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로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편:150편)
신자가 현실에서 온갖 문제와 고난을 겪을 때에 아무래도 손이 제일 먼저 가는 성경은 신구약 66권 중에 시편일 것이다. 심지어 불신자들도 하나님이 우리를 푸른 초장에 누이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당신의 지팡이로 안위하신다는 시편 23편을 암송할 정도이지 않는가?
시편을 먼저 찾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시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에 개입하여 개인의 삶과 공동체를 보호 인도했던 체험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적은 책이기 때문이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는 고난, 상처, 질병, 재앙, 전쟁 등이 끊어질 날이 없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로선 그분 앞에 자신들의 당혹감과 염려는 물론 슬픔 억울함 의심 분노 불만 불신 등을 그대로 쏟아놓게 된다.
오늘날의 우리도 그들과 동일한 성정을 지녔고 인생의 고초는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스라엘이 겪은 동일한 신앙체험을 한다. 하나님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아 의심하고 불만을 갖다 때로 불신 외면 거역까지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 외에는 해답이 없음을 알기에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같은 신앙여정을 걸은 시편 기자들과 그 심정이 통하는 것이다.
시편은 그래서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온갖 불만을 토설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혹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베푸신 긍휼과 권능을 회상하며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재확인 한다. 그래서 지금 상황은 물론 앞으로도 그분의 큰 사랑 안에 붙잡혀 있음을 확신하고 그분에 대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로 마친다.
잠언이 인생을 이성적으로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는 윤리적 지혜를 주는 책이라면, 시편은 인생에서 느끼는 감정의 기복을 통제 조절할 수 있게끔 위로와 힘을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총 150편으로 이뤄졌는데 본 150편은 시편 전체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이 하나님과 일생에 걸쳐 동행할 때에 생기는 감성을 다스리는 책이라면 그 결론인 본150편은 그야말로 인생을 즐겁고 기쁘게 살 수 있는 최고의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기자는 한마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그럴 수 있는 최고 아니 유일한 길이라고 선언한다. 먼저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한다. 성소는 성막과 성소 요즘으로 치면 교회예배당인데 찬양해야 하는 장소를 지정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만 찬양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런 곳은 하나님을 경배 찬양하러 모이는 곳이다.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은 다 그분의 성소이다. 그분이 임재하지 않은 곳은 단 한군데도 없다. 성도들의 모임, 직장, 가정뿐 아니라 성도 혼자 있을 때도 바로 그곳이 성소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그분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일상생활이 찬양의 삶이어야 한다. 설령 혼자서 쓸쓸히 인생의 쓴 맛을 보고 있을 때라도 그분의 임재를 절감하면 그분과 영적교제가 가능하다. 또 그 교제가 정말로 순전하다면 그분을 경배 찬양할 수밖에 없는 위로와 은혜가 넘친다.
기자는 또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하라”고 한다. 찬양해야 할 동기와 내용이다. 그분의 광대하심과 능하신 행동 즉, 그분이 어떤 분인지와 그분이 내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지 알면 알수록 신자의 반응은 감사 경배 찬양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그분을 잘 모르면 의심 불평 불신으로 흐르기 쉽다.
찬양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칭찬(praise)한다는 것이다. 칭찬의 대상은 상대의 장점이나 좋은 일을 행한 것이다. 단점과 나쁜 일을 칭찬하는 법은 없다. 결국 신자가 하나님의 좋은 점과 내게 좋은 일을 행한 것을 알아야만, 어폐가 있지만 그분에 대한 칭찬이 가능하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사건을 반복해서 회상하는 것은 그분의 좋은 점과 좋은 일이 그 사건에서가장 잘 두드러지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출애굽을 회상만 하면 현재 어떤 어려운 일을 겪고 있어도 그분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찬양까지 가능해진다.
기자는 또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그분을 찬양하라고 한다. 신자는 찬양할 수 있는 모든 기구를 동원하고 최고 수준의 찬양을 드려야 한다. 그런데 춤을 추며 찬양하라고도 한다. 지금부터 3천 년 전이다. 현대교회의 예배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활기찬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최선과 최고의 찬양을 드려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거기다 춤까지 추라는 것은 찬양을 드림에 어떤 격식과 방식의 제한이 없다는 뜻이다.
오늘 추수감사절인데 한국으로 치면 추석이다. 부모님에겐 모든 자식이 귀중하고 사랑스럽다. 돈을 잘 버는 장남이 인삼뿌리에 해외여행권까지 선물하면 너무나 좋아하신다. 그럼에도 더 좋은 것은 군대에 간 막내아들이 아무런 선물도 없이 달랑 손으로 쓴 편지 한 장이 더 눈물 나게 좋을 수 있다.
