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1:3-6) 예정으로 구원하신 두 가지 이유

죄인 구원 담화 (14 완)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3-6)

 

택함의 두 가지 측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출33:19)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해줄 자를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만 정한다는 것인데 기독교의 이 구원교리는 아무래도 많은 논란을 낳게 됩니다. 한 명의 예외 없이 당신의 진노 아래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면 왜 어떤 이는 구원해주고 어떤 이는 심판하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굳이 자기를 긍휼히 여겨줄 필요가 없다고 끝까지 고집하면 하나님도 가만 놓아둘 수밖에 없습니다. 불신자의 심판은 자초한 것이라 하나님의 공평성을 따질 계제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전제한 후에 스스로 영적으로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의인에겐 의사가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심판은 그렇다 쳐도 구원에서 공평성은 여전히 문제가 될 여지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체험을 모세에게 주신 말씀에 비추어서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고 가르칩니다. 구원은 인간 쪽에서 소망한다고 해서 또는 스스로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신자들이 자기가 소망 계획 노력하지 않았는데 모든 환경이 자신을 예수님 쪽으로 이끌고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통해 구원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말하자면 왜 자기가 택함을 받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이 똑같은 조건에서 본인의 소망과 노력과도 상관없이 이뤄진다면 하나님은 특정인을 편애한다는 반발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이 난해한 문제에 대해 적절하고도 타당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왜 구원으로 택함을 받았는지라는 질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택함을 받은 자 쪽에 어떤 자격과 조건이 있는지 묻는 것과 둘째로 하나님이 택한 신자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따지는 것입니다. 전자는 신자가 택함 받은 근거이고 후자는 하나님이 택한 목적입니다. 

 

성경은 전자에 대해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것 외에는 설명이 없고 그 이상의 추측도 불가능합니다. 누구나 똑같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므로 오직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는 자만 구원받는 것입니다. 다른 한 편 성경은 하나님이 무작정 선택한 것이 아니며 택함 그 자체의 목적은 있다고 말합니다. 구원은 아무 이유 없이 받았으나 그 후의 신자 인생이 반드시 걸어가야 할 하나님이 지정해놓으신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 구원 목적을 잘 모르니까 그분의 주권적 선택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묶여 버립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목적을 정확히 알아서 인간의 영적 실태와 비교해야만 그분의 공평성도 정확히 검증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하나님의 구원 목적은 감안하지 않고서 주권적 선택만 불공평하다고 비평하면 불합리한 반쪽 비평에 그치게 됩니다. 

 

택함의 목적

 

하나님이 구원으로 택해주는 목적을 성경 곳곳에서 설명해주고 있으나 본문이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미래 시제로 표현된 것이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시는 내용이므로 그것이 바로 구원의 목적이 됩니다. 두 가지인데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절)와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6절)이 그것입니다. 

 

그 앞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3절)라는 말씀도 미래 시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이유, 동격, 결과 등을 의미하는 헬라어 접속사 카도스를 우리말로 ‘곧’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사실상 4-5절이 3절과 같은 내용이 되므로 3절은 굳이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구원받은 것부터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은 것이며 그 후로도 그런 복을 받아야 구원의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거룩해지라고 또 거저 주시는 은혜이므로 찬송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만의 절대적 주권 외에는 왜 내가 택함 받았는지 구체적인 근거는 몰라도 나를 구원하신 그분의 목적은 아주 분명해졌습니다. 그럼 이 말씀에 비추어서 교회와 신자들이 과연 그 목적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지 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 구원의 목적은 너무나도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인데도 유감스럽게도 교회에서 거의 강조되고 있지 않습니다. 

 

알기 쉽게 접근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로마를 물리쳐달라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모든 고난에서 보호하고 그 삶을 세상 축복으로 풍성히 채우는 것은 절대로 구원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전혀 자격이 없는 자를 절대적 주권으로 택하여 구원해주는데 거기다 현실적 형통까지 보장해주면 그야말로 불공평한 하나님이 됩니다. 열두 제자들마저 끝까지 이 땅의 현실적 영광만 바랐으나 주님은 그들의 소망마저 외면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현실축복을 보장해주는 메시아로 오셨다면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부터 엄청난 모순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작금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현실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으로 전도하고 가르치는 통칭 기복주의가 대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기독교인 스스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만 편애하는 불공평한 하나님이라고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꼴입니다. 예수님은 현실적 메시아가 되어달라고 요구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 가라고 꾸짖었는데 지금의 기복주의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똑같이 야단치지 않겠습니까? 

