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21:1-8)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인가?

구원 완성 담화 (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1-8)

 

천 년 동안 왕 노릇 

 

신자들이 간절히 알고 싶어 하는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의 상태를 요한계시록은 한 마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기 전에 백보좌 심판이 있다고(20:11-15) 합니다. 먼저 확실히 해둘 사항은 하나님은 인류에게 두 번의 구원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두 번의 주님 재림이 없고 두 번의 지상 천년 왕국도 없습니다. 그럼 당연히 한 개인에게 두 번의 심판도 없습니다. 

 

백보좌 심판은 종말적 심판에 관한 구약 예언들의 연장이고 특별히 단7:9-10을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그 모든 구약 예언들은 두 번의 심판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한 번의 심판만 있다고 계시했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5:31-46에서 양과 염소 둘로 나누는 마지막 한 번의 심판을 가르쳤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 설명한 내용도 그러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첫째 영적 부활을 얻게 되므로 불 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은 없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신 후에 신자에겐 따로 심판할 일이 없으며 둘째 부활인 신령한 육체로 홀연히 변화될 일만 남아 있습니다.(20:5-6) 반면에 불신자에 대해선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예수를 믿지 않아서)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고 선언합니다(5절). 

 

생명책에 의거해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한다고 해서 이 땅에서 행했던 행위에 선악 간의 점수를 매겨서 심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보좌 앞에 책들이 펴있다고 복수로 말했고(20:12) 결론에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20:15) 따라서 생명과 죽음으로 나누는 두 종류의 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모든 세대의 모든 개인의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안목이나 통치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양과 염소의 비유처럼 절대적으로 완전한 공의에 따라서 구원해줄 자를 구원하고 심판받을 자를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백보좌 심판에서 신자에 대해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상급을 정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는 반면에 하나님을 대적했던 세력들과 불신자들에게 대한 마지막 날의 엄중한 심판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이어서 설명할 새 하늘과 새 땅에 절대 들어가지 못한다고 미리 못을 박은 것이며 그래서 본문 8절에서도 그들에 대한 둘째 사망을 재차 확인한 것입니다.

 

둘째 사망이 없는 신자에겐 성경은 주님의 재림 전 천년 왕국에서나(20:6), 재림 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나 주님과 함께 왕노릇한다고(22:5) 선언합니다. 그런데 재림 전은 “천 년 동안”이고 재림 후는 “세세토록”이라고 시간적 길이가 다르다고 합니다. 천년은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뜻을 완전 숫자로 상징한 것이므로 물리적 시간으로 얼마나 되는지 환산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천 년이라고 한정했으니까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골고다 십자가 승리로 사탄이 당신의 백성을 절대 미혹하지 못하도록 무저갱에 결박해버림으로써 신자의 첫 번째 왕노릇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마지막 때에 다시 오셔서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인 말씀 한마디로 단번에 멸망시킴으로써(계19:15) 그 왕노릇은 끝납니다. 

 

세세토록 왕 노릇

 

그에 비해 ‘세세토록’은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체험하듯이 하나님을 믿고 따라도 자기를 높이려는 죄의 본성이 남아 있고 또 외부의 온갖 훼방하는 요소들 때문에 지금 우리가 행하는 처음의 왕노릇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사 시대가 끝날 즈음에 이스라엘이 세속적 왕을 달라고 요구함으로써 가나안에 세워질 완전한 신정국가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아담이 타락할 때 이미 하나님이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려고 천사들로 지키게 함으로써(창3:24) 완전한 신정국가는 마지막 때로 연기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 때 소망하셨던 모습의 신정국가를 세우려고 재림하신 주님이 당신과 당신의 백성들을 훼방했던 이 땅의 모든 흑암의 세력을 멸망시키고 부활 신자가 완전한 모습으로 영원토록 왕노릇하도록 해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가 세세토록 왕노릇한다는 의미를 물리적 차원으로만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가 폴 고갱이 타히티 섬에서 꿈꾸었던 먹고 마실 것은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실컷 행할 수 있는 그런 삶을 기대합니다. 무한대의 시간 안에서 계속 활기차게 살면서 기쁘고 신나는 일만 행하는 이 땅이 연장되는 현실적 유토피아의 모습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힘들게 살다가 제대로 자기 꿈도 이뤄보지 못하고 병들어 죽게 마련인 연약한 인간인지라 필연적으로 그와 정반대되는 모습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으나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했던 이 땅에서의 삶이 과연 그런 모습이었을까요? 

