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정경화(正經化) 과정(2)
성경이 66권으로 확정된 것이 겉으로는 인간이 다 한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성령이 그 전 과정에 간섭한 결과다. 그리고 그런 역사는 계시, 영감, 조명, 정경화 네 단계로 나뉠 수 있다고 했다. 이제 각 단계별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1.계시(Revelation)
계시의 의미를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비유가 있다. 아빠가 손에 동전을 감추고 손가락을 꽉 오므리고 있다면 두세 살짜리 아이의 힘으로는 절대 그 손을 펼쳐 보일 수 없다. 아빠가 손을 펼쳐 보여야만 비로소 손에 동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가 손 안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알 수 있는 여부는 전적으로 아빠에게 달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인간이 알려면 오직 그분이 인간에게 스스로 또 직접 보여주셔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분과 인간의 차이는 갓난아이와 아빠의 차이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 간극이 크다. 말하자면 조금만 눈치 빠른 아이라면 모든 상황을 판단해 손 안의 물건을 추측할 수 있다. 또 최소한 손바닥 크기보다는 작은 물건이 있으리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경우는 인간이 그 실체를 도저히 짐작, 상상, 아니 꿈도 꾸지 못한다. 오직 그분이 스스로 자기를 열어주는 방식으로만 그분을 알고 접근이 가능하다. 아무리 인간의 논리적 추론이 정연하거나 철학적 사고가 심오해도 그분의 계시가 아니면 하나님 그분을, 비슷하게는 몰라도, 정확히 묘사한 것이 결코 아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고 보이지 아니하고 썩지 아니하며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분을 어찌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알 수 있겠는가? 그분이 인간의 수준과 능력에 맞추어서 보고 알게 해주지 않는 한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 날도 얼마나 많은, 그것도 최고의 지성과 도덕성을 갖춘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마저 부인하지 않는가? 단지 보이고 들리지 않는다는 전혀 타당하지 못하며 비지성적이고 비논리적인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러지 않는가? 바로 그분의 계시를 받지 못했다는, 아니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마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당신을 보이시려면 계시에 여러 종류와 방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시 같은 비유를 들면 아빠가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나가면 아이는 동전의 한 귀퉁이만 보이다가 차츰 1/3, 반, 3/4 나중에는 전부가 보이며 동전에 새겨진 글자와 무늬까지 알아보게 되는 이치와 같다. 하나님의 계시도 마찬가지이지만, 사실은 그 형식보다 의미를 따져서 크게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의 두 가지로 나눈다.
1.1.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
이는 믿음의 소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다른 말로 성령의 간섭 없이도, 누구라도 하나님 당신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인간의 주위에 이미 베풀어 놓으신 것을 말한다. 이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는데 각기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살펴보자.
1.1.1. 양심(Conscience)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8,19)
먼저 인간의 속에 있는 양심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정상적 인간이라면, 미치거나 미숙아가 아닌 이상, 죄를 지으면 누가 시키지도 않고 따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부끄러워하고 두려워진다. 누구나 겪었겠지만 어렸을 때 천둥 번개만 치면 너무 두려워 자기도 모르게 지은 죄를 고백한다. 비행기 추락 같은 절대 절명의 순간이나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거의 모두가 자연히 지난 일생을 회개하려 한다. 무엇보다도 인종, 문화, 언어, 관습, 지역, 세대, 민족, 국가에 상관없이 불문율이든 성문법이든 그 구체적 방식과 내용만 다를 뿐 예외 없이 윤리적 규정은 다 있다.
심지어 나이와 교육 여부와도 전혀 관계없다. 간혹 윤리적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순전히 교육과 관습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른다. 어쨌든 윤리 규정을 맨 처음 만든 자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는가? 민족과 인종마다 윤리적 성자 내지 천재가 그 것을 스스로 고안하지 아니한 이상 그럴 수는 없다.
그런데 만약 성자 한 사람이 정했다면 나머지 보통사람들로선 자기에게 해당되지 않는 너무 과한 규정이라고 반발했을 것 아니겠는가? 어떤 공동체나 사회든 그 윤리 규정은 구성원 모두가 교육과 전통의 도움 없이 실제 삶에서 보편적으로 느끼고 체험한 것을 서로 토론하고 합의하여 만든 것이다.
