인 중에 적다는 당시의 비평에 대해서 변증하는 내용입니다. 자세히 살필 여유가 없기에 한 마디로 줄이면 바울은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이방인부터 먼저 구원하고 유대인들로 시샘을 나게 해서 나중에 구원해주신다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 충만하게 구원해주시되 그 구원 순서만 다르다는 것이지 둘 중 누구를 편애하느냐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체험적인 은혜

 

바울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만 구원받는다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그 신자들을 극렬히 핍박했고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처형을 주도하여서 살인자인 셈인데도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먼저 찾아와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구원체험을 아무리 따져봐도 그런 은혜를 받을만한 조건과 자격이 자기 쪽에는 전혀 없었고 정반대로 심판받아 마땅했다고 절감한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구원을 계획은커녕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려는 목적으로 하나님이 자기 인생을 자기는 인식하지 못했어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주관해 오셨다는 사실도 깨달았던 것입니다. 

 

지금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로 택함을 받은 경우부터 그러합니다. 알다시피 로마는 유대인 중에서 세리를 세웠는데 세금을 많이 거두면 당연히 로마의 눈에 들어서 여러모로 유리합니다. 거기다 세리가 세율을 일정 범위 내에서 임의로 매길 수 있는 권한이 있어서 뇌물을 받고 세금을 낮춰주거나 미운 자는 세율을 올려서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로마를 등에 업고서 축재하면서 이런저런 권세를 부릴 수 있는 직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겐 로마의 앞잡이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 반역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 윤리로 따져도 질 나쁜 죄인이라 유대 사회에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간주하고 식사 교제도 하지 못하게 규정지었습니다. 

 

유대인 랍비로서 예수님이 당시 상황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평소의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떠도는 마태에 대한 평판을 알아보지 않았고 또 간단한 면접을 통해 그의 인성, 인생관과 가치관,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도 등도 전혀 점검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세관에 앉은 그를 먼저 보시고 주저 없이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만 했습니다. 

 

놀랍게도 마태도 전혀 망설임 없이 곧바로 일어나 따랐습니다. 이미 나사렛 예수라는 랍비에 대한 소문은 유대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세리가 비록 동족의 미움을 사기는 해도 로마 법률은 물론 세상 물정에 능통한 당시로선 지식층이며 무엇보다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기에 인근의 돌아가는 정세와 소식에 전문가였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마태를 만났다고 기록하므로 바로 직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마태가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친구들이 침상에 눕혀 들고 온 중풍 병자를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었는데(마9:1-8) 주님이 그런 신적인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마태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주님이 그를 고쳐줄 때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했다는 소식에 더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현장에 있던 서기관들도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만이 갖고 있는데 감히 나사렛 시골의 무명 랍비가 그런 선언을 하니까 속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참람죄를 범하고 있다고 여기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속에 품은 그런 생각까지 아시고 당시로선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중풍을 당신께서 완벽히 고치면 당신의 말이 진리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먼저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중풍 환자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기에 당신께서 신적인 권능은 물론 죄를 사하는 권세까지 갖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의 말씀대로 그 자리에서 증명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8절)고 증언했습니다. 최소한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라고 인정한 것이며 마태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므로 곧바로 따라나선 것입니다. 설령 그 사건을 알지 못했다 쳐도 이미 예수는 아주 유명한 데다 제자들도 따르고 있었고 무엇보다 성령이 그의 심령에 강력히 역사했기에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주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나 바울의 경우에 보듯이 구원에서 분명한 원칙은 둘입니다. 첫째 그들에게 예수를 믿고 따를 생각이나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 예수님이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으로 그들을 택하여 먼저 찾아와서 만나주시고 구원해준 것입니다. 둘째 예수의 대적자인 바울은 물론 세리 마태에게도 그런 은혜를 입을 만한 자격과 조건이 전혀 되지 못했고 더 중요하게는 주님 쪽에서도 그런 사항들을 아예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기준도 없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편애도 차별도 하지 않기에 구원뿐 아니라 심판에도 특별한 심사 기준이 따로 없습니다. 흔히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고 그러지 않으면 심판받는다고 하니까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도 다른 모든 종교를 무시하는 배타적 교리라고 비난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노아 홍수로 심판하기 전이나 후나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고 한탄했습니다. 아담의 원죄 이후에 모든 사람은 똑같이 당신의 진노를 받아 당장이라도 죽어 마땅한 천하의 죄인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지옥 심판의 기준을 따로 세우고 사람들을 대조 비교해서 추려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두면 모두가 심판받을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 쪽에서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길을 은혜로 제시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이라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독생자가 인간의 모든 죗값을 대신 짊어졌고 그 조건 없는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당신께로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너무나도 간단한 길이었습니다. 

