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7-11)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신다는 진술에 이의를 달 신자는 아무도 없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기에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대신해 죽이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은혜에 우리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그 후로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단하고 나름 열심히 실현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그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한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선언했다. 하나님과 사랑을 완전한 동격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할 때는 인간의 사랑 행위와 마찬가지로 당신만의 뜻과 계획을 갖고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행동한 것이 된다. 그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있을 때도 있으며 심지어 미워하는 생각과 행위를 할 때도 있다는 뜻도 당연히 포함된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사랑 자체가 하나님이거나, 하나님에게 사랑 외의 속성이 하나도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신자를 향해 행하시는 모든 보호, 인도, 간섭, 동역 전부에 사랑의 뜻과 사랑의 과정과 사랑의 결과가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뜻이 된다. 그분이 나를 구원하시고, 아니 그 전에 택하시고 준비 양육하셨다가 성령으로 간섭하여 거듭남의 은혜를 통해 영생을 주시고 구원 이후의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오직 사랑으로만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진술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된다. 인간을 포함한 어떤 피조물도 그 존재의 정체성을 한단어로 혹은 가장 잘 묘사할 때에 사랑이라고 할 수는 절대로 없다. 인간의 사랑만 해도 스스로 생각해도 얼마나 얄팍하고 치사하며 부족 부적절 불합리하며 비상식적인가? 일관성조차 눈 닦고 찾으래야 찾을 수 없고 상대와 여건에 따라 그저 럭비공처럼 제멋대로 튀지 않는가?
그분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객관적으로 그 사랑의 특성을 아무리 잘 규정짓는다 해도 이미 불충분한 진술일 수밖에 없다. 또 어떤 진술이라도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심지어 그분에게 모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제한되고 어리석은 이성으로나마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감히 설명해보기로 하자.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뜻은 그분의 사랑에 시작과 끝이 없다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사랑 그 자체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31:3)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무궁한(無窮, everlasting) 사랑으로 사랑했다고 한다. 무궁하려면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치의 가감 수정 왜곡 타협 포기가 없어야 한다.
그분 당신께서 사랑이기에 우리의 사랑으로 인해 그분의 사랑이 발현된 것이 아니다. 요한이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해서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한 것이다. 사랑은 먼저 아무 조건 없이 전혀 사랑할만한 상태가 아님에도 사랑해야 참 사랑이다. 바꿔 말해 당신을 사랑하는 자만 사랑해주면 사랑이 아니다.
영원하신 사랑은 그 사랑의 질과 양에서 변함이 일절 없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분이 사랑이라고 하는 말을 잘 음미해보라. 그분이 만약 사랑을 끊으신다면 당신의 당신 되심도 끊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잃기에 더 이상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아서 우리도 더 이상 경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로 온전한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기에 우리의 전부를 바쳐 경배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끊으면 하나님의 정체성 자체가 상실된다. 그럼 우리가 문제, 실망, 좌절, 상처, 고난, 절망 가운데 있을 때에 그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거나 침묵 내지 부재하는 것 같다는 의심 불만 불신은 아예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약 그분의 사랑이 실종 변색 퇴색 되면 이미 그분이 아니다. 우리 믿음이 존립 유지할 근거가 상실된다. 만에 하나 우리 고난 가운데 그분이 우리를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귀찮아하거나 손을 놓고 있거나 아예 침묵하고 있거나 외면하고 있다면 그분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하나님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가 죄인 즉, 당신을 배반 거역하고 있을 때에도 그분은 당신의 독생자를 죽일 만큼 우리를 사랑했다.
인간도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는 죽을 수 있다. 자식과 친구를 살리려고 자신을 희생하는 자들이 많다. 심지어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도 어린이나 노약자를 대신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원수를 대신해서 죽는 것은 외부적으로 불가항력적인 강압이나 여건이 조성이 되지 않는 한, 다른 말로 결코 자의에 따라 기꺼이 죽지는 않는다. 원수는 반드시 원수를 갚아야 한다. 도무지 그럴 형편이 안 되면 모른 척 외면한다. 아주 의로운 사람이라도 용서해주는 대상은 되나 원수 때문에 나아가 원수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다르다. 원수의 죄는 아주 미워하시나 원수인 인간은 지극히 간절한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또 그 원수를 반드시 거룩한 사람으로 새롭게 변화시킬 계획과 능력이 있기에 하나님은 원수를 대신해서 죽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어서든 만에 하나 정말로 원수 대신에 죽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원수를 완전히 새롭게 바꿀 능력은 인간에겐 없다. 그러기에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원수를 위해 죽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기꺼이 자원하셨다. 단순히 죽음을 자원해서가 아니라 그럼으로써 당신과 원수 된 자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기에 죽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또 바로 그런 사랑은 하나님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런 사랑은 인간의 지성으로 한계를 지을 수 없다. 측정이 불가능하다. 증명도 할 수 없고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과 연약한 믿음과 너무나 어리석은 영적지혜로는 온전한 추적마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 수 없기에 그저 은혜를 받아드리고 누리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구체적인 측면을 헤아리려고 노력은 마땅히 해야 하지만 우리 이성과 믿음 안에 그분 사랑을 정확히 알 수 없기에 그 전부를 완벽하게 포용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너무나 확고한 진리이다.