죄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이 그 형상을 고의적으로 파괴했기에 생긴 필연적 결과다. 폭행을 하면 남에게 상처가 생겼다든지, 돈을 떼먹으면 빚 독촉에 쫓긴다든지, 범죄의 결과는 현실에서 가시적으로도 드러난다. 신기하게도 아무도 모르고 전혀 들킬 리 없는 감쪽같은 죄에도 괜히 부끄럽고 또 두렵기까지 하다. 성격이 유약한 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자가 그렇다.
그럼 인간은 원래부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죄를 지으면 부끄럽고 떨리게끔 미리 프로그램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동물이 남의 음식을 뺏었다고 반성하는 법은 없다. 인간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을 받아 생령이 되었는데, 아담의 죄로 그 영이 타락했지만 그 흔적은 남아 있다. 만약 영이 죄에 더럽히지 않았다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며 그러면 부끄럽고 두려울 여지 또한 없었다.
인간이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된 존재라면 보편적으로 모두가 죄의식을 갖고 모든 사회에 윤리 규정이 있을 수는 절대 없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는 성경의 선언이 아니고는 어떤 것도 그 원인으로 합당치 않다.
1.1.2. 자연(Nature)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
그랜드케년이나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웅장한 자연 경관을 보면 아무리 불신자라도 잘은 모르지만 조물주는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갖는다.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 반짝이는 현란한 별자리들, 석양 노을의 신비한 색깔, 아침 바다에 해가 떠오르는 장엄한 광경 등을 보면 자연의 너무나 엄청나고도 경이로운 스케일과 또 그에 비춘 자신의 초라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일지라도 아무래도 이 모든 것들이 우연히 생긴 것은 아닐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인간의 능력과 지성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궁극적 존재가 있는 것 같다. 이런 아름답고 장엄하고 신비한 자연세계가 질서정연하게 존재 운행되려면 반드시 그 배후에 설계자(Intelligent Designer)가 있어야만 할 것 같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자연을 봄으로써 이런 단계까지 사고가 진행되지 않는 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진지하게 자연의 기원과 운행 법칙 등을 관찰하다 보면 종교 용어로 구체적인 표현은 하지 못해도 신의 존재성을 도처에서 발견, 최소한 인정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과 그 신성을 만드신 모든 만물에 보이게 해놓았기 때문이다.
1.1.3. 섭리(Providence)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3:11-13)
세상만사가 되어져 가는 형편을 가만히 따져 보면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출생과 사망부터도 자신의 의지나 계획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지구 해 달 등이 운행하는 법칙도 너무나 정밀하고 완전히 인간의 통제 밖이다. 또 그 셋이 지금의 위치와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났다면 인간이 아예 생존조차 하지 못함을 안다. 하나님이 질서 정연하면서도 아름답게, 즉 인간이 살기 너무 좋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자기로선 최고 지성을 짜내어 계획을 수립하고 모든 자원을 동원해 최선의 노력을 했음에도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인 경우가 많다. 불신자들마저 때로는 하늘이 도왔다거나 방해했다고 인정한다. 아무리 재물과 학식과 권력과 명예를 다 지닌 자라도 절대로 자기 뜻대로 인생을 살 수 없고 수없는 고비를 거친다. 한 마디로 눈에 안 보이는 엄청나게 큰 손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지배당하는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비단 개인의 삶에만 국한 된 것 같지 않다. 역사의 중대 전환점마다 인간들이 계획한 바가 아니며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 적이 많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반드시 그렇게 되었어야만 했고 오히려 선이 되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공산제국이 베를린 장벽의 무너짐과 동시에 급작스레 와해된 것이나 최근 피부로 겪고 있는 세계적 금융위기 등이 단적인 예다. 인류 전체의 역사도 어떤 큰 힘에 의해 이끌리는 것 같다.
한 인간의 출생, 거주 환경, 일생 중요 방향 등과 전체로소 인류의 나아가는 큰 물줄기도 인간의 계획과 소망대로 이끌어지지 않는 까닭은 오직 배후에 계신 하나님 때문이다. 인간이 처한 모든 여건과 그 여건 속에 개인의 삶이 영위되고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는 모든 영역에는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섭리가 작용한다. 인류 역사(history)는 말 그대로 그분의 역사(His-story)다. 성경이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 그대로다.