 

예수 십자가는 종교, 문화, 인종, 성별, 신분, 학력, 등 그 어떤 것으로도 차별하지 않으며 누구든지 당신을 믿는 믿음 하나만 요구합니다. 불신자들은 그런 좋은 소식을 듣고도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 대적했기에 평생 처해 있었던 그 상태 그대로 그분의 진노 아래 죽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그런 심판의 원리를 이미 설명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7-19)

 

이미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에 따로 심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면서 당신을 순전히 믿기만 하라고 구원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럼 그 구원의 초대를 받지 않으면 원래의 심판의 자리에 그대로 머무르는 셈이므로 따로 심판을 주지 않아도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사람들이 공짜로 주는 구원의 선물조차 거부하는 까닭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이 진리와 거짓인지 가르쳤고 당신의 삶으로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살기를 싫어하며 계속해서 죄악을 즐기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었는데도 그들 스스로 그런 사랑이 전혀 필요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끝까지 거역 대적했습니다. 하나님으로서도 어폐가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둔 것이며 추가로 형벌을 가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불신자 시절의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정말로 솔직하게 되돌아본다면 주님의 이 말씀을 절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본심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들을 향해서도 당신만의 긍휼로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주님의 재림이 여전히 이뤄지지 않는 까닭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뜻은 아담 때부터 마지막 날까지 심판의 재앙이 아니라 구원의 생명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그런 구원의 기준을 분명히 드러내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12절)는 비유가 그것입니다. 자신이 건강하다고 믿기에 독생자의 십자가 사랑이 필요 없다고 끝까지 거부하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는 주님이 구원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해 그들이야말로 구원이 시급한데도 끝까지 그들이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영적으로 병이 들어서 자신의 심령이 너무나 가난한 것을 알고 애통해하는 겸손한 자는 주님이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회개와 구원

 

그렇다고 인간 쪽의 회개가 구원의 자격 조건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도덕적인 회개를 하고 구원해달라고 소망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 은혜가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도 지금 도덕적 영적 회개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주님이 먼저 택했습니다. 그도 당시의 세리라는 직업의 특성상 항상 동족을 볼 낯이 없었고 알게 모르게 부정한 방식으로 돈을 벌기도 하면서 윤리적 죄책감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직업이 주는 현실적 안락과 권세에 젖어서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라고 하기 전까지도 세관에 앉아서 자기 일을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흉악범 불신자도 때로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나름대로 도덕적인 회개는 합니다. 아담과 이브는 윤리와 종교가 없었을 때인데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짓고서 스스로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했습니다. 죄를 지으면 인간 안에 내재 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므로 자연히 도덕적 수치심과 영적 공포심이 생기게 됩니다. 인간으로 거룩하게 살게끔 하려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입니다. 

 

