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7:1-8)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한가?
죄인 구원 담화 (3)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1-8)
원시복음의 두 번째 언약
성경은 죄로 타락한 인류를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 첫 번째 조치로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3:15) 이 약속은 구원에 대한 최초의 약속인데다 그 내용이 기초적이고 모호해서 원시복음이라고 칭합니다. 막상 약속을 받은 아담과 이브로선 언제 어떤 존재가 와서 어떤 일을 수행할 것인지 또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사실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자 극도의 수치심과 공포심이 임했는데 당신께서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시자 씻은 듯이 사라지고 평강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그 약속이 이뤄지면 자기 후손들에게도 분명히 그런 식의 좋은 일이 임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타락과 구원의 체험은 물론 하나님의 이 약속을 자손들에게 열심히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품을 벗어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강조했을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안타깝게도 노아 말고는 아무도 그 약속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경건한 하나님 계열의 사람들마저 먼 장래에 일어날 일인데다 약속의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아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원시복음의 내용이 모호해서 인간들이 타락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하나님으로선 당신의 뜻을 조금씩 더 구체화시킬 필요는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예수님 오실 때까지 당신의 자녀들과 새로운 언약들을 맺고 실현시켜나감으로써 원시복음을 더 분명하게 계시해주셨습니다.
첫 번째로 노아에게 다시는 홍수로 자연을 심판하지 않고 모든 자연환경을 변함없이 창조법칙대로 운행할 것이라고 약속해주었습니다. 동식물들은 물론 그것을 다스리는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은혜로운 축복이었습니다. 본문은 두 번째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으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고 그의 후손에서 나라들이 나오게 된다고 약속했습니다. 노아에게서 다시 인간들이 번성했기에 아브라함이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벨 탑 반역사건 때에 하나님이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온 지면에 흩어지게 함으로써 열국들이 이미 생겨나 있었습니다.(창11:1-9)
아브라함이 중동지역민들의 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후손이 이스라엘이고, 에서의 후손이 에돔이며 친척이긴 하지만 조카 롯과 그의 두 딸과의 근친상간으로 모압과 암몬 족속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중동의 이슬람들도 아브라함을 자기들 조상으로 숭배합니다. 아브라함 개인적으로는 외아들 이삭을 얻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따라서 언약의 핵심은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8절) 첫 번째 노아 때에 하나님은 자연을 홍수로 멸하지 않고 계절에 따라 열매가 맺히도록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즉, 너희가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여건을 마련해주겠고 합니다.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해야 할 바를 한 치의 차질 없이 다 행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으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첫째 언약
그런데 하나님은 훨씬 이전에 아브라함과 언약이라는 명칭만 없었지 내용적으로는 동일한 은혜 언약을 맺은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1-3)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해 하란에 잠시 머물다가 75세 때에 다시 가나안으로 향해 떠날 때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창12:4) 그가 갈대아에서 몇 살에 떠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아도 이 약속의 첫마디가 고향을 떠나라는 말씀이므로 우르를 떠나기 전에도 동일한 약속을 받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자식 하나 없이 나이 75세에 다른 나라로 이주한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엄청난 모험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가나안이라는 특정한 지명을 말하지 않고 단순히 당신께서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고 수시로 죄에 넘어지는 연약한 종이었던 그가 어떻게 그 지시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단순히 믿음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종교적 설명만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당시 상황에 비추어서 개연성 있게 유추해봐야 합니다.
