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타락 담화 (Corruption Narrative)

 

인간의 타락을 논하기 전에

 

자유의지가 타락의 원인?

 

하나님은 당신을 대신하여 피조세계를 거룩하게 다스리게 하려고 인간만은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했다. 또 그래서 인간이 다스려야 할 피조세계를 먼저 창조한 후에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셨다. 인간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여건과 필요한 모든 것들을 미리 넘치도록 마련해주신 것이다. 창조는 당신의 뜻과 계획에 완벽하게 부합되었으며 특별히 인간을 창조한 후에 심히 기뻐하셨는데 인간에게서 감사 찬양 경배 받기를 소원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청지기 직분을 잘 수행하려면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해주고 인간도 그 뜻을 이해 수용 순종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최초 인간인 아담과 이브에게 직접적인 계시로 인간의 이 땅에서의 생존할 목적과 평생토록 행해야 할 임무를 알게 해주었다.

 

그러나 당신에게 무조건 의무적 기계적으로 복종하게끔 강요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자의적 판단과 결정에 따라 기꺼이 그 직분을 감당하도록 하셨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부여해 놓은 본능에 따라서만 행동하게 했으나 인간은 스스로 분별 선택 결단 시행할 수 있게끔 자유의지를 부여한 것이다.

 

하나님은 또 인간이 당신을 진정으로 따르고 있음을 시험할 수 있는 선악과를 에덴동산 중앙에 두었다.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할지 판단 결정했다면 선악과를 절대 따먹지 않음으로써 그 사랑을 증명해 보여라는 뜻이었다. 그러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으며 반대로 어기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최초 인간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사탄의 꾐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나님과 맺은 사랑의 언약은 무효가 되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 그 결과 아담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그분을 거역하는 죄의 본성을 지니게 되었고 인간 사회의 모든 모순 갈등 다툼 고난 등이 생기게 되었다.

 

타락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 보았는데 한마디로 아담 부부가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고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아담이 하나님 대신에 사탄을 따랐던 이 사건만 없었다면 현재 인간사회의 온갖 문제도 없었을 것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동산에 주지 말았어야 했다는 반발을 필두로 온갖 의심과 반론들이 꼬리를 물고 생긴다. 선악과 금령을 두려면 사탄이라는 존재를 처음부터 생기지 않게 해야 했고, 생겼다 해도 아예 동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탄이 동산에 접근했어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지 말았으면 사탄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며, 심지어 아예 인간을 하나님만 따를 수 있게끔 만들어야 했다고 따진다.

 

요컨대 이 땅의 모든 문제의 원인인 선악과와 자유의지 둘을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으면 인류는 지금 아주 선하고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래 전 한국의 한 기독청년에게서 이런 의견들을 망라하는 질문을 받았는데 아래에 원문대로 인용해보자.

 

한 기독 청년의 풀지 못한 숙제들

 

“저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20대의 한 청년이며 길지는 않지만 제 인생 동안 정통교단에서 늘 하나님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들었던 생각이 있는데 그에 대한 답이 아니더라도 뭔가 방향만이라도 제시해주시는 분이 없어서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찰나에 목사님께서 운영하시는 사이트를 우연치 않게 보게 되어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메일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민하는 바는 다름이 아니라 '선과 악'입니다. 과연 무엇을 선이라 할 수 있고 무엇을 악이라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단순히 같은 행동이라 할지라도 악한 마음을 품고 행하는 것이 악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선인 그런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과연 왜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셨는가'가 저의 생각의 시작입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이라는 개념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잘못된 인간의 행동을 벌하시는 모습이 구약에 여러 번 나옵니다. 까닭 없는 '화'를 내지 않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1) 그렇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까지 타락하고 악으로 가득차 가는 상황에서 왜 그들을 직접적으로 벌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다른 분들께 여쭸을 때 들은 대답으로는 "만일 직접 개입하시면 살아남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였습니다.

 