 

고난에서 건져주는 것이 구원이라면 그 목적지는 현실 형통을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죄에서 건져주는 것이므로 당연히 목적지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잘 믿으면 현실 형통이 가능하다고 가르치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며 기독교도 다른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바와 같다고 시인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도 현재의 기독교의 실상이 현실 문제 해결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런 일은 스스로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므로 굳이 교회에 갈 필요도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 두 가지 목적을 종교적 계명으로 의무적으로 수행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부어주시고, 또 그분의 사랑 안에서 은혜를 거저 주신다고 전제했습니다. 신자가 거룩하게 살고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랑과 은혜를 실제로 받아서 누리고 있다면 그에 대해서 올바른 반응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거룩하게 살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도 찬송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둘이 각기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흠 없이 살려면?

 

하늘의 신령한 복을 준다고 해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매번 일으키거나, 기쁨이 넘치는 일만 생기게 하거나, 모든 고난을 막아주어서 아무 걱정 없게 해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수십 년 교회 생활에서 체험하듯이 신자 인생은 여전히 세상 고난으로 고달프기만 합니다. 

 

믿음의 명예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서 11장은 잘 믿으면 모든 질병과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항상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교회가 앞장서서 그렇다고 선전하는 것은 죄송하지만 외부적으로는 교인들 끌어모으려고 사기 치는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그렇게 모인 교인들을 계속 묶어두려는 모략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어떤 인물도 현실 고난과 세상 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고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의 인생을 두고서 히브리서 기자는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5,16)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즉, 현실적 형통과 안락을 바랐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고 합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믿는 일을 포기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멸시받고 현실적으로도 고달팠지만 끝까지 그분의 손길을 놓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더 나은 본향 즉 하늘에 예비된 성을 소망하고 살았고 그 소망으로 인해서 모든 현실 어려움을 너끈히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절대로 부끄러울 리 없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바울도 하늘에 예비 된 성만을 바랐기에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는 등 수많은 죽을 고비를 이겨낸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0-12) 마지막 날의 부활의 영광만이 자신의 이 땅의 괴로운 삶을 지탱해낼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요 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늘의 성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삶에서 흠이 없어야 합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하늘이 되어야 하고 거기로 향하는 여정에서 궤도 수정이 일절 없어야 합니다. 나온 바 본향이 때로는 쉽고 편안해 보일 수 있어도 하늘의 성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좋기에 절대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체질이 연약해 때로 쓰러져도 내주하신 성령님의 새 생명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어야 하고 아무리 더딘 것 같아도 뒤는 돌아보지 않고 앞만 향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흠이 없다고 해서 하늘의 성을 향해 간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의롭다고 칭찬받은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자기들부터 하나님과 구원을 모르는 봉사이면서 백성들까지 눈을 멀게 만들어 함께 멸망한다고 통렬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신령한 복을 나눠주러 온 예수님을 자기들의 현실적 유익이 줄어들고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로 역사상 최고로 불의한 재판으로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당시 세상에선 도덕적 종교적으로 가장 흠이 없었던 자들이 그랬습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 중심으로 살고 있다면 도덕적 종교적으로도 점점 흠이 줄어들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는 자가 세상 쾌락과 죄악을 좋아할 리 없고 내주하신 성령이 나쁜 길로 인도하실 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해지려면?

 

거룩하게 산다는 성경적 의미도 구별된 삶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이 땅에서 출세하여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 위에 서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것이 예수를 모르는 자들의 삶입니다. 물론 불신자 중에도 의롭고 경건하며 하나님의 실존을 믿는 자도 많으나 자기들 인생 목표를 오직 이 땅에만 맞춥니다. 때로 순수한 마음으로 의를 실현해도 필연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자기 치장과 자랑에 불과합니다. 평소에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으며 그분의 거룩한 뜻을 자신의 삶을 통해 이 땅에 실현하겠다는 인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의 구원관은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스스로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의 합격 점수를 받아야 하고 스스로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자기 같은 자가 천국 가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 갈 자가 없다는 지극히 교만한 생각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며 나의 의는 쓰레기 같으니 하나님 제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달라는 고백은 없습니다. 그 종교를 창시한 인간 선각자가 제정한 도덕적 계명을 의무적으로 수행하여 그 위인처럼 되거나 그가 가르치는 경지에 도달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신자도 세상 안에서 살 수밖에 없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아무리 매력적이고 때로는 의롭게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나 이 땅에서 자기 자신만 좋게 하는 것이라면 절대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별된 삶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는 자답게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알아채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최소한 부활의 참 생명이 보장되어 있으므로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평강과 자유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도덕과 종교로 그 삶이 판단되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을 세상 앞에 여실히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을 보이셨기에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주님이 단지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기 위해서 오셨다면 굳이 제자들을 택해서, 그것도 배반당하고 부인당할 것을 아시면서도, 삼 년간 동고동락하며 가르치고 본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어떤 것으로도 차별하지 않고 자신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삶을 살고 있으면 그 인생의 가치와 의미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거룩하게 승화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고 온 본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려면?

