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5:14-17)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가?
죄인 구원 담화 (8)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5:14-17)
너무 먼 아담과 예수
성경은 도덕적 종교적 계명이라기보다는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이 어디서 와서 현재 어떤 상태이고 앞으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계시해놓은 책입니다. 그 여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데 인간의 창조, 인간의 타락, 죄인의 구속, 하나님 자녀의 완성이라는 네 단계로 나눠집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인간 개인의 일생은 물론 인류 역사를 공허했던 태초부터 영광스런 종말까지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거룩하게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강조하는 주제는 그 통치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계시 된 은혜에 따라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본문도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한 죄인의 인생이 극적으로 전환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아담으로 인해 사망이 왕 노릇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것이라고(17절)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정말로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왕 노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끊임없이 닥치는 현실의 고난 해결에 믿음을 소진하다 보니 그런 차원은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종말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실현될 교리로 간주해 희망 사항으로만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했으므로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신자라면 그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추측건대 본문이 말하는 구원 원리를 교회에서 종종 듣고 배웠지만 피부에 와닿는 신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와 시간적 공간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는 아담과 예수를 통해 우리의 타락과 구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르는 태초에 살았던 최초 인간 아담이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을 거역 대적했습니다. 예수도 이천 년 전 먼 이스라엘 땅에서 랍비로 짧은 생애를 살다가 말도 안 되는 누명을 덮어쓰고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이미 죽고 없는 생면 부지의 두 사람과 우리의 구원은 물론 그 이후의 인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쉽게 체감되지 않습니다. 아담으로 인한 심판은 까마득한 조상의 죄로 후손이 벌 받는 연좌제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예수로 인한 구원도 고대 이스라엘의 한 성인이 쌓은 의로운 공로에 그냥 무임 승차하는 것 같습니다.
본문도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14절a)라고 합니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했는데도 같은 벌을 받는다고 하니까 문자적 의미로는 분명 연좌제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15절b)고 했습니다. 구원 또한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 예수로 말미암아 선물로 받았으니 무임 승차한 것도 맞습니다.
대표와 전가
이에 대해선 이미 배웠듯이 신학적으로 대표와 전가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죄로 타락한 첫째 인류의 대표인데 그의 죄가 그 후의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구원받을 둘째 인류의 대표로 그의 의가 믿음으로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이에게 전가된다는 것입니다.
대표 원리란 각 집단을 대표하는 자는 전권을 위임받았기에 그가 행하는 일이 바로 그 구성원들 모두가 행한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왕이 다른 나라 왕과 조약을 맺으면 두 나라 백성이 조약을 맺는 것입니다. 전가(imputation)는 대표원리와 연결되는 개념으로서 대표자의 행위를 구성원의 행위로 간주하기에 당연히 그들에게도 그 일의 의미와 결과가 그대로 옮겨져 동일한 구속력이 발휘된다는 뜻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대표와 전가의 원리를 가장 잘 드러내는 예는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의 제사입니다.(레17장) 선악과 금령에 따르면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피를 흘리지 않고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아담 때부터도 그랬지만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실제로 죽여버리면 어떤 인간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서 모두 죽어 없어져야 하므로 죄의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이 백성을 대표하여 희생양의 머리에 안수하면 백성들의 죄는 죽은 양에게 옮겨지고 그 양이 죽임당해 흘린 피의 공로로 인해서 백성들은 의롭다는 여김을 받게 됩니다. 양의 피를 통해서 백성들의 죄와 하나님의 의가 서로 맞교환되는 것입니다. 대속죄일의 희생양 제사는 나중에 세상 죄를 지고 갈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구원에 대한 생생한 예표였습니다.
하나님이 육체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인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고 말합니다. 아브람이 의롭지 않으나 당신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기에 그를 의롭다고 간주해주었습니다. 바울은 본문 앞의 로마서 4:3에서 본문에서 설명한 구원에 적용되는 전가의 실제적인 증거로 아브람에게 주셨던 바로 그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어지는 8절에서도 다윗의 시편 32:1, 2를 인용해서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구원을 설명합니다. 우리처럼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로 죄를 문제 삼지 않고 의롭다고 칭해준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아담의 후손입니다. 이는 진화론 신봉자가 아닌 다음에는 절대적 진리입니다. 모든 사람은 대표자 아담 안에서 그의 죄책이 전가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이의 한 조상 아담 아래 후손으로 만드신 이상 그가 범한 죄의 구속력도 모든 인류에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대신에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을 빼고 말한 것입니다.