우선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주술사들이 사탄에게 제사 드리고 또 사탄에게서 신탁을 받는 모습을 많이 봤을 것입니다. 본인도 그 사회의 관습과 전통에 따라 우상숭배를 했거나 최소한 그 의식에 참여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산 채로 불에 태워서 바치는 등 그 모든 의식에서 사악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참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아니라 분명히 크게 잘못된 제사라는 인식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계속 살고 있으면 하나님의 큰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그곳을 떠나라는 여호와의 거룩한 음성이 들렸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존재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아무리 신령한 계시라고 해도 여러모로 두렵고 고향에 미련도 남아서 선뜻 따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내가 들은 음성이 참 하나님의 것이라면 내가 확신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해나갈수록 마음에 평강으로 채워지고 기쁨까지 생기자 정말로 참 하나님이 자기를 찾아와 주셨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전까지 자기를 사로잡고 있던 이유 없는 수치심과 공포심도 어느덧 씻은 듯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는데 미련과 두려움이 없어지고 오히려 밝고 활기찬 미래가 기다릴 것 같은 믿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일련의 과정에 성령의 역사가 분명히 강력하게 임했을 것입니다. 노아를 통해 전해져 내려온 원시복음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노아처럼 자기를 당신의 일군으로 삼아 거룩한 일을 시킬 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우르의 음란하고 사악한 우상제사에 절망 좌절하고 있었던 차라 참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라면 자기 인생을 걸만한 충분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가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반복해서 그 언약을 계시하면서 그의 마음이 변화되도록 주관했던 것입니다.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틀림없이 그 명령을 안심하고 받아들여도 될 만한 여건과 상황까지도 조성해 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약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적 주권이 당신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당신께서 그가 가야할 땅을 보여주시고, 당신께서 그로 큰 민족으로 이루게 하고 이름도 창대케 해준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할 일이라곤 단순히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옮긴 후에 받을 현실적인 축복도 동일하게 땅과 친척과 나라였습니다. 사탄이 장악 지배하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이 보여줄 그분이 주관 통치하시는 지역으로 자기 몸뚱이만 옮기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 쪽에선 아무런 자격 조건 공로가 필요 없고 하나님 당신과 동행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옮겨 살아야 할 새로운 곳에서 사람들이 그를 저주하면 하나님이 나서서 그들을 저주해주겠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가 사람인데 하나님이 미리 다 막아주겠다고 하고 그런 하나님을 믿게 되자 이제 가나안 이주가 생명을 거는 모험이 전혀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순전히 믿기만 하면 쉽게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도 성령이 역사하여 심어주었던 것이며 노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시 언약을 맺은 이유
그런데 아브라함이 처음 받은 약속과 본문의 언약이 내용상 크게 다를 바 없는데 하나님은 왜 굳이 정식으로 다시 언약을 맺은 것입니까? 우선 첫 약속은 아브라함 개인에게 주는 축복이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는 언급은 있었으나 후손더러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지시 사항이 없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이 25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실현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실현 불가능한 약속인지라 그 동안 자기 방식으로 이뤄보려다가 실패하고 야단까지 맞았습니다. 나이 99세가 된 본문의 상황에선 하나님이 언젠가는 어쨌든 이뤄주시겠거니 여기고 굳이 신경 쓰지 않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때가 차서 일 년 후에 정말로 그의 몸에서 아들이 나게 해주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이제 곧 아내 사래의 배가 불러올 것입니다. 그럼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실현되고 있다는 가시적 증거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름부터 ‘고귀한 아버지’ 아브람에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 바꾸라고 합니다.(5절)
본문의 언약은 7절에서 대대 후손에게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라고 선언했고 9절 이후에 후대에 그 증거로 할례를 하라고 명령했듯이 실질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맺는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부터 그 언약을 실현하신다는 증표로 일 년이라는 기간을 명시하고 이삭이라고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주면서 내년 이 시기에 이삭과도 언약을 세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21절) 아브라함 75세 때의 첫 언약이 개인적 약속이었다면 99세 때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언약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언약과 아브라함과 그의 나이 75세와 99세에 맺은 언약들을 비교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아브라함과 일대일로 대면해서 일방적 은혜의 약속을 주셨지만 그 내용은 전부 그들 후손들을 축복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그들의 믿음이 가상해서 후손들에게까지 복을 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런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알다시피 결국에는 거꾸로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져 심판을 받아서 멸망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언약들이 실현되지 않은 것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먼저 주도적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겠다고 해놓고 당신의 마음이 바뀐 것입니까? 