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6-28) 예수 십자가보다 창조주부터 믿으라.
왜 오직 예수인가? (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6-28)
믿음은 들어야 생긴다.
구원이란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진리를 확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합니다.(고전1:23)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 받은 탓이며(신21:23) 실제로 예수님이 율법을 어긴 죄인이라고 간주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착한 자가 천국 가야 옳은데 아무 선행과 공적 없이 예수라는 한 인간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아주 불합리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모든 사람을 대변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연인의 상태에서 자신이 죽어 마땅한 천하의 죄인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습니다. 세상의 풍요와 쾌락을 추구하기에 영적으로 신령하고 경건해지는 일 자체를 본성적으로 거부합니다.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일 상태가 안 되어 있기에 그것부터 바로 잡아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일은 성령님이 사탄에 미혹되어 있는 죄인의 영혼을 새롭게 바꿔주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조금 안 맞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십자가 구원 지혜는 사람들이 자기 지혜로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임해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신 내용을 깨우쳐주어야만 알 수 있고(요16:8) 또 그래야만 예수님을 주라 시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고전12:3).
그런데 정작 그 알아듣지도 못하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본성적인 반응이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듣지도 못한 복음을 믿을 수는 없으니까(롬10:14) 일단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로선 누가 구원으로 택함 받았는지 또 성령님이 그런 자에게 언제 어떻게 역사할지 전혀 모르니까 때를 얻든 못 얻든 간절히 기도하면서 예수 믿어 구원 얻으라고 권해야 합니다.
신자가 불신자의 완악한 심령을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고 십자가의 도를 순전히 전하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라면 반드시 성령으로 간섭하여 구원해주십니다. 결국 구원은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가감 없이 전해야 하고 불신자가 그 진리를 전해듣는 데서부터 시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예수는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데이비드 웰스라는 미국 신학자가 지금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전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분석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 얻는 유일한 방안이 되려면 어쨌든 본인이 그 정도는 각기 달라도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라고 시인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이 세대는 그런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윤리든 종교든 이젠 절대적 진리 자체가 없기에 그것을 위반하는 절대적 죄도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보다 창조주 하나님부터 먼저 알게 해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웰스의 분석처럼 현세대는 진리는 본인이 판단하기에 달렸기에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말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고 과학기술도 급속히 최고도로 발전하기에 사람들의 사고 체계도 그에 맞춰 진보한다는 것입니다. 시대 장소 여건에 따라서 어제의 진리가 내일은 비진리가 된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각 개인이 자기만의 개성은 물론 사상을 추구 형성하기에 공통적인 기준에 관심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잣대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적용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어떤 악행도 죄가 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마약이나 자유로운 성관계는 개인의 취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약 20 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는 죄라고 여겼으나 이젠 그런 말을 하면 도리어 벌을 받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자식이 아버지를 살해해도 자랄 때에 심한 학대를 받아서 생성된 정서불안으로 인한 우발적 실수인지라 죄가 아니고 심리적 치료부터 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정상참작을 해주는 것과 무죄라고 판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제 남은 죄라곤 인간사회의 질서를 허물어트릴 정도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뿐입니다. 그것마저도 굳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사회가 정해놓은 형벌이나 벌금만 감당하면 오히려 더 떳떳하다고 여기는 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종교적 기준으로 특정한 죄를 비판하는 사람이 도덕적 종교적으로 더 나쁜 자라고 간주됩니다. 다시 동성애를 예로 들면 대부분의 사람이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며 본인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도덕과 종교로 그런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더 나쁜 죄라는 것입니다. 자연히 동성애 반대운동을 하는 기독교에 큰 반감을 갖습니다. 기독교도 동성애는 죄이지만 동성애자는 결코 차별하지 않고 사랑으로 품어주어야만 하는데도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런 판국에 예수 십자가 외에 구원이 없다고 전도하면 앞뒤로 꽉 막혀 너무나 배타적인 보수꼴통이거나 심하면 정신이상자로 취급 받는 판국이 되었습니다.