 

둘째로 하나님은 당신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신자더러 찬송하게 하려고 구원해주었습니다. 은혜는 자격이 전혀 없는데도 구원을 공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께로만 오므로 구원 이후에도 신자답게 살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주관하시고 신자의 마음을 그렇게 인도해주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에게만 해당되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나아가 마지막 날에 신자가 누릴 부활의 영광이 구원하신 목적이 달성될 최종 종착지입니다. 

 

찬송하라고 하면 신자들이 너무 고상하고 경건하게 여깁니다. 찬양 예배처럼 모든 정성을 다하고 최고로 좋은 것을 바치며 기뻐하는 감정도 최고로 끌어올려서 그분만 최고로 높여야 한다고만 여깁니다. 찬양의 근본적인 뜻은 칭찬(praise)하는 것입니다. 또다시 최고의 찬사를 동원해야 한다고 판단해선 안 됩니다. 

 

찬양 즉, 칭찬의 첫걸음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은 심히 부패하고 죄에 찌들어 있는 데다 물질계에 제한되어서 하나님의 실체를 보지도 못하고 그분의 속성도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확히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 억지로 찬양하려들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그분을 정확히 아는 범위 안에서, 즉 실제로 체험한 사랑과 은혜만 있는 그대로 입술로 시인 고백하면 가장 훌륭한 찬양입니다. 

 

불행하게도 하나님은커녕 다른 사람의 있는 사실 그대로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영적 실상입니다. 성경이 만물보다 더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선포한 까닭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선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분에게 의심과 불만을 품는 경우가 칭찬은 못 해도 감사하는 경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많지 않습니까? 조금만 고난이 닥쳐도 그동안 그렇게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죄 안 짓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왜 이런 고통만 주시느냐고 따지기 바쁘지 않습니까? 

 

구체적 이유는 잘 몰라도 하나님이 당신만의 주권으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었다는 사실부터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이 찬양입니다. 그 후에 성령님이 내주하여 자신의 모든 삶을 주관하신다는 사실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현실 삶에 불행과 핍박이 닥쳐도, 자꾸만 주변 여건이 더 나빠져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신실하게 주관하고 계시기에 고난을 포함한 범사에 그분만의 선하신 뜻이 반드시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개별 사건으로 은혜를 주시기 이전에 내 일생 전체에 대한 거룩한 계획을 갖고 계시고 결국에는 영광스러운 완성을 위해서 이끌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그 구체적인 계획과 뜻은 몰라도 반드시 나에게 유익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 최고의 찬양입니다. 굳이 찬양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과 매일 말씀과 기도로 실제로 교제 동행하고 있다면 자연히 찬양의 곡조도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바울이 십자가 구원 진리에 대해서 다 설명한 후에 그렇게 구원받은 신자더러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친 첫 마디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제물은 실제로 죽여서 바치는 희생 제물을 뜻합니다. 산 제물이라고 했으니 삶에서 순교까지 각오하며 자기 전부를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거룩한 산 제물이니까 설명해 드린 대로 세상 사람과는 확연히 구별될 정도로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 온전한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 삶은 그렇지 않으면서 교회에서 아무리 입술로 거룩하고 고상하게 찬양해도 종교적 공치사이자 아부에 불과하므로 하나님은 귀를 닫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 일 하나 없는데도 무조건 잘했다고 칭찬할 수는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로 받아 누리지 않으면서 무조건 그분을 찬양할 수는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실제로 나와 항상 함께하시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그분이 주도 내지 허락하신 것입니다. 당장은 고달프고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도 그 안에 그분만의 선하심도 반드시 함께하므로 우리 삶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체질이 연약하고 여전히 교만한 욕심이 남아 있어 종종 넘어져도 반드시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어주실 것을 확신하고 잠잠이 기다릴 수는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신자는 세상 사람과 다른 구별된 삶으로 그분을 찬송해야 합니다. 