둘 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크게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을 향한 근본 마음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재앙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나 타락 여부와 관계없이 그러하시기에 일방적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런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창조 때부터 마련되어 있는 원시 복음이 실현되는 모습과 방향으로만 인류의 전체 역사와 신자 개인의 인생을 당신께서 이끌고 가신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7,8절이 바로 그런 내용이지 않습니까? 아주 단순하게 하나님은 당신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이 당신의 자녀로 남아 있는 한에는 원시복음은 물론 본문 언약의 내용이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수시로 생각을 바꿔 먹고 언약을 밥 먹듯이 어긴 것은 인간들, 그것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이 언약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한 가지 조건을 본문 1절에 밝혀놓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는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한 가지만 요구했습니다.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이 완전하게 의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의롭게 살아야 하나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평생을 노력해도 완전해지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마저 자신의 부족함을 두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탄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도 알다시피 절대 완전해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표라도 그렇게 이상적으로 잡으라는 뜻도 아닙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라고 했는데 행한다는 히브리어 ‘하라크’는 걷는다(walk)입니다. 그리고 “내 앞에서”도 하나님보다 앞장서서 먼저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라는 히브리어 ‘파님’은 그분의 면전에서 그분을 대면한다는 뜻이므로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인식을 갖는 것입니다. ‘완전하라’는 히브리어 ‘타밈’에는 순결하며 성실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신실하게 동행해주시고 있다는 순전한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전능하므로 그렇게 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만약 도덕적 종교적인 의로움에서 완전하라는 뜻이라면 나는 전능하다 대신에 나는 의로운 자 혹은 거룩한 자라고 해야 논리가 맞습니다. 이어지는 2절 이후의 말씀들도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주어가 전부 내라는 일인칭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모든 일을 다 주관 통치하시니까 너와 네 후손은 그런 당신만 믿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선악과 금령을 주신 뜻을 더 확대 발전시킨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차 강조한대로 내가 너희들의 모든 삶을 책임져 줄 테니까 제발 나의 품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 언약도 마지막에 내가 너와 후손에게 이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고 또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된다고 두 번이나 강조한 이유입니다.(7,8절)
그런데 하나님은 끝까지 그들의 하나님으로 남아 계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과 자녀의 자리에서 박차고 나갔습니다. 선조 아브라함은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거주지를 옮겼으나 그 후손은 다시 자기들이 떠나온 본향인 사탄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언약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
하나님은 인간이 그럴 것도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은혜의 언약을 계속서 맺는 이유는 우선 원시 복음이 절대 취소되지 않고 계속 유효하다고 깨우쳐주려고 조금 더 구체적인 약속을 맺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원시복음에 약속한대로 사탄의 후손에 맞설 여자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후손마저 타락할지라도 당신의 자녀들을 비록 극소수일지라도 남겨서 반드시 특정한 여자의 후손이 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세 언약을 세우신 뜻과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비교해보면 참으로 엄중한 영적 진리가 도출됩니다. 언약의 내용은 너무나 간단한 한 가지 뿐이었고 너무나 지키기 쉬운 것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든 삶을 책임져주고 자연 환경과 삶의 터전인 가나안 땅을 다 보장해줄 것이므로 그냥 그분만 믿고 따르면 되었습니다. 인간으로선 식은 죽 먹기로 어폐가 있지만 속는 셈치고 눈 감고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도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그 쉬운 일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선 하지 않은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겉으로 형식적으로 여호와를 믿는 것처럼 하고는 속으로 우상을 믿은 것입니다.