나아가 대속죄일의 희생양 제사에서 예표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람처럼 그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믿으면 의롭지 않은 죄인도 의롭다고 간주해주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많은 사람에게 구원의 선물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 은혜를 믿는 일부 사람만 구원받으나 하나님이 가능한 많은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구원은 인간이 행한 선행 공로 업적이 전혀 없이 공짜로 얻는 선물입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도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의지적으로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 십자가 사역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닫고 그분께 자기 전부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선물은 전적으로 주는 자의 임의에 달렸고 그 대상자가 받기 전에는 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해 회심한 죄인으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으로 예수님을 감사히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입니다.
관념인가 체험인가?
문제는 구원의 대표와 전가의 원리는 아무리 배워도 머리로는 수긍이 되는데 끝까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믿음으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므로 삶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으로 왕 노릇하는 것도 기도해서 고난을 해결 받는 일 말고는 잘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신자의 지성적 능력이나 하나님을 믿는 열정이 부족한 때문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머리로만 수긍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남으로써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났기에 역사적 사실이자 절대적 진리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후로는 자기 인생을 오로지 그분을 위하여 온전히 바쳤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담대하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 안에서 왕 노릇 한다는 것이 모든 좋은 것에 전혀 부족함 없이 누리며 떵떵거리며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항상 의롭고 거룩하며 평강과 자유를 누린다는 뜻도 아니므로 그런 차원으로 접근해선 더욱 본문이 이해하기 힘듭니다. 앞에서 아담 때문에 사망이 왕 노릇한 것과 평행되는 표현입니다. 사망과 생명을 동일하게 주어로 표현했습니다. 사망이 죄인을 주장하여 왕 노릇 하듯이 신자가 왕 노릇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생명이 신자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 믿기 전에는 영적으로 죽어 있었으나 믿고 난 후로는 영적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리 풍요롭고 부족한 것이 없어도 예수가 없었기에 죽은 것과 다름없었으나 지금은 어떤 큰 고난에 처해 궁핍하게 살아도 예수로 인해 더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구원 진리가 바울처럼 실제로 자기 인생에서 사실과 진리로 실현되어져야 온전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진리에 대해 각성하는 관념이 아니고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 이전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실제 삶입니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예수 이전의 삶이 죽음이었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아담으로 인해 나도 천하 죄인 중의 괴수로 사망에 붙들려 있었다고 철저히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연좌제로 아담과 묶인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실제로 그랬다고 시인 자백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올라가 죽었어야 했던 자는 예수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믿음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현재의 인간 사회의 실상만 잘 따져보아도 죄의 연좌제는 틀렸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선하다고 자부합니다. 전도를 해보면 나는 십계명을 잘 지키니까 기독교를 믿을 필요 없다고 반발합니다. 남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고 법을 어긴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선하게 태어나 선하게 살려고 다들 노력하는데 왜 모두가 아담 때문에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하느냐고 크게 반발합니다. 기독교의 대표와 전가의 교리는 말도 안 되는 종교적 궤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개인과 인간 공동체가 만들어내는 결과는 그들의 주장과는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악해지고 최근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종말이 거의 닥쳐왔다고 인정하지 않습니까? 지성 교양 윤리 종교 등이 갈수록 진화 발전되어 가는데 사람들이 선하다면 왜 세상의 타락은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입니까? 결코 인간이 선하지 않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자가당착적인 두 핑계
그럼 당장 주변 여건이 열악하고 세상이 사악해져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된다고 대답합니다. 또 도덕 교육과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 악히기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이는 둘 다 말도 안 되는 자가당착적인 핑계에 불과합니다.