하지만 이건 분명한 모순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도전한 이들이 세운 바벨탑도 건설 중반에 가서야 무너뜨리셨으며, 모세가 출애굽을 하던 시기에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던 애굽은 엄청나게 많은 잡신들을 우상으로 섬기는 나라였습니다. 하물며 노아 때에 물로써 모두를 멸하셨지만 노아 또한 무결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나라들도 궁극적으로는 완전히 멸하시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분명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악한 자를 처벌하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기준을 인간이 만들 수 없겠거니와, 크신 주의 뜻을 알 수 없어 답을 찾을 수 없다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또 다른 궁금증이 떠올랐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으로 알고 있지만, 어찌 선하신 분께서 악이라는 존재를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럼 완전무결하게 선한 존재가 아니거나 혹은 하나님 스스로로부터 악이라는 존재를 떼어내어 스스로 선한 분이 되신 것인가 하는 의문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3) 만일 악을 하나님께서 만든 것이 아니라 루시퍼의 타락이 그 시초라 한다면, 왜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는 그 악의 근원을 멸하지 않으시는지도 궁금합니다. 현시대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은 지금도 세상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많은 괴로움을 참아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저희를 진정 사랑하는 자녀라 생각하신다면 괴로워하는 자녀들을 위해 근본적인 악의 뿌리를 뽑으시는 것이 옳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유의지를 통해 진정한 섬김을 받고 싶다는 하나님의 뜻은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마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뱀 자체를 처음부터 없애버렸으면 '원죄' 라는 것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 앞서 '선악과'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면 이러한 일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곳 세상이 하나님과 사탄이 겨루는 거대한 게임이 아니라고 한다면, 왜 악을 멸하지 않으시는지, 자녀로 삼은 혹은 앞으로 삼을 인간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그저 '때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보고만 계시는 것인지, 납득하기 너무 어렵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대단히 교만한 생각일 수 있겠지만 정말 저는 너무나 알고 싶고 간절한 마음에 이렇게 메일을 드립니다. 온갖 죄악으로 타락한 세상과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을 오만방자하게 자행하고 있는 현 세태를 볼 때에, 또 그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하는 저로선 너무나 무섭고 화가 납니다. 때로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알게 모르게 그 세태에 동화되고 있는 것만 같아 너무나 두렵습니다.

 

질문의 범주를 넘는 질문

 

많은 신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의문들인데 간단하게 다시 정리해보자.

 

“선과 악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선과 악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가? 구약에 심판기사들이 나오는데 까닭 없이 심판을 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 기준은 무엇인가? 지금도 많은 악과 악인들이 있는데 왜 심판하지 않는가?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만들었는가? 그럼 하나님은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닌 것인가? 아니면 그 악과는 초연한 존재인가? 악의 근원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라면 왜 처음부터 차단하지 않았는가? 근본적으로 악의 뿌리를 뽑아야만 오늘날에도 죄악으로 괴로움을 겪지 않을 것 아닌가?”

 

이제 논의를 시작하려는 타락에 관한 담화는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을 얻어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 첫 순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선악과 명령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살피기 전에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갖는 더 근본적인 의미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어떤 명령이든 그 실행 여부는 우선적으로 명령을 내린 자와 그것을 실행할 자의 관계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명령의 내용과 그 실행의 난이도는 이차적인 문제다. 예컨대 전쟁터에서 상급자의 명령은 하급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며 만약 불복하면 현장에서 즉결처분을 받는다. 이런 상황과 관계는 통상적인 명령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이처럼 명령은 반드시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주는 것이며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명령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 동등한 신분과 위치에서는 명령이 아니라 권면일 뿐이다. 따라서 상급자의 신분과 위치에 따라 그 명령의 내용이 갖는 중요도는 크게 달라진다. 예컨대 사장, 부장, 직속상관, 다른 부서 부장 등 그 직급에 따라서 직원이 느끼는 명령의 중요성과 실천하려는 의지의 세기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선악과 금령도 그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이런 관계부터 먼저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그 모두를 당신의 뜻대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일개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신 명령이다. 아무리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에 최고 차원의 이성 지성 감성에다 영성까지 갖추고 피조 세계를 다스릴 직분까지 받았어도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도무지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있고 조금이라도 닮거나 비교될 차원도 전혀 없다. 따라서 선악과 금령도 이런 관계를 먼저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 한다.

 

이미 다른 글에서 밝힌 예이지만 이해하기 쉬우니까 다시 들어보자. 어떤 총각에게 “당신의 아내는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물으면 묻는 사람이 바보이고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총각은 결혼하지 않아서 아내가 없는 사람을 뜻하는데 아내가 어떤 사람이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많은 신자들이 이런 비슷한 종류의 질문들을 많이 제기한다. 예를 들면, 태초 이전에 이 땅을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등이다. ‘태초’라는 말 자체가 시간이 시작되는 최초의 순간이라는 뜻인데 그 이전을 가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틀렸기에 질문으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인데 창조 이전이라면 인간도 없다. 그럼 설령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이 있다 쳐도 존재조차 않는 인간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간이 제기할 필요도 이유도 없는 질문이자 아예 질문으로 성립되지도 않는다.