그 쉬워 보이는 일을 왜 인간은 그렇게 완악하게 준행하지 않는 것입니까? 성경을 통해 구약시대 모든 상황을 연구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펜데믹 이후에 모든 돌아가는 상황과 최근의 폭염과 가뭄현상을 보면 됩니다. 전 세계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지금 세대가 가장 종말에 가까워졌다고 인정합니다. 단순히 개인적으로 따져도 언제 어디서 무슨 큰 일이 터질지 몰라서 모두가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한 시라도 의지하지 않고는 불안해서 살 수 없을 상황인데도 그분께로 돌아오지 않으며 그분의 실존부터 부인합니다. 신자인 우리가 볼 때는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어리석은데도 그들은 오히려 기독교신자들을 어리석고 의지가 약하고 앞뒤가 꽉 막힌 광신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사람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당장 이 땅에서 나와 내 가족만 세상 어떤 사람보다 높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나에게 그런 축복을 주지 않으면 설령 살아 계시고 나아가 사후에 심판이 따른다 해도 내가 그분을 따를 필요도 이유도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실력을 쌓거나 전문가 권력가의 힘을 빌리는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 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바라는 일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 것 같으니까 그분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분이 내 일을 오히려 훼방하는 것 같으니까 대적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펜데믹과 기후재앙을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막아주던지 최소한 지금쯤은 중지시켜서 고통에서 구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전혀 그럴 낌새도 안 보이는데 굳이 주일마다 교회 가서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것입니다. 거기다 나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의롭게 살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왜 악인은 형통하고 나 같은 의로운 자는 항상 손해만 보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부터 불법 불의에 눈을 감는 불의한 존재인데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나 같은 착한 자가 천국 가는 것이 옳지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지옥 간다고 하니 너무 불공평하다고 비난합니다.
이런 인간의 상태를 자주 드는 비유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부모가 외출하면서 오늘 정해진 공부를 다 한 후에 조용히 놀라고 당부했습니다. 부모가 집을 나서자 순진한 동생은 숙제를 하려 했으나 형이 신나게 뛰며 노는 것이 재미있어 보여서 둘이 함께 실컷 놀았습니다. 너무 신나게 놀다보니 장난감은 물론 집안 가구들이 다 깨어지고 집안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쓰레기로 엉망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놀 수 없고 제대로 앉아서 쉴 곳도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우리만 남겨두고 외출한 부모 때문이며 지금 당장 와서 청소하고 고쳐주지 않으니 부모도 아니라고 비방 대적하는 셈입니다.
이런 인간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하고 어리석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주장이 전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한 술 더 떠서 하박국 선지자처럼 의인인 자기만 손해 본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 탄식은 예를 든 비유의 동생의 불만과 같습니다. 동생이 나는 공부하려고 노력했는데 형이 나를 나쁜 길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에 자신을 비추어보면, 아니 그럴 필요 없이 스스로 솔직히 자기 실체를 엄밀히 따져보면 어느 누구도 감히 의인이라고, 그것도 하나님 앞에 절대로 자부할 수 없습니다. 남들 앞에선 겉으로 의로운 척해도 자신은 자기가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지 알면서도 자기는 의인이라 더 나은 대우를 받겠다고 나서니 그만한 교만과 죄악도 없습니다. 착한 자가 천국 가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이고 하박국의 두 가지 불평도 엄밀히 따지면 사실상 그런 뜻입니다.