첫째 어떻게 주변 여건이 저절로 먼저 악화될 수 있습니까? 여건은 인간이 조성하는 것이므로 여건이 악화되었다면 악한 인간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악인들이 설치는 것을 하나님이 방치해서 더 악화된 것도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항상 악해도 자연은 끝까지 창조 때의 완전하고도 정밀한 운행 법칙대로 둘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인간이 생활환경 때문에 나쁜 짓 했다고 핑계 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잘 다스려서 관리하면서 사이좋게 나누면 죄가 없고 사랑으로 충만한 세상을 함께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저희가 미국에 이민 와서 너무나 풍요롭고 광대한 자연을 보고 매번 한탄했던 말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면 놀고 있는 모든 땅을 금방 아주 유익하게 바꿀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넘치도록 베풀겠다는 약속은 분명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작금의 지구 온난화는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그 풍성한 자연을 인간이 탐욕적으로 무차별 남획 수탈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인간 육신이 조금 더 편안하게 살려고 온갖 물자를 넘치도록 생산하는 바람에 온갖 공해 물질로 오염시킨 결과입니다.
저희 세대가 어렸을 때는 입을 옷이 귀해서 외국에서 구호품으로 보낸 옷을 배급받아서 입었습니다. 품질과 스타일이 좋아서 뻐기며 입었습니다. 지금 아프리카 후진국들에는 선진국에서 기증한 옷이 너무 많아서 입지도 않고 창고에 쌓아둘 지경이라고 합니다. 선진국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를 돕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 선합니다. 문제는 꼭 필요하지 않은 옷을 유행이나 자기 기분에 따라 양껏 사서 매일 바꿔가며 입다가 싫증이 났는데 버리기 아까워서 선심 쓰듯이 보내는 것입니다. 플라스틱 폐품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는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구는 시름시름 몸살을 앓다 못해 지금 숨도 못 쉴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부조리 모순 죄악 오염 등은 인간이 실컷 신나게 놀다가 생긴 쓰레기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더러 당장 치워주지 않는다고 항변하면 그분을 청소부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청소부 역할을 충실히 했다면 모든 인간이, 당장 저부터도 죽어 없어져야 합니다. 진작에 그랬다면 지구 전체 생태계가 한국의 비무장지대처럼 너무나 아름답고 풍성한 자연공원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환경은 절대로 저절로 악해지지 않고 인간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대표와 전가의 원리로 표현이 죄송하지만 쓰레기가 된 인간 중에 건질 것은 씻어서 건져내고 쓸어서 버릴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도덕적 교육과 훈련이 부족해서 죄를 짓는다고 하는데 그것을 최초로 고안한 사람은 왜 그랬을까요? 인간 세상을 이대로 두었다간 큰일 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선한 규칙을 만들어서 모든 이로 그것을 지키게 해야지 그렇지 않다간 함께 공존도 못하고 당장 망하겠다고 절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본인부터 수시로 범하는 악한 생각과 말과 행동에 스스로도 부끄러워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에게 도덕적 양심이 흔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이 악하기에 여건이 악해졌고 또 그래서 인간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장치로 어쩔 수 없어서 도덕을 만든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대표와 전가의 논리를 단순히 관념적으로 이해하지 말라고 그 앞에 인간의 그런 영적 실상을 먼저 밝혀 놓았습니다.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고 말합니다.(13절a)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으로 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규정해준 것이지 그 율법으로 인해서 없던 죄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죄가 생긴 훨씬 후에 율법을 주었으므로 율법은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기준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었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을 뿐이라고 합니다.(13절b) 인간이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자 자연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심히 부끄럽고 두려워졌듯이 죄는 분명 큰 죄책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게 해놓은 것부터 인간을 거룩하게 이끌려는 하나님의 은혜인데도 그분께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원죄는 분명히 아담이 지은 것이고 그것이 인간 심성에 유전인자로 자리 잡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원죄는 도덕적 죄가 아니라 남들이나 하나님보다 자기를 높이거나 대체하려는 영적인 타락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도 도덕적으로 사악한 성향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성향을 지닌 것입니다.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고도 사망이 모든 이에게 왕 노릇했다는 것도 인류가 보편적으로 그런 영적 인 부패 증상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원죄란 아담과 이브가 그랬듯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죄악을 환경과 도덕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절대로 자신의 내면부터 겸허히 진지하게 되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은 착한데 남들은 악하고 그런 악한 남들 때문에 자기도 간혹 본의가 아니게 어쩔 수 없이 실수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저들과는 달리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이 원죄입니다. 기독교 구원 교리에 반발하며 아담이 지은 죄와 나는 전혀 무관하다고 고집하는 것이 바로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개인적 중생
제가 예수를 믿었을 때 가장 먼저 깨달은 사항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저는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법을 어긴 적이 없어서 정말로 남들보다 훨씬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차가 거의 없는 새벽에 빨간 불에 신호대로 정차하는 차가 있는지 숨어서 지켜보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몇 시간을 허탕 치고 그 정도의 양심적인 사람도 없나보다 하고 포기할 즈음에 한 장애인이 정직하게 정차했고 그 프로그램은 크게 성공했습니다. 저는 그 훨씬 전부터도 보행신호까지 철저히 지켰습니다. 사람들이 예사로 법을 어기는 것이 너무 싫었고 그런 사람들과는 상종도 잘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이었습니다.