 

당신의 독생자의 죽음과 맞바꾸어서 세상에서 불러낸 당신의 자녀들로 평생토록 현실적 풍요와 안일만 누리게 하거나, 최소한 무병장수의 복을 주려는 것이 그분의 계획이었을까요? 만약 하나님의 뜻이 그렇다면 이 땅에서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까 천국이나 부활에서 그런 삶을 꿈꾸는 것은 옳고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그런 뜻이 아닌 줄 우리 모두 잘 알지 않습니까?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도 한마디로 하나님 당신께서 거룩하니까 당신의 백성들도 거룩하라는 것이지 않습니까? 

 

성경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종들의 삶을 보십시오. 한결같이 현실적 형통과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희생함으로써 평생 가난과 환난만 겪어야만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고백한 대로(빌4:10-14) 현실적 풍부와 궁핍마저도 활용하여서 헌신 된 종의 순종을 통해 당신의 계획과 뜻을 당신께서 반드시 이루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자 주님은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천국열쇠를 교회에 주었습니다. 신약시대 내내 신자와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 죄악을 주님과 함께 이겨내는 것이 첫째 왕노릇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지듯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마6:10) 

 

그러나 이 첫째 왕노릇은 여러 제약 요소로 인해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일시적 부분적으로 불완전하게 이뤄졌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그런 부족한 상태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마지막 부활 때 하늘에서 이뤄진 뜻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벽하게 이뤄질 것인데 그것이 둘째 왕노릇입니다. 요컨대 신자가 죽어서 가는 낙원이나 부활 후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신자들이 이 땅에서 못다 이룬 꿈에 대해 한풀이하는 곳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자들의 둘째 왕노릇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서도 그 주관자이신 예수님이 공사역 중에 정확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부활의 생존 방식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계대결혼을 빌미로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칠 형제 중 맏이의 아내인 여인이 형이 자식이 없이 죽음으로써 시동생들과 결혼했으나 계속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일곱 형제와 결혼했다면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따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부다처제도 아닌 일처다부제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바로 신자가 어떤 상태로 부활하여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대한 정답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그러나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22:29-32)

 

먼저 부활 때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논리적으로만 따져도 영원히 살 수 있기에 자식을 낳을 필요가 없으므로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영생하는 삶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처럼 시집과 장가 같은 현실 삶으로 인해 파생되는 이런저런 문제 상처 고난 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부활 신자의 생존 형태와 방식이 이 땅과는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선 부활 신체가 영생에 맞는 모습이 됩니다. 바울이 부활에 관해 자세히 설명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결론 내린 대로 하늘에 속한 자로서 사망을 이긴 신령한 몸입니다. 인자이신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서 그 모습이 어떠할지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은 시공간의 장애가 전혀 없이 제자들을 찾아오고 또 그런 방식으로 떠났습니다. 그렇다고 영으로만 이뤄져 실체가 없는 허깨비 같은 육신은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제자들이 인식하고 접촉할 수 있는 실체를 지녔습니다. 이 땅에선 물리적 시공간에 제한받기에 늙고 병들고 죽어야 했으나 그런 것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육체입니다. 

 

영생하는 기간도 물리적으로 무한히 계속되는(ever lasting time) 시간이라고 단순히 생각해선 안 됩니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도착하는 시간이 8분이 걸리므로 인간이 보는 태양은 언제나 8분 전의 모습입니다. 그 빛이 일 년간 가는 거리인 광년으로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인지라 너무나 먼 거리인데도, 우주는 도무지 계산도 표현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광대합니다. 인간의 상상 범위조차 초월하는 그 우주 전체를 하나님은 한순간에 다 꿰뚫어 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 자체를 그것도 모든 행성마다 각기 다른 시간으로 만드신 분이라 시간을 초월해 계십니다. 그분에겐 인간이 인식하는 식으로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되는 시간대가 없으며 굳이 표현하자면 항상 현재입니다. 