 

살펴본 대로 노아, 아브라함, 모세, 바울, 베드로 같은 인생이 되라고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으로 택하여서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누구나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일에만 전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데반,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 아니 초대교회 신자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이 이러한데 역으로 말해 만약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함부로 불공평하다고 따질 자격이 없는 셈입니다. 그전에 하나님이 신자에게 앞으로 네 인생을 그렇게 이끌 것이라고 선택 전에 미리 알려주면 구원받겠다고 소망하거나 노력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전도해보면 술 담배 끊고 세상 쾌락 즐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 싫다고 거절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불평만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신자들이 선택받은 구체적 이유와 목적을 모르는 사이에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서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해서 신약 성도들에게만 요구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후에 심히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리라는 소명을 주셨고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을 선악과만 제외하고 임의로 따먹어도 된다고 허락해주었습니다. 

 

선악과를 금지한 것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도덕적 종교적 족쇄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품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라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사랑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정말로 인간답게 참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지만 않으면 청지기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당신께서 책임지고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것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만 빼고 나머지 모든 죄는 죽이지 않고 용서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선악과의 모습으로 최초 인간과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탄의 꾐에 넘어가 스스로 당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어도 당신께서 먼저 아담을 찾아와서 용서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핵심적인 본질은 사랑이므로 공의도 그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는 방식과 목적으로만 실현됩니다. 아담의 죽을죄도 다른 짐승을 죽이는 피의 제사로 하나님 당신께서 손수 갚아주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음에도 살려주었으니 다시는 이전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고 당신의 은혜를 받아 누리며 본문처럼 흠 없이 거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담 때부터 구원의 목적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만 최고로 높이려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따로 택하여 온갖 이적으로 보호 인도하셨고 거룩한 율법을 가르쳐 지키게 한 제사장 나라 이스라엘마저 당신을 거역하고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하나님은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택한 당신의 백성들 사이에 거하기를 소원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여전히 죄로 타락해 있던 스바냐 때에도 예수로 인해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그 백성들로 흠 없이 거룩하게 살아나가도록 인도하면서 더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조 때 선악과 금령을 주시면서부터 구약시대 내내 나아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오직 당신의 택한 백성으로 인해서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것 하나입니다. 그럼 택함 받은 백성이 행할 일도 오직 하나 그분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매일 실제로 받고 있다면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산 제사요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는 일이요 흠 없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실제로 하나님과 체험적으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교제 동행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돈을 주인으로 모셨던 인생에서 완전히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상황으로 처하게 하든 어떤 사람과 사건을 만나게 하든 오직 하늘의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일 뿐입니다. 신자라고 무조건 핍박과 고난을 의무적으로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형통과 안락을 이 땅에서만 추구하고 좋아했던 자에서 영원까지 썩지 않을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따라가는 삶을 살기에 어떤 고난에도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러면 아직도 자신의 이전의 죽어 있던 삶을 살고 있는 이웃이 자연히 너무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분의 소유이므로 자신의 누리고 있는 예수로 인한 기쁨을 증거하고 나눠주고 싶어집니다. 바로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주권적 선택으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지는 않아도 최소한 부끄럽지 않게 여기리라 자신할 수 있는 신자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거나 최소한 부끄럽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 신자만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 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목적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그 목적을 실천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금주로 죄인 구원 담화를 마치고 내주부터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까지 그 구원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0/30/2022)


날마다순종

2022.10.31 06:40:41
*.14.99.253

멀리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이렇게 온라인으로 주님의 말씀을 목사님을 통해 부족함 없이 넉넉히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늘 말씀 감사합니다^-^

master

2022.10.31 09:31:11
*.115.238.222

날마다순종님 저야말로 부족한 제 글들을 은혜로 받아주시는데다 매번 친절하게 오타를 찾아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글 올리기 전에 한글 맞춤법 체크에 거는데도 컴퓨터는 철자법으로 틀리지 않는 한 문장이나 문맥에서 틀린 표현은 골라내지 못하네요. 제가 몇 번 읽어도 나이 탓에 넘어가는 경우도 많고요. ㅠㅠ 나중에 전부 E-book으로 편집할 예정이라 꼭 필요한 일을 대신 해주시기에 더더욱 감사하오며, 염치 없지만 계속해서 모니터링 부탁드립니다. 한국 나갈 기회 있으면 꼭 뵙고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국가적인 큰 비극 가운데 주님의 위로와 은총이 넘치도록 함께 하시고 날이갈 수록 영육간에 더욱 강건하시길 기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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