그런 저를 한국의 어떤 목사님이 한 가지 비유를 들어서 간접적으로 전도했습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 죄인, 심판, 지옥, 구원, 천국 등등 종교적 용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비유가 암시한 메시지의 결론은 “너는 교회에 나올 자격조차 없는 추악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사람들로부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이라는 칭찬만 들었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다음 주에 이 목사님이 대체 어떤 설교를 하는지 들어나 보자 하고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마침 로마서를 강해하고 있었는데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메시지는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그 의는 쓰레기 같아서 자신을 자랑하려고 일부러 선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저처럼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가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큰 교만이며 죄인지 모른다고도 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들이 세리 창녀 이방인들을 자기들이 만든 규정으로 저주하고 같이 식사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나에게 대놓고 하시는 말씀으로 제 가슴을 비수처럼 찔렀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다른 사람을 내 기준에 판단 정죄하기 바빴던 나는 속은 새까만데 겉만 흰 백로였던 것입니다.
제가 눈물 흘리는 저를 바라보면서 참으로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죄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목사들도 비리 위선을 저지르기에 우습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나고 보니 그때 성령이 역사해서 내 속의 견고한 사탄의 진을 무너뜨려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이르도록 하나님이 이런저런 여건, 사건, 사람들을 통해서 굳게 닫힌 제 심령의 문을 수도 없이 두드렸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제 삶을 되돌아보면서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죄들이 일일이 세밀하게 생각났습니다. 그중에는 아주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는 물론 남들 앞에서 알게 모르게 뽐냈던 것들도 사실은 당사자들에게 큰 상처와 피해를 주었다고 깨달아졌습니다. 지난 삶의 자랑거리마다 오히려 너무나 비겁하고 영악한 탐욕과 이기심이 숨겨져 있었음을 발견하고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하늘을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남들보다 내가 잘 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지난 죄들을 다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선배 사제의 충고대로 따르려 했습니다. 생각나는 모든 죄를 다 회개했더니 시원해져서 이제 구원받았나 싶어 기쁘게 일어났는데 바로 그 순간 더 큰 죄가 떠올라서 다시 절망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제가 바로 그런 상태에 빠진 것이며 내 죄가 너무 진홍 같아서 도저히 씻을 길이 없었습니다. 루터는 온갖 종교적 순례와 고행 끝에 하박국서 2:4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붙들고 로마서를 다시 정독함으로써 생전 처음으로 영혼의 참 평강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계시 된 순전한 십자가 복음의 진리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저도 루터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음을 절감했습니다. 또 다메섹 도상의 바울처럼 예수님이 저를 한 시도 떠나지 않으시고 저에게 딱 맞는 목사님을 붙여주셨고 그에 합당한 진리의 말씀으로 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가 다시 생명으로 살려주었다고 깨달았습니다. 부활 예수님이 사도로 세울 바울에겐 직접 찾아와 만나주셨듯이 동일한 부활 예수님이 저에겐 그분 목사님과 로마서 말씀을 통해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체험적 신앙이 되려면?