1.1.4. 일반계시의 역할
이처럼 인간은 종교를 갖지 않고도 양심과 자연과 섭리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의 앎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 정도다. 그랜드케년에서 아무래도 조물주는 있는 것 같다고 느꼈어도 믿음은 가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순전히 제 기분대로만 살며 현실적 풍요와 순간적 쾌락만 추구하며 범죄하기 바쁘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인적 관계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반계시로는 창조주라는 절대적 존재가 있고 나는 그분에 의해 피조 된 존재라고까지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분은 이 땅과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하여 있는 존재다. 즉 만물을 만든 뒤에 운행법칙을 그 자체에 내장시켜 저절로 돌아가게 한 후에 아예 손을 떼고 있는 분일뿐이다.
바꿔 말해 단순히 하나님은 조물주로, 자신은 피조물로만 알고 있는 수준이다. 당연히 자신의 삶과 인생도 그 조물주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이 이뤄진다. 그저 자연법칙에 순응하면서 인간사회의 규정과 관습에만 신경을 쓴다. 따라서 지구 환경의 변화에는 아주 민감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1.2. 특별 계시 (Special Revelation)
일반 계시로는 조물주의 존재성만 알지 그분과의 관계성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잘못은 결코 아니다. 마치 아빠가 다섯 손가락 전부를 펴지 않고 일부만 폄으로써 아이가 동전임을 못 알아차리게 한 것처럼, 하나님이 일부러 인간으로 자신을 어렴풋이만 알게 한 것처럼 생각해선 안 된다.
우선 하나님이 당신의 전부를 드러낸다면 너무나 거룩한 그분의 영광 앞에 죄에 찌든 인간으로선 살아남을 자라곤 단 한명도 없다. 그분은 또 너무나 광대하신 분이라 인간의 지성과 영성을 다 동원해도 절대 그분을 다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분은 항상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당신을 낮추어서 드러내신다. 그것도 인간 사이에 온갖 차이가 있기에 각 개인의 수준까지 감안하신다. 정말로 그분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고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으시는 분이다.
“...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핑계치 못할찌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0b-23)
성경은 엄연히 선언하고 있다. 일반계시로라도 하나님을 알게 되면, 즉 자신이 피조 된 존재이며 이 땅과 자기 인생의 실제 주인이 따로 있다면 마땅히 그분에게 감사하고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고의로 창조주 그분은 외면하고 오히려 우상으로 그분을 대체했다. 짐승도 자기 부모를 아는데 인간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도 짐승보다 못한 짓을 저질렀다. 당연히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일 수밖에 없었다.
1.2.1. 예수
그런 배은망덕, 아니 천륜을 어긴 탕자들임에도 하나님은 그대로 두고 보시지 않고 긍휼을 베푸셨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라고 한탄은 하셨지만, 그래도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사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인간이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아니 그분과 원수 되어있음에도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를 감당하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빌2:6-8) 죽으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12:44-46)
예수 안에 하나님은 당신의 전부를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가르침, 사역,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뿐 아니라 그분의 인격과 품성 안에도, 아니 그분의 존재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셨다. 실제로 예수를 본 자는 오직 두 가지 정반대의 극단적 반응을 보였다. 죄인임을 철저히 깨닫고 고백하며 정말로 두렵고 떨림으로 겸비하게 엎드리는 자와 멸시와 미움으로 철저하게 배척하는 자였다. 그분과는 일상적 인간관계가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만 하는 관계만 형성 되었다는 뜻이다. 주(主)로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당신뿐 아니라 인간과 역사를 다스리는 원리까지 다 보이셨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5-20)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7-10)
세상과 인간은 예수로 인해 창조되었고, 인간이 죄로 타락할 줄 알았지만 예수로 인해 자유의지를 허락하셨고, 타락한 인류를 예수로 인해 구속했는데, 세상과 인간 모두를 오직 예수 안에서 충만케 하려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으로 완성될 것인 반면에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으로 멸망케 될 것이다. 인간 개인의 삶 뿐 아니라 인류 전체 역사의 영원한 운명은 오직 그분의 십자가 안과 밖의 둘로 나눠진다.