누구나 종교 없이도 도덕적 회개는 할 수 있으며 또 그런 회개는 말과 행동으로 지은 죄를 후회하는 정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선 인간사회의 질서만 잘 지켜서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죄가 아니므로 굳이 스스로 회개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이 고안한 모든 종교도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분은 반드시 착한 사람을 구원해주어야 한다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제한시켜 버립니다. 스스로 자기들은 의롭다고 믿거나 충분히 선해질 수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종교인들은 간혹 죄를 지어도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악하고 환경이 열악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무엇보다 도덕적 회개는 인간 스스로 행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구원의 기준이 되면 하나님이 구원에 개입한 측면이 전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 일생의 공적과 과오를 심사해서 점수만 매기면 되는 채점관으로 전락합니다. 죽은 후에 구원과 심판이 정해지므로 그 인생을 주관 인도하기는커녕 감독도 하지 않습니다. 인생 시험의 감독관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근본 사상체계는 이 땅과 인간만 중심적인, 그것도 자신만 최고로 높이는 원죄가 전혀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라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사람이 악한 행동을 했기에 죄인이 되었으니 그 악한 행동의 용서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고 선언했습니다. 인간 자체가 더러워서 겉으로 나오는 것이 다 더럽다는 것입니다. 그럼 구원은 그 죄인이 새사람으로 완전히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문제는 인간 자체가 타락했다면 스스로는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스스로 찾지도 않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간섭하여 거듭나게 해주어야만 비로소 구원이 가능해집니다. 또 성령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므로 구원 주실 자도 하나님이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정치적 현실적 메시아가 되어주길 바랐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의 하속과 로마 군병에게 잡혀가자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갔습니다.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까지 이스라엘이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할 때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른 제자들과 다퉜습니다. 

 

지금 주님을 따라나선 것도 당시의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현실적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는데 불치 불구를 말씀 한마디로 낮게 해주고 그 가르침이 바리새인과 달리 권세가 있는 랍비였기 때문입니다. 가뜩이나 동족들로부터 민족 배반자라고 낙인이 찍혀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 후에는 주님이 새 왕국을 세워주면 자신의 재정 지식을 앞세워 재무장관을 맡거나 최소한 세리 직업을 떳떳하게 계속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도덕적 회개도 성령을 받아야 철저하게 온전히 행할 수 있습니다. 모든 윤리적인 죄는 아담의 최초의 범죄에서 보듯이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후에 자신은 물로 이웃과도 분리된 탓이므로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부터 회복되어야만 합니다. 마태로선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 와서 주님의 십자가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깨닫고 또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기 전이었습니다. 도덕적 회개도 온전히 행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요컨대 마태는 제자로 택함 받았을 때 하나님의 진노 아래 지옥 가기에 자격이 넘치는 천하 죄인이었습니다. 

 

마태는 구원에 대해 아무런 계획은 물론 꿈도 꾸지 않았고 성령의 역사에도 전혀 힘을 보탠 일이 없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강한 바람과 불꽃처럼 성령이 임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심령에도 성령이 강력하게 불고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죽어 마땅한 자기를 택해 구원해주었다는 은혜도 감사함으로 저절로 인정하게 되고 열두 제자로서 충성을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보다는 긍휼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성령의 거듭남보다 앞선 절차입니다. 성령의 거듭남 과정도 구체적으로 모르기에 하나님의 택함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실제로 성령으로 거듭난 체험이 있는 자만이 나중에 “아! 내가 택함을 받았구나.”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스스로 영적으로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자는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모든 사람이 자기만은 영적 건강도에서 최소한 평균 이상이라고 믿습니다. 또 그러니까 착한 자가 천국 가는 행위 구원이 옳다고 말합니다. 간단히 이렇게만 따져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습니까? 

 

지금 유대인들이 세리를 미워하듯이 일본 강점기의 한국에서 일본 형사의 앞잡이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그 일을 두고 정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마태를 부른 후에 동료 세리만 아니라 죄인들과도 함께 식사 교제했는데 죄인은 이방인을 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방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모르고 돼지고기를 먹는 등 부정한 백성이므로 세리처럼 식사 교제를 금지 시켰습니다. 

 

지금 주님이 사역하고 있는 갈릴리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열 개의 도시 데가볼리와 인접한 국경 지역인지라 세관이 있고 또 이방인들과의 교역과 교제가 빈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랍비라는 자가 전혀 거리낌 없이 죄인들과 식사 교제를 하고 있으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왜 장로의 유전을 어기느냐고 따졌습니다. 모세의 거룩한 율법을 가르쳐야 할 자가 거꾸로 절대로 행해선 안 되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주님은 호세아서 6:6을 인용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대답했습니다. 호세아는 제사보다 긍휼을 원한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했으나 주님은 ‘내가’라는 일인칭 주어를 사용해서 당신이 직접 선포하시는 형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당신을 일체화시켰습니다. 말하자면 호세아에게 그 예언을 심어주신 당사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전에 중풍 병자를 치유할 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선언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다시 당신께서 의인과 죄인을 나누는 심판자라고 확증한 것입니다. 