절대적 진리는 반드시 절대자가 제시한 진리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진화론이 대세를 장악하여서 절대자마저 없어졌으니 절대적 진리도 실종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절대적 죄인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지 않고는 예수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절대자가 분명히 살아계시고 그분의 절대적 진리를 대적하면 절대적 심판이 있다는 것부터 인식 시켜야할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증거 하는 종교는 성경의 진리대로 가르치는 보수정통주의 개신교 밖에 없는데 그마저 기독교계 내에서조차 훨씬 소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기에 절대적 죄도 없다는 인식이 보편화되기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과학이 최고로 발전해 인류의 현실 삶은 역사상 최고로 풍족해졌지만 내면의 영적상태는 역사상 최고로 피폐해지고 사악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에 앞서 구원이 절실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처한 이 비참한 상황부터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이 반드시 따라야 할 절대적 진리가 있고 그것의 반대편에 서있기에 절대적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부터 겸손히 인정하게 해야 합니다.
세계관이 바뀌어야 구원이다.
인간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절대적 진리는 성경의 첫째 계시대로 창조주가 계시고 태초에 세상 만물이 그분에 의해서 무에서 유로 종류 별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체적인 설명 없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영원토록 거룩하게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실험 고증 증명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창조가 아니면 인간은 태초부터 있었던 물질이 장구한 세월을 거쳐서 우연히 인간으로 생성된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고도의 지성, 창의성, 심지어 도덕성을 가졌어도 물질에서 시작해서 물질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아무 의미와 목적 없이 방치되어진 물체와 다름없으므로 구원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진화된 존재라면 스스로 구원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물론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조차 없습니다. 진화론을 신봉하는 지금 세대의 사고가 바로 그러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아름답고 진리이신 분입니다. 그분에게는 하자, 부족, 무지, 불의, 추함, 악함 등이 단 한 치도 없습니다. 그분 자체가 진리이고 그분이 계시하신 모든 말씀은 물론 인간 사회에 개입하여 역사를 이끌어 가신 모든 방식이 진리입니다. 인간이 가장 먼저 행해야 할 일도 그 분이 어떤 분인지와 그분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그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절대적 진리를 모르는 것이며 또 절대적 진리를 모르는 것부터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됩니다. 반대로 그 진리를 정확히 아는 것은 그분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는 첫째 조건이 됩니다. 말하자면 자기라는 존재와 삶과 인생은 물론 이 땅과 만물의 기원과 유지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부터 온전히 확신해야 합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세계관과 인생관부터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에 대한 지금까지의 개념을 정말로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재고해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구원을 오직 천국 가는 티켓을 얻는 것으로 극히 제한적인 의미로만 접근 이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은 것은 정해져 있고 그 후에 있을 심판에서 지옥 형벌을 면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가장 첫째가는 의미이긴 합니다만 그것으로 제한시키면 굳이 자신의 가치체계까지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세계관과 인생관을 바꾸는 것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새로운 가치관에 따라서 살아가려는 뜻입니다. 기독교만이 죽기 전에 살아있을 때부터 성령이 간섭하여 거듭나는 체험을 통해 구원해주는 이유입니다. 만약 구원이 단순히 천국행 기차표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죽기 전에 표를 끊으면 됩니다. 하나님 쪽에서도 구원에 선행이 전혀 필요 없고 요구하지 않으니까 택한 자를 그냥 죽은 후에 구원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천국행 기차에만 초점을 맞추면 아무래도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을 수 있는지 그 방법만 알려고 노력합니다. 그 방법은 기독교신자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간단합니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도무지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격할 수 없으므로 예수님의 대속죽음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의 도를 이신칭의라는 교리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의 도는 성령이 간섭해주지 않으면 온전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 십자가 교리는 구원을 얻는 방안이지 구원 자체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한 죄인이 회심한 후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나머지 인생에 십자가 구원이 미치는 열매가 얼마나 풍성하고 거룩한지 미처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삶이 얼마나 은혜롭고 거룩하며 가치 있고 기쁨이 넘치는지는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가 구원 이후 체험으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이미 소유한 것이다.