요컨대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뜻과 계획을 예수님 안에 충만하게 다 밝혀 놓으셨다.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해 더 이상 다른 방도가 필요 없고 인류를 구속하는 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한 인간과 인류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 속에서 보호와 인도를 받는 데에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로 차고도 넘친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절정이자, 완성이었다. 말 그대로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2.2. 성경
그런데 비록 하나님이 예수 안에 당신의 비밀의 경륜을 다 밝혀 놓았지만, 그분이 이 땅에서 살았던 삶은 단지 33년에 불과했다. 육안으로 그분을 직접 보고 하나님의 계시를 깨달을 수 있는 자는 동시대와 지역에서 살았던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그나마 당신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었던 자들은 정말 한줌도 안 되었다. 그리고 그분 앞에도 수천 년 타락의 역사가 있었고 그분 후에도 수천 년간 그 역사는 지속되고 있다.
다른 말로 당대에 함께 살았던 자들도 그분을 알지 못하고 비방 멸시하다가 십자가에 매달았다면 그분을 보지 못한 자들은 더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그분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밝혀줄 다른 방책이 필요했다. 그분의 십자가 계시가 부족해서 보완 내지 수정하려는 의도가 결코 아니라 완전했던 계시를 더 완전하게 인류에게 알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결국 그리스도 십자가에 드러난 당신의 뜻을 말씀 형태로 기록으로 남기셔야 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 1:1-4)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다. 그분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다. 인간이 참다운 생명을 누리려면 오직 예수님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는 길뿐이다. 그분과의 사귐이 없으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육신적 생명은 부지할지 몰라도 기쁨으로 충만해야 할 영혼의 생명은 그러지 못하고 아예 죽어 있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분과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인생에도 아무 소망이 없다.
한 마디로 성경 내용을 줄이면 그분이 오실 것이라고 계속 말하다가 그분이 오셨다는 것이다. 구약은 그분이 꼭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인간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설명한 책이다. 신약은 그분이 오셔서 하신 일과 그 일이 인간에게 미치는 결과를 밝혀 주고 있다. 다른 말로 개인으로서의 인생 전반과 또 전체로서의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당면할 운명과 나아갈 방향이 성경에는 다 드러나 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5-17)
예수로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었다면, 성경으로 그분의 계시는 최종적으로 봉인되었다. 단순히 기록 보존의 목적이 아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이 구원 받고 또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능력과 은혜를 실존적 체험으로 얻기에 충분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1.2.3. 특별계시의 역할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하나님 뜻 안에서 참 인간으로 회복되어서 사는 길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것뿐이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분과의 인격적, 체험적, 개인적, 실제적 교제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받아 누릴 수는 절대 없다. 그래서 예수와 성경을 일반계시와 구별해서 특별계시라고 부른다.
인간은 성경에 드러난 예수님의 십자가에 자신을 비춰볼 때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빠져 있는지 통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다함없는 은혜와 조건 없는 사랑 없이는 인생에 아무 소망이 없음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 항복하고 엎드리게 된다.
이처럼 특별계시는 한 죄인이 구세주를 만나 영접케 한다. 인간으로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게 한다. 말하자면 이 땅에 존재해야 할 궁극적 이유와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이제는 그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결단하고 헌신하며 실천케 만들어 준다. 평생토록 오직 하나님을 감사, 찬양, 즐거워하면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주위에 선전하는 것만으로 삶의 목표가 바뀌게 한다.
일반계시에선 단지 조물주에 불과했던 하나님이 창조주요, 구속주요, 운행주요. 완성주가 된다. 창조로 시작되었으므로 마지막 심판으로 끝날 것이며 그 심판 기준이 십자가 보혈뿐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예수만을 주로 삼아 그분과 함께 걸어가게 한다. 일반계시가 아주 초보적인 피조물 의식을 갖게 했다면 예수와 성경의 특별 계시는 진정한 피조물 의식으로 바뀌게 한다. 정말 연약하고 무능하며 불완전할 뿐 아니라 죄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기라는 존재가 이제 하나님의 친백성이자 자녀가 되어서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유업을 이어받게 되는 것이다.
10/19/2008
특별계시 부분에 유독히 더욱 더..
또 다른 성경을 표현하는 부분에 대한
모든 책들은 독자가 읽지만
오직 성경만은 독자를 읽는다.
마침 데만목사님의 시편 139장을 중심으로한 성경에 대한 좋은 설교문이 있어 번역해야지 하고 맘만 먹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