택함 받은 신자와 맺는 언약
이번 주에 미국에서 역사상 최고로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서 지구온난화를 개선시키려는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아주 선한 일입니다. 온난화를 지연시키며 환경을 개선시킬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을 실현하겠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인간들이 그 동안 그런 방법을 잘 알면서도 정반대로 행해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기준은 둘째 치고 그분의 형상을 닮은 양심만으로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인간은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죄를 짓는다면 훈련과 교육의 부족도 열악한 환경도 특별히 나쁜 친구의 꾐이 그 원인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항상 악하므로 즉, 철두철미 죄인이라서 죄인 줄 알고도 죄를 지으며 그 중에 가장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짓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고쳐보겠다는 것은 어쨌든 박수쳐줄만 합니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인간이 생존하고 인간사회를 유지하려니까 부랴부랴 최소한의 대책을 마련한 것이긴 해도 말입니다. 인간은 실패하고 좌절해서 고통을 겪어봐야 겨우 고쳐나가는 그것도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려는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모두가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다가 이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 일을 민주당이 주도했는데 뒤늦게나마 개선하려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인간 이성 때문인데도 여전히 그들은 성경의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전의 미국 의회는 이런 국가적 대사에 하나님이 지켜달라는 기도 내지 언급은 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불법 내지 죄라고 이 법을 통과시킨 민주당이 오히려 비난하고 있습니다. 공화당이라고 해서 나을 것도 하나 없습니다. 지구온난화를 막으려는 가상한 노력마저도 인플레이션 같은 경제적 손해가 생긴다는 이유로 전부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두 당이 다 돈만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꼴입니다. 인간인 주제에 자기가 선악의 절대적 기준이 되었고 나아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돌아가는 모든 상황이 성경이 창세기에서부터 계시해 놓은 영적 진리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는 일은 너무나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 당신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진정으로 기뻐하면서 감사 찬양 경배를 돌리라는 것입니다. 열정적 종교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본문대로 당신 앞에서 행하여 완전해지라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영원토록 살아계시기에 그분께 범사를 의탁하기만 하면 됩니다. 굳이 십자가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죄로 타락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땅 끝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를 축복하는 자 축복해주고 그를 저주하는 자 저주한다고 해서 당신의 자녀는 무조건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우르와 하란을 떠날 때처럼 어떤 위험과 고난이 닥쳐도 하나님만 믿고 그분 뜻대로 순종하면 당신께서 맺은 일방적 은혜의 언약을 당신께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분을 따라가는 신령한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며, 최소한 우상숭배라도 하지 않으면 그들도 최소한 여호와가 우상 신들과 전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축복해준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분명히 드러냈는데도 끝까지 그 사실을 대적하면 하나님이 저주해준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당시 로마제국의 음란하고 타락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신령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니까 많은 이방인들도 주님께로 돌아왔지 않습니까?(행2:43-47)
예수님도 신자더러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므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는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명했습니다.(마5:13-17) 하박국 선지자의 영적으로 틀렸고 불경한 두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입니다.(합2:4) 당장 고난이 겹쳐도 그 모든 것이 인간이 어질러 놓은 것이니까 늦게나마 아니 하나님께 언제든 돌아가면 가장 빠른 때이므로 다시 그분 앞에 온전히 엎드리고 그분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교회의 종교적인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신자라면 하나님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눈을 질끈 감고 일단 믿어보라는 것입니다. 일방적 은혜언약이므로 지키지 않으면 심판을 면할 수 없지만 반대로 간단히 지키기만 하면 전능하신 그분 은혜를 맘껏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이들과 그들이 고안해놓은 종교는 인간이 선하니까 인간에게 맡겨두면 모든 것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지금의 상태입니다. 여전히 그 어리석은 고집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던 안 믿던 절대적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끝까지 이 땅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으로 통치하시는 것은 절대적 진리일 뿐입니다.
성경만 유일하게 인간은 철두철미 죄인이 되었고 모든 세대가 언제라도 심판을 받고도 넘칠 만큼 인간이 세상에 죄악을 만연시켜 놓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사람 자체를 바꿔주는 방식으로만 구원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태가 그러하기에 다른 길은 절대 없으며 불가능합니다. 지난 역사와 현재 상황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노아 때처럼 끝까지 거부할 자들이 더 많으니까 택한 자들로만 여자의 후손으로 삼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택함 받은 자가 바로 우리 신자이고 그렇게 택한 이유는 우리에게 예쁜 구석이 있어서가 절대 아닙니다. 초대교회신자들처럼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다른 이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 하나입니다.
지금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십시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행하고 있습니까? 당장 온난화 방지에 모든 재산을 쏟아 붓거나 사도들처럼 목숨 걸고 전도 순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겨도 그분이 나와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분을 순전히 믿고 처음부터 끝까지 맡기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8/14/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