신자들이 구원에 대해서 여러 의심과 궁금증이 생기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깨달은 신자는 세상은 물론 천사도 판단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고전6:2,3)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으면 그분의 일꾼이 되는데 그 바뀐 신분과 인생이 이렇게 변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
그는 하나님이 신자가 죽은 후에야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어떤 처지에 처하든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무명이든, 죽은 것 같든, 징계를 아무리 많이 받아도, 근심을 하고 가난한 것 같아도 이미 하나님 안에서 유명하고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며 항상 기뻐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오히려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구원 받은 결과가 즉, 신자의 이 땅의 삶 자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솔직한 실상은 무명하고 핍박받고 가난해지고 고난이 닥치면 구원 받지 않았는지 아직도 더 받아야 할 것이 많이 남았는지 그러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근심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한다는 구원의 객관적인 방법만 알지 구원이 자신의 주관적인 생명이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구원 받은 자가 누릴 풍성한 은혜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1:3,4)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된 연유는 십자가의 도를 앎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또 그렇게 한 이유는 신자로 세상에 썩어질 것을 피하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해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구원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는 것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일이 인생의 첫째 목적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전에 이미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은 이미 다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런 체험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감정적 기복이 심하고 성급하여 예수님께 꾸중도 듣고 급기야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한 베드로가 어떻게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이 마지막 만찬 때에 그의 부인을 예고하면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의 잘못을 용서해주고 성령에 충만한 종으로 세워주기 전에 마지막 만찬 때에 이미 주님이 기도해주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고 나서 보니까 주님이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 자기 믿음까지도 주님이 심어주시고 온전히 성숙되도록 계속해서 이끌어주시고 있다는 진리를 생생한 체험으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엄청난 일인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 그분이 한 죄인의 전 인격체를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 있을 때부터 말입니다. 완전한 성자로 바꿔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부 대적하다가 이젠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래서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은 소망과 열정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 그 소망을 삶에 실현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신자 삶의 모든 여건과 사건을 주관하시고 필요하면 강권적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신자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자기를 높이려는 죄의 본성에 수시로 넘어지지만 내주하신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천국 보좌 우편에 좌정하신 예수님이 신자를 위해서 중보기도 해주고 있습니다.(계5:8) 근본적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세계관 인생관부터 이미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분별하는 관점과 대응하는 방식도 이전과 반대로 실현할 수 있습니다. 자기 내면의 지성, 감성, 이성도 점점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도록 성령님이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울이나 베드로가 고백한 내용을 당당히 체험적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구원의 개념을 다시 정립하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신 말씀의 뜻이 얼마나 심오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이 한 죄인이 죽은 후에 가야 할 천국 증서 받은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야 할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일생 전부를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는 자답게 이끌어주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신자가 처한 상황과 매일 겪는 일등 모든 차원에서 그분의 거룩하고 신령한 간섭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분의 은혜는 신자 개인을 넘어서 그가 속한 모든 공동체와 사회 민족 전 인류에게 까지 미칩니다. 십자가 복음에는 주님이 재림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영광스런 부활로 이끌고 모든 피조세계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꿔주시는 데까지 미칩니다. 시간적으로는 인류의 전 역사를 공간적으로는 전 우주를 거룩하게 하실 구원이 당신의 십자가 죽음에서부터 본격적 능동적으로 시작될 것이므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도 당연히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해야 합니다. 내 인생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고 앞으로는 더욱 주님을 닮아갈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한 일에 쓰임 받게 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 은혜를 받아 누리기 위해서 주님께 자신의 전부를 내어드리고 언제 어디서나 성령님의 거룩한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실제로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고 있는 신자라면 구원에 대해서 어떤 의심도 생길 수 없습니다. 바울이나 베드로가 하늘의 신령한 것을 다 받았고 이제 그것을 이 땅에 남아 있는 동안에 다른 이들을 위해서 실현하는 중인데 구원에 대해서 의심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자신의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을 죽이는 일에는 고민하고 열심히 싸워나가긴 했어도 말입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길은 신약의 예수 복음으로 충분합니다. 이 땅에서부터 이전과 다른 거룩한 인생을 살아가려면 인간이 과연 죽어 마땅할 만큼 타락했는지부터 실감해야 합니다. 웰스가 예수님보다 창조주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듯이 구원을 얻는 길로서 복음이 아니라 구원의 의미로서 복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또 타락의 의미부터 알아야 타락에서 건져진 구원의 의미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사탄의 꾐에 넘어가 선악과 금령을 어긴 것을 타락의 첫째 원인이자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최초 인간이 그렇게 된 데는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본문이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첫째가는 절대적 진리를 거역한 것입니다. 그 진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28절b)는 것입니다. 동식물에 대해선 단순히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으로 끝났습니다.(22절)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닮게 지어졌기에 인간 특유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더러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당연히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이 땅을 다스려야 합니다.