 

부활한 신자는 그런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천사처럼 그분을 섬기고 예수님과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합니다. 그럼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의 언어로는 물리적 차원에선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나 시공간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가 됩니다. 인간이 여태 경험했던 시간과 공간과는 전혀 다르게 영원한 현재의 신령한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굳이 인간 언어로 표현하자면 우리말로 영겁(永劫), 영어로 eternity 안으로 들어갑니다. 부활 때 신자는 홀연히 그 새로운 시공간에 거주하기에 합당한 신체로 바뀌고 천사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부활 후의 어색한 관계

 

부활 후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이해가 되었으나 문제는 계속 남아 있을 이 땅에서의 고달팠던 삶에 대한 기억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주장처럼 계대결혼 한 당사자들 사이에 아무래도 어색한 상황이 벌어질 텐데 그럼 완전한 왕노릇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닙니까? 주님은 그에 대해선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깨우쳐주었습니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면 그것도 전혀 걱정할 거리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알아야 할 성경으로 주님은 여호와가 모세에게 주신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이 타지 않는 불꽃으로 광야의 떨기나무에 임재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는 모세를 가까이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출3:6)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모두 현재형으로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인용한 후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22:32b)고 풀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과 죽음으로 구분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이기도 한 요한은 계시록에서도 천년 왕국을 설명하면서 그 말씀대로 믿는 자를 살은 자로, 믿지 않는 자를 죽은 자로 표현했습니다.(계20:4,5)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첫째 부활을 얻었으면 살아있는 자요 그렇지 못하면 죽은 자입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골고다 십자가 안과 밖으로 나눴습니다. 하나님은 80세 된 노인 목동 모세에게 선조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죽지 않고 부활해서 현재 당신의 품 안에서 살고 있다고 깨우쳐준 것입니다. 당신께서 이 땅에서부터 그들과 맺은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단 한 치의 변함없이 세세토록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세 족장이 이 땅에서의 부정적인 기억을 천국까지 갖고 간다면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혼자 살려고 사라를 두 번이나 팔아넘겼던 그 부끄러움으로 영원히 괴로워할 것입니다. 야곱은 노쇠해서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아비 이삭을 형 에서인 것처럼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은 죄책감으로, 또 이삭은 그런 둘째 아들을 괘씸하게 여겼던 미움이 계속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 감정이 많이 약해졌다고 해도 서먹한 관계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주장처럼 일곱 형제와 그들과 결혼한 여인과의 사이에는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진선미이신 하나님은 더럽고 추한 것과 또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들과는 단 일 초도 공존하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오거나 마지막 때에 살아남은 신자들이 당신과 대면하는데 방해하는 어떤 요소도 남아 있지 않게 곧바로 바꿔줍니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진심으로 당신의 백성과 친밀하고도 완벽한 교제를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당신의 거룩한 능력으로 이 땅에서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죄의 본성은 물론 그 죄로 오염되어 쌓여있는 모든 찌꺼기를 단번에 제거해주십니다. 땅에선 전혀 의롭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의 보혈로 덧입혀서 의롭다고 칭해만 주었으나 실제로 완벽하게 의로운 영혼으로 바꿔주십니다. 부활은 인간의 신체와 지정의와 영혼을 망라하는 전인격적인 차원에서 구원을 거룩하게 완성 시키는 것입니다. 

 