이 진리를 바탕으로 인간은 그 분 사랑을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해 최선을 다해 헤아릴 수밖에 없다.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최대한 헤아려야 한다. 또 그렇게 헤아린 만큼이라도 사랑을 제대로 절감하고 체험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면 그냥 단순히 그분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너무나 평범한 믿음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하나님 그분이 사랑이라는 이 진리까지는 알지 못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만큼만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되 네 가지 차원에서 즉,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잘 깨닫게 되기를 바울은 기도하고 있다.
사랑이 넓다는 것은 주님이 사랑을 베풀 대상에 관한 차원이다.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과 모든 장소에 그분의 사랑이 임한다. 주님의 사랑이 임하지 않는 사람, 사건, 장소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의 사랑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피조물과 피조세계는 단 하나도 없다.
길이는 사랑이 미치는 시간의 차원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그 사랑은 유효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3:8 & 10:14)
사랑의 깊이의 차원은 그 질을 대변한다. 특별히 죄의 지극히 깊은 수렁에 빠진 인간을 구원해내시는 그분의 사랑이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40:2) 또 하나님의 인간과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과 섭리 또 죄인을 구원하시는 비밀의 경륜을 당신의 자녀로 하여금 깨닫게 만드시는 사랑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마지막 높이의 차원은 우리가 도무지 도달은커녕 측정할 수조차 없는 사랑의 능력이다. 갈보리 정상 위에 우뚝 선 십자가를 넘어서 하늘의 보좌에까지 이르는 그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사랑은 바로 십자가상의 살인강도도 회심시켰듯이 어떤 흉악한 죄인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온전히 부어지면 그분의 거룩한 자녀로 변화되지 못할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1-6)
다윗은 하나님 사랑의 네 차원을 가장 정확히 표현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신 능력만 찬송한 것 같다. 그분의 앎에서 벗어날 것은 신자에게 단 하나도 없다고 했다. 앎이란 관심을 갖기 전에는 생길 수 없다. 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렇게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분의 앎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에서도 도무지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랑의 넓이, 길이, 깊이, 높이는 도무지 측정할 수 없다. 한계가 없다.
그래서 다윗은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나를 아는 지식의 사차원은 우리가 상상도 못한다는 것이다. 또 그와 동시에 그분이 나를 그만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 깨달음 하나만으로도 자신에게 너무나 귀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은혜가 너무 커서 감히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한다고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그분의 사랑은 그냥 너무 기이할 뿐이다. 너무 넓고 길고 깊고 높을 뿐이다. 그래서 도무지 능히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그분을 아는 것과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그분이 우리를 아는 것과 우리를 사랑하는 것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된다. 이 진리 하나만 깨달아도 너무 귀하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출발이자 끝이다. 그 사랑은 바로 예수 십자가다. 그래서 예수가 처음이자 끝이다. 믿는 자의 전부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다윗의 고백은 너무나 정확하다. 그분의 사랑은 기이하다는 말 이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엄밀히 말해 사랑을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니다. 과학적 논문으로 분석은커녕 객관적 기사형식으로 설명될 수도 없다. 실험하여 원인과 결과를 알아내거나 자료를 수집하여 평균치를 계산해낼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니다.
사랑은 그저 느끼고, 체험하고, 누리고, 실현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는 사랑을 알 수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가 아니라 그분은 우리에게 사랑이 되신다가 옳은 표현이다. 그분은 사랑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서두에 한 말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사랑에만 바탕을 둔다. 그분에게서 사랑을 빼면 그분이 안 된다. 어폐가 있지만 그분의 모든 속성에서 혹시라도 다른 것 한두 개 빠져도 그분의 완전하심에 하자가 안 생길 수 있지만 사랑을 빼버리면 그분다우심이 크게 손상되는 것을 넘어서 아예 존재조차 못한다.
이런 그분의 사랑을 우리는 측정을 못한다. 계산을 못한다. 단순히 꿈꾸고 소망하고 기대할 뿐이다. 가슴에 가득 찬 기쁨과 떨림과 설렘으로 말이다. 그분의 사랑은 측정이 불가능하지만 우리에게 한 가지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한 기준이 되는 잣대는 주셨다. 바로 골고다 십자가이다. 십자가를 넘어서 하늘에까지 올라가 그분의 사랑을 잴 필요는 없다. 십자가 사랑으로 당신이 사랑임을 완벽하게 보이셨다. 십자가 사랑 안에만 제대로 거하고 그 사랑을 누리고 주변에 실천하는 신자에게 두려울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신자 앞에 세상의 어떤 죄악 흑암 사탄 사망의 세력이 바로 서지 못한다.
그 십자가 사랑을 정말로 받았다면 또 그래서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제대로 안 다면 이웃에게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다. 요한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나눔이다. 사랑을 설명 설득 권유하지 말고 단순히 누리고 체험하고 나누라는 것이다. 실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말을 그 외에 이해할 수 있는 방안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 그분은 사랑이다. 온전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는 그분 외에는 이 우주에 없다. 모든 선한 것은 그분께로만 온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를 넘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차원으로 그분의 사랑의 넓이 길이 깊이 높이를 잴 줄 알고 온당하게 반응할 줄 아는 실력이 참 된 영성이다.
4/28/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