 

엄밀히 따져서 기독청년이 제기한 상기의 질문들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권능에 속한 문제를 두고 질문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은 하나님의 실수 내지 잘못이 아닌가, 더 좋은 다른 방식이 없었는가라고 물었다. 자유의지를 주지 않았다면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 지금도 죄악과 고통이 없는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비유를 하자면 사람은 자기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지 못해서 너무 답답하니까 하나님이 왜 앞만 볼 수 있게 눈을 두 개만 만들었는지 식의 질문과 다를 바 없다. 이왕이면 눈을 뒤에 두 개, 좌우 옆에 두 개씩 더해서 총 8개의 눈을 만들어서 360도를 다 볼 수 있게 해야 하지 않느냐는 불만과 동일하다. 인간은 이미 두 개의 눈으로 태어났고 아무리 해도 세 개 이상의 눈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논의할 의미는 물론 필요가 없는 의문으로 평생을 논의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다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더 이상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수 없고 그 근본적인 구조를 인간 스스로는 절대 고칠 수도 없다. 영원토록 이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내 아버지가 평범하고 가난한 회사원이 아니라 이왕이면 재벌회장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한탄하고 소원해 봐도 죽을 때까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과 같다. 하나님이 이미 그런 아버지 밑에 태어나게 했다.

 

모든 문제의 출발과 해답은 하나님이다.

 

학술적 논문에는 서론에 논의할 주제와 범주는 물론 사용할 단어의 정의와 추론하고 연구하는 방식 등을 먼저 밝혀 놓아야 한다. 특정 문제에 대한 소기의 결론을 얻어야 하므로 그 논리적 과학적 추적의 궤적이 주제 자체가 내포 함의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기 위해서다. 더 중요하게는 모든 연구가 특정한 전제 즉, 이미 세상에서 인정하는 절대적 공리나 기존에 이뤄진 다른 연구결과들을 바탕으로 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확장해 나가기 때문이다.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완전 백지 상태에서 논의하는 것은 없다.

 

동일한 맥락에서 신앙상의 논의도 그런 전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무조건 믿음의 문제는 은혜로 접근 수용하면 되지 왜 학술적 연구와 같은 방식으로 따져야 하느냐는 반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어쨌든 특정 주제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 이상 그에 합당한 해답을 도출해야 한다. 현실의 시험이나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거나 그 이전에 성령으로 거듭나서 죄에서 구원 받는 차원과는 다르다. 질문의 성격 자체가 논리적 해답을 요구하니까 해답도 논리적으로 합당해야 한다. 요컨대 상기에 제기된 여러 질문들에 대해 그냥 믿음을 갖고서 은혜라고 수용하고 넘어가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신앙 질문들에 대한 전제는 아주 간단하다. 모든 질문에 대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속성과 권능에 비추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 당연하고도 명백한 이치다.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분이 창조한 이 땅과 인간도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분이 세상만사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비유처럼 평범한 회사직원인 아버지와 그 아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럼 아들이 다른 아버지를 달라는 불평과 한탄은 아무 소용없고 아예 대꾸할 가치도 의미도 없다. 지금의 아버지를 떠나서는 부자간의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 아버지에 대해 여러 의문 불평 원망이 든다면 아버지의 현재 위치 신분 성품 기질 인생관 등등을 살펴봐야만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내 마음에 드는 답을 얻으려고 아버지를 바꿀 수는 없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갖는 모든 신앙상의 질문에 대해 궁극적인 답변을 주실 분은 하나님이며 모든 신앙상의 질문들이 사실은 그분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모든 신앙적인 논의의 출발점이자 전제다. 실제로 완전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내고 인간 세상에 1+1=2 같은 절대적 공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다.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의 해답은 그분이며 그분 외에 온전한 답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신앙상의 의문들은 은혜로 받아서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되지 논리적인 추론이 필요 없다는 생각은 틀렸다. 하나님 그분이 공리를 만들만큼 아주 논리적인 분이다. 그런 논의들의 시발점부터 하나님 그분을 깊이 추적해나는 것에 두어야 하고 또 그래서 그런 논의가 오히려 더 은혜로울 수 있다.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진리 위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믿음도 더 견고히 성숙시킬 수 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베드로 사도는 불신자가 예수 믿는 진리에 대해 질문 비평 반발할 때에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명했다. 그런 질문들에 그냥 은혜로 믿기만 하면 된다고 답할 수는 없지 않는가?

 

지금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를 거론한 이유는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의 타락을 알려면 선악과 금령을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하나님을 모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논의하기 전에 그 논의의 범주부터 정해 놓아야 한다는 뜻인데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0/8/2020)


날마다순종

2020.10.08 14: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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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0~21) 

 

많은 이들이 서두의 기독청년과 비슷한 궁금증들을 한번쯤은 가졌을 터인데, 불신자의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크리스찬이라면 이 예가 상기 질문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라는 있을지 모르는 반문에 대한 바울사도의 상기 대답이 너무나 수긍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사람과 토기는 다르지만 그 말하고자 하는 의미로는 솔직히 제가 느끼기엔 토기장이의 비유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비교적 쉬이 수긍할 수 있는 비유라 보여집니다^^

(사족을 달면 이 비유로 또다시 그건 공평치 못하다는 불만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귀하건 천하건 그건 이땅에서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본 가치판단의 기준일뿐, 하나님 그분께서는 그 각각의 용도만 다를뿐 똑같이 동일하게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그릇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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