 

여기서 제사는 의인과 짝을 이루며 바리새인에게 해당되고, 긍휼은 죄인과 짝을 이루어서 세리와 이방인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들 스스로 정한 도덕적 종교적 규정에 따라서 의인과 죄인을 나눠서 인간인 주제에 하나님 대신에 심판자의 행세를 했습니다. 세리와 죄인은 그런 규정에 따라 이 땅에서부터 인간에 의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취급당하는 피해자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건강해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과 조건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자부할 뿐 아니라 또 그래서 누가 들어가지 못하는지도 알고서 구분해서 취급하고 있었고 그러는 것이 이 땅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자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독생자인 줄도 모르고 예수님을 심판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사회에서 소외되어서 핍박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단순하게 이해해선 안 됩니다. 우선 예수님은 당시 세리, 이방인들, 가난한 자들, 육체적 질병에 들린 자들 모두를 구원해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지혜 있는 자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고 오히려 미련하고 비천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더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었을 뿐입니다.(고전1:26-29) 반면에 지혜와 문벌에 뛰어난 자들은 본문의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겼고 또 그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스스로 거부했던 것입니다. 

 

예정 교리의 참뜻

 

하나님의 택함에 차별이 없다고 해서 추첨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택하지는 않습니다. 당신께서 사랑할 자를 당신이 정하신 것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신자로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만 알고 나중에 천국에 가면 그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됩니다.(고후3:18)

 

한마디로 택함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죄인들에게 풍성히 체험케 하고 그 안에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길이자 참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제사보다 긍휼을 원한다는 말씀도 예수님의 인간을 향한 그런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가 항상 악하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먼저 바라는 모습은 평생토록 당신의 긍휼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된 후에도 수시로 죄에 넘어지더라도 당신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면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긍휼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신지라 인간에게 당신의 긍휼이 없으면 한시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일에서 최고로 경건하고 진지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긍휼을 구할 필요나 이유가 전혀 없다고 여기고 성전에서 열심히 드리는 제사에 대한 보상만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원해주지 않았고 정확히는 자기들 스스로 구원에서 벗어났습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스스로 영적으로 건강하다고 자부하지는 않으나 자신이 알아서 예수를 믿었고 그 후 교회 생활 열심히 하고 있으니 보상만 바라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자는 본문의 예수님 말씀을 정말로 두렵게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5,16) 구원을 소망해서도 노력해서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음란하게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려 했으나 모세의 중보 기도로 용서하시면서 계시하신 구원 원칙입니다.(출33:19) 광야의 자기 선조들처럼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거역 대적하며 그 제자들을 극렬히 핍박했던 바울로선 자신의 구원 경험에 비추어보니 그분의 긍휼만이 영원토록 인간의 참 생명이 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의 구원 원칙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독선적이고 불공평해 보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이 스스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평생토록 예수는 물론 하나님도 필요 없다고 큰소리치며 자기 멋대로 쾌락과 죄악을 즐기며 살다가 죽기 직전에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자도 용서해주실까 염려하면서 비로소 그분을 찾지 않습니까? 이미 늦었지만 그분만이 절대적으로 구원을 정하신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도 마찬가지로 평생토록 수시로 죄를 짓는데도 하나님은 끝까지 참아주시고 일일이 벌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신자 신자 구분 없이 모든 죄인을 오직 당신만의 긍휼로만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도 심판받았다고 원망할 근거가 눈곱만큼도 없으며 구원받았다고 자랑할 근거 또한 한 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단지 그 사실을 알고서 감사하게 된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11:32) 택하심에 따른 구원은 결코 기독교만의 종교적 교리가 아닙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영적인 실상이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실체적인 죽음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직 당신의 사랑으로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누구든지 그 은혜를 믿는 것 외에는 아무런 요구 조건 하나 없이 말입니다. 그것이 예정 교리의 참뜻입니다. 

 

(10/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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