이삭과 야곱에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와 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부부라는 관계는 남아 있어도 이 땅에서 서로 간에 잘못했던 부정적인 체험과 부끄러웠던 기억과 감정은 완전히 없어지고 오직 온전한 사랑으로 서로 섬길 수 있습니다. 계대결혼의 당사자들도 부활 때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깨우쳐준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이 누구보다 의롭다고 자부하기에 예수 십자가의 조건 없는 용서는 전혀 필요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 땅의 돈과 권력만 추구하는 현실주의자로서 신자를 핍박할 로마 제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양심에 찔린 일들을 했을 것이나 그 잘못 때문에 마지막 날에 심판받으면 안 되니까 그들에겐 부활은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대의 사두개인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의 불신자가 같은 생각으로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것이며 그래서 성경은 그들의 영원한 처소는 불 못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삶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예언하는 본문이 바로 예수님의 그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해서(1절) 주님이 다시 오시면서 지구 전체를 파괴한 후에 새 행성을 만들어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했습니다.(2절) 만약 처음 하늘이 문자적으로 없어졌다면 다시 하늘부터 만들어야지 곧바로 새 하늘이 하늘에서 내려올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다가 없어진다고 해서 지구상의 물이 다 없어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인간이 사는 곳이 하늘 땅 바다 셋으로 이뤄지니까 그 전체를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만 새로 내려오고 바다가 내려온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이는 계시록 13장에 사탄을 상징하는 용이 바다에서 올라오므로 지상에서 교회와 신자들을 핍박하던 모든 흑암의 세력을 멸한다는 의미도 함께 암시한 것입니다. 

 

대신에 요한은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고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고 했습니다.(5절) 처음의 것들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한 것입니다. 이전의 것들이 불완전했기에 완전하게 바꾼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의 이 땅의 상태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족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죄로 오염된 모든 것을 새롭게 고쳐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상태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새롭게 할 것이라는 표현은 앞의 백보좌 심판과 연결됩니다. 심판주로 재림하신 예수님이 보좌에 앉아서 생명책에 이름이 오른 신자에겐 심판 대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입장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자 땅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냄으로써 인간이 아무리 노동해도 온전한 가치와 의미를 생성해내지 못했습니다.(창3:17,18) 하나님이 없이 인간이 해 아래에서 행한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다고 솔로몬이 고백한 대로입니다. 그러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마지막 때에 피조세계에 대한 저주도 완전히 제거하여서 처음 창조 때의 에덴동산 같은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주님이 재림하시면 신자들도 곧바로 천사처럼 신령한 존재로 바꿔주십니다. 그동안 땅에서의 죄로 인해 생긴 부작용과 폐해들이 일시에 다 제거됩니다. 이 땅에선 천국이 침노 당했으나 완전한 천국이 하늘에서 도래했으니 더 이상 침노 당할 필요 없이 부활 신자들은 그 완성된 천국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가 새롭고 깨끗게 된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런 상태를 요한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4절)라고 설명합니다. 이 땅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음으로써 흘렸던 눈물이 없어지는 곳이라고 합니다. 

 

성경 기록에는 없어도 아브라함이 사라를 바로와 아비멜렉의 궁에 첩으로 들여보낸 후에 가슴을 치며 통곡했을 것입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차지했다고 신나서 기뻐했을 리는 없습니다. 그때 야곱의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할 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아비 이삭도 홀로 타향으로 떠나버린 야곱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지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두개인에게 답변한 대로 부활 때 당신의 능력으로 신자들이 이 땅에서 흘렸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타락에 대한 형벌로 피조세계를 저주해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지만, 사실은 죄에 찌든 인간끼리 서로 분쟁함으로써 모든 윤리적 죄들이 생기고 그 결과로 현실적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새 하늘가 새 땅으로 변화시키려면 피조세계와 인간들이 고통스러워진 근본 원인부터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죄악의 기원이자 원흉인 사탄부터 먼저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입니다.(20:7-10) 결국 죄악이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고 앞으로 발생할 가능성도 영원히 없는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죽을 때 가장 아쉬운 것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 신자의 상태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어렵게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살 때 가장 부족했던 점들이 완벽하게 바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사람들이 죽을 때에 최고로 후회하는 것들부터 온전해질 것입니다. 소망하거나 계획했던 일들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서 가장 아쉬워합니까? 물론 그런 점도 있지만 말기 암 같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자들이 공통적으로 행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동안 자기가 잘못을 범했던 자들이나,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던 자들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그 관계를 회복하려 합니다. 