부모가 아들을 차별 혹은 편애한다는 뜻은 아니다. 자식 한 사람 한 사람 다 귀하다. 그들을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그들 사정에 맞게 사랑하는 것이 부모다. 자식도 자기 형편에 맞게 부모를 사랑하면 된다. 하나님이 신자를 사랑하는 방식도 동일하다. 어떤 신자라도 편애 차별하지 않으신다. 세상에 단 한 명이 있는 것처럼 은혜를 베푸신다.
많이 바쳐야 많이 받는다는 원리는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는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는 것을 가장 기쁘게 받으시고 대신에 그분은 당신의 모든 것을 신자에게 아낌없이 주신다. 하나님과 개별적으로 친밀하게 일대일의 관계를 이어가는 자는 그분께 감사 찬양 경배치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찬양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양하라고 했다. 이는 시편의 결론 격인 150편의 결론이므로 시편 전체의 결론 중의 결론이다. 희로애락이 끝없이 교차하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한 줄의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양하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하나님께 마땅히 보일 반응은 찬양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호흡을 주셨음 즉,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찬양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호흡이 있을 동안,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그분께 감사와 경배를 돌리라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인생을 찬양으로 시작해어 찬양으로 마감할 수 있는 자를 말이다. 해보라. 정말로 그럴 수 있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행복하고도 가장 크게 성공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이런 인생보다 더 복된 인생은 도무지 있을 수 없지 않는가?
그런데 신자에겐 한 가지 의미가 더 있다. 추석에 부모에게 주는 선물 중에 진짜 최고의 선물이 따로 있다. 부모로선 평생에 한 번밖에 못 받는 선물이다. 그것 이상의 선물은 있을 수 없다. 자식 중에 매번 사고만 치고 갱들과 어울려 마약 폭행 도적질을 일삼다 교도소에 들어간 아들이 있다 치자.
그가 감옥에서 예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를 만나서 지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이전의 썩어질 옛사람은 죽고 그분의 의로움을 덧입은 새사람으로 다시 거듭났다. 교도소 내의 갱생 프로그램에 들어갔고 직업훈련도 받으면서 부모님에게 그동안 잘못한 모든 죄 용서해달라고, 두 번 다시는 갱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제부터 건전한 사회인으로써 최선을 다할 것이며, 특별히 하나님 뜻에 순종 헌신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부모로선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있을 수 없다. 평생에 한 번 있는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아들이었다. 미혹되어 길을 잃어버린 양을 다시 찾으면, 집 나간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늘에선 하나님이 잔치를 벌인다.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자 평생에 한 번 있는 최고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 믿어 거듭나는 순간 신자는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 말하자면 육신의 호흡보다 영적인 호흡이 더 중요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거나 멀어지는 순간 세상에서 아무리 형통해도 그 영혼에 감사 찬양은 사라진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신자의 찬양이다.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 나아가 그분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동역하는 것이 바로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다. 주님 나라에 가서 주님과 얼굴을 맞대면 하는 그날까지 이미 소유한 영원한 생명에서부터 나오는 영적 호흡 즉, 영혼의 찬양을 언제 어디서나 드려야 한다.
하나 더 보탤 것이 있다. 성소에서 찬양하고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찬양하라는 것은 결국 공동체로 모여서 찬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돌아온 탕자나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양들이 함께 모여 당신을 찬양하기를 가장 원하신다는 뜻이다. 혼자서 그분께 감사 경배 찬양을 드려선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 전체가 그분을 찬양함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그러나 신자가 혼자 있을 때는 아무래도 게을러지고, 자기 욕심과 죄의 본성에 넘어지고, 흑암의 세력에 강력하게 대처하지 못할 수 있다. 서로 주님 사랑으로 섬기고 함께 그리스도를 닮아 자라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세워지고 확장되어질 때에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더 많이 받게 된다. 그럼 감사와 찬양도 더 넘치게 된다.
요컨대 불신자들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겠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이다. 정말 호흡이 있는 자라면 호흡이 있을 동안 호흡이 있는 것만으로도 찬양해야 한다. 특별히 신자는 영적인 호흡으로 시작해서 영적인 호흡으로 마쳐야 한다. 삶이 찬양 그 자체가 되는 인생이 가장 행복하고 성공한 인생이다.
12/2/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