역으로 말해 인간더러 그런 특별한 소명을 주지 않을 것이면 굳이 인간은 물론 이 땅을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을 뺀 나머지 동식물로 이 땅에 생육 번성하게 되면 아직도 공룡 천국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운석이 떨어져 공룡이 멸망했다면 사자 호랑이 떼만 설치고 있을 텐데 하나님은 그런 지구를 전혀 계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리라는 것이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첫째 축복이자 약속이자 소명입니다. 그럼 모든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려면 바로 그 뜻을 실현하는 인생이 되어야만 합니다. 최초 인간은 그 분의 뜻을 따르며 이 땅을 잘 다스리다가 사탄의 꾐에 빠져서 하나님을 위해서 그분 뜻대로 다스리는 것이 아주 싫어졌던 것입니다. 대신에 오직 자기들 마음대로 다스려서 모든 것을 자기가 차지하려 한 것입니다.
구원의 첫째 의미
다시 강조하지만 절대적 진리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 절대적 죄입니다. 타락의 첫째 의미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 땅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다스리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은 물론 인간을 창조하지 않아도 당신의 영광에 전혀 손상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은 오직 자신의 뜻에 따라 행하실 수 있고 다른 어떤 것에도 전혀 영향 받지 않는 절대자입니다. 스스로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분의 뜻만이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런 분이 이 땅을 지으시고 인간을 당신 대신에 청지기로 세운 뜻을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이는 기독교 고유의 종교적 의무가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실상 예수님이 오신 이후 신약성경으로 시작되었고 그래서 구원을 얻는 방안에 초점이 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반드시 함께 또 먼저 배워야 하는데 구원을 얻어야 할 필요성을 창세기부터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츰 배우겠지만 실제로 창세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더 풍성히 드러나며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기본적인 뜻도 구약에 이미 계시된 은혜 구원이 완성되어서 이방인이든 유대인 모두에게 십자가의 도가 더 이상 미련하게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이 이 땅 전체와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 같이 함께 생육 번성하게 다스리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선한 것이 넘치도록 공급되므로 자연히 그분을 찬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 뜻을 거역하고 인간이 자기 욕심대로 자기만 더 많이 풍부하게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게 되자 죄악 파괴 죽음이 이 땅을 지배하게 되었고 인간에게서 찬양이 사라진 것입니다.
찬양은 죽은 후 천국에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고난 죄악 흑암의 세력이 아예 존재조차 하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뿐인지라 저절로 찬양하게 됩니다. 타락 전에도 그와 같은 상태였으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그분께서 인간의 의무로 명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으로 즉, 당신을 닮은 형상으로 지어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세울 때에 열방 앞에 당신을 증거 하면서 당신의 복을 나눠주는 복의 근원이 되라고 명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완전히 망각해버린 세상 사람들 앞에서 삶으로 그분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찬양은 절대로 아부나 치장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체가 절대적 진리이므로 신자가 그 진리대로 살면 사람들 앞에 당신에 대한 찬양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있으면 그분의 선하심이 다른 이에게도 전해지면서 죽어있던 그분에 대한 찬양의 형상을 다시 일깨울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창조 때의 주신 바로 이 첫째 소명을 지키지 않으니까 아브라함더러 그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에게도 그 소명은 마찬가지이며 하나님을 범사에 감사 찬양하는 것이 구원 받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지금 신앙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죽음 이후 천국 가기 위해서 혹은 이미 믿은 복음이 자꾸 의심스럽고 불안해서 아직도 구원 받는 방법만 취득하려고 합니까? 십자가의 도가 더 이상 미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임을 깨닫고 이 땅에서부터 그 진리대로 따라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진정으로 그분을 찬양할 마음과 열정이 회복되었습니까?
너무 경건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이 예수님의 부활생명을 받게 된 베드로처럼 주님의 온전한 사랑 안에 마지막 날까지 완전히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그에 걸맞게 반응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신체부터 건강하게 보존 유지하고, 기도와 말씀을 통해 정신에 평안 기쁨 감사로 채우고, 삶의 방식이 세상 사람들과 반대가 되었고, 인생의 목표도 하나님이 주신 첫째 소명을 실현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부터 시작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고 있는지 점검해보라는 것입니다.
(5/1/2022)
문화명령이 참 중요한 부분이었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