혹시라도 본문 말씀이 여전히 논리적으로 이해는 되어도 피부로 와닿지 않아도 절대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먼저 인간들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정말로 진지하게 되돌아보셔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먼저 있어야 하지만 자신의 가난한 영적인 실체를 심각하게 점검해 볼 생각을 하는 것만도 이미 구원을 주려고 예정한 자에게 성령이 심어주신 마음입니다. 인간은 그러지 않으면 절대로 자신의 죄를 정확히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맡긴 양은 한 마리도 잃지 않고 다 구원해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벌거벗겨서 십자가 앞에 내어놓으면 사울이 바울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친부모가 있는데 그 부모를 부인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만큼 그 부모에게 큰 죄는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큰 업적을 이루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은 위인이 많고 남에게 손해 끼치지 않고 법대로 착하게 살려는 일반인은 더 많습니다. 그런 귀한 인생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친부모가 엄연히 있는데도 평생 나는 고아로 살았고 아예 부모는 필요 없고 지금껏 이룬 것도 내가 전부 내 힘으로 했다고 큰소리치는 것만큼 친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없다는 뜻일 뿐입니다.
제가 불신자 시절에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내게 데려와서 보여보라고 큰소리쳤습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분이 없다고 부인하는 너무나 큰 어리석음이었습니다. 또 저의 궁극적인 친부모를 부인한 가장 원초적인 죄였고 나아가 그것이 다른 모든 윤리적인 죄의 시발이었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저도 아담을 두고 연좌제라고 비난했는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각성이 생긴 것입니다. 이전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예수 십자가가 전혀 말이 안 된다고 했으나 이제는 착한 자가 구원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할만한 의인은 한 명도 없으므로 전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친부모가 있다면 가장 먼저 친부모를 찾아야 합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 친부모의 사랑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하나님 없이도 인간은 스스로 선하고 스스로 선해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선한 일들을 행하면 사후에 그 일을 심사해서 구원 준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고아로 버려두었다가 스스로 공부하고 출세해서 찾아와야만 아들로 받아주겠다는 친부모는 없습니다. 친부모라면 큰 죄를 범해 처형될 날만 기다리는 사형수 아들도 먼저 찾아가 사랑을 베풉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뜻하는 바입니다. 반면에 인간이 평생 혼자서 알아서 행했다면 사실상 아무 관계가 없기에 절대자가 아니라 시험점수를 매기는 채점관에 불과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진리를 신학적으로 심각하게 따질 필요 없습니다. 육신의 부모 말고 생명을 주고 지금껏 보호 인도해준 궁극적인 부모님이신 하나님이 있는지 잘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지금도 너를 지켜보고 계시며 거룩하게 살기를 바라시는데 다른 어떤 것에도 핑계 대지 말고 순전하게 그 소원대로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친부모가 있는데도 자기 형통에 방해될까 찾지 않으려고 온갖 핑계를 대는 것부터가 큰 불효이자 죄입니다. 만약 끝까지 하나님을 외면하면 그분과는 아무 관계도 생기지 않으며 그것이 죽음 이후까지 이어지는 것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유일한 구원의 길임에도 예수를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세상 도덕과 종교가 너를 거룩하게 바꾸어주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해준다고 자신하면 그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죄에 찌든 사람들 사이에 더 착하다고 자랑하고 싶다면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정작 하나님에게 받을 은혜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여전히 세상은 이런저런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었다고 믿고서 이런저런 죄를 짓지 않으려고만 노력합니다. 그 성공 여부는 순전히 본인에게 달렸습니다. 그럼 가장 먼저 자신이 그럴 수 있는 능력이 되는지부터 점검해봐야 하나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이미 늦었고 일생 내내 아담 안에서 사망이 그에게 왕 노릇한 것입니다.
그렇게 될 뻔했었던 우리를 예수님이 계속 간섭하시다 결정적으로 먼저 찾아와서 성령으로 새 사람으로 바꿔주었습니다. 천국 영생은 보장되었고 그 후로 예수님의 은혜는 단 한시도 떠나지 않습니다. 신자 인생에는 예수의 생명이 이미 또 영원토록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며 살아야 할지는 너무 자명하지 않습니까?
(9/18/2022)
귀한 은혜의 말씀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