 

최초 인간 부부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스스로 능동적 의도적으로 파괴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자마자 선악과 금령대로 영적인 사망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면서 심판에 대한 두려움부터 생겼고 또 남들 앞에 자기를 감추면서 자기의 겉과 속이 달라졌으므로 자신과도 분리되었습니다. 아담과 이브 각자가 서로에게 그러니까 부부 사이 즉 사람 사이에도 분리가 생겼습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을 만큼 진정으로 사랑했던 부부가 하나님을 등지자 바로 서로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웠습니다. 한마디로 타락은 인간이 하나님의 참사랑을 거부하자 인간 사회에도 참사랑이 실종된 것입니다. 

 

부활 후에는 하나님과 얼굴로 맞대면하며 예수님과 직접 완전한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대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영원한 현재형의 하나님으로서 일대일로 친밀한 관계로 회복되어 그분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자연히 그동안 분리되었던 자기 자신은 물론 모든 성도와도 완전하게 화목하게 되고 자신과 이웃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죄로 타락하기 전의 당신께서 창조하셨던 상태로 완전히 되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에덴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창2:25), 서로에게 잘못한 일 하나 없으니 감출 것도 전혀 없는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바울은 성도에게 성령이 나눠주는 은사에 대해서 설명한 후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고 선언했습니다. 신자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오직 그 셋을 실현하는 목적과 방향으로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영원한 것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재림해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꿔주고 나면 신자가 믿음 생활로 가꾸어온 영광스러운 부활을 입으려는 소망은 달성되었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더 이상 필요 없고 남은 것은 사랑하는 일뿐입니다. 천국은 어떤 악한 것도 없으며 오직 사랑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하나님과 부활 성도 개인 간에 또 부활 성도들 사이에는 오직 완전한 사랑으로만 그 관계가 이어집니다. 이 땅과는 다른 시간대이지만 날마다 그 사랑은 더 깊어지고 풍성해지며 날마다 더 큰 기쁨과 충만으로 채워집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특별히 인간을 너무나 사랑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선악과라는 너무나 귀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고 이 땅에서 당신을 대리하는 청지기로서 당신이 베푸시는 모든 사랑을 누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인간은 거부 대적했고 지금까지도 계속 당신을 거역 대적해도 단 한 치도 줄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죽이더라도 당신의 백성을 불러 모으는 아무 조건과 제약이 없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았으나 이 땅에선 여러모로 제약을 받아서 그 사랑을 완벽하게 실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 완전한 사랑으로 제대로 반응할 수 있는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새 예루살렘(계21:9-22:5)에 대해서도 문자적으로 상상하고 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날에 실현될 완전한 성전에 대한 예언의 연장이고 또 대제사장의 에봇에 붙은 보석들을 열거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땅에선 완전한 모습의 교회가 하나도 없었으나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워질 부활 신자들끼리 온전한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세세토록 완전한 왕노릇을 하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가 새 예루살렘입니다. 본문 2절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 성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표현했듯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솔직히 새 하늘과 새 땅을 어떤 마음으로 기대합니까? 고달픈 인생살이에 너무 지쳐서 어서 빨리 슬픔과 아픔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까? 죄의 타락이 절정까지 치닫는 세상 꼴이 너무 보기 싫습니까? 그런 소망을 갖게 된 그 어려운 사정들은 이해되지만 그것으로 그치면 불신자들이 유토피아를 소망하는 정도에 머무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불신자들도 장례식에서 더 좋은 곳에서 평안히 계시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서로 위로하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불신자와 이웃을 섬기는 동안 그 열매가 은혜롭긴 했으나 더욱 완전한 사랑을 하고 싶어야 합니다. 이곳에서 수시로 죄에 넘어졌던 아픔이 너무 크고 부끄러웠기에 완전한 의를 체험하고 싶어야 합니다. 미처 이해하기 힘들었던 세상과 인생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들을 알고 싶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에 서로 상처 주고받으며 나아가 사탄에 미혹된 영혼들을 보면서 애통해하며 눈물 흘렸으나 그 눈물을 멈추고 싶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그런 부활을 꿈꾼다면 지금부터 비록 부족하고 불완전한 사랑일지라도 주변에 나누려 더욱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12/2023)


모루두개

2024.04.03 21:31:40
*.230.44.2

천국에 대한 소망도 방향이 중요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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