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그 중에 제일인 까닭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누군가 연애와 결혼의 차이를 이렇게 비유했다. 연애 때는 TV가 전혀 필요 없지만 결혼하면 리모컨 하나 두고 서로 차지하려 다툰다고 말이다. 한갓 유머이지만 그 의미가 심장하다. 그럼 연애와 결혼의 중간인 약혼은 어떤 것인가? 간단하다. 결혼을 준비하는 기간이므로 TV 리모컨 하나 때문에 싸우지 않기 위해 미리 준비하고 연습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해서 결혼하려고 약속하는데 설마 리모컨 가지고 싸울까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또 인간이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오늘의 본문은 믿음 소망 사랑 셋 다 항상 있어야 하고 중요하지만 그 중에 사랑이 최고로 중요하다고 말한다. 성경본문에서의 뜻은 교회 안에서 은사 사용에 관한 지침이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꽹과리 소리 즉, 소음에 불과하다고 13:1에서 말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사용할 때는 오직 그 영혼을 사랑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목적과 차원에서 하라는 것이다. 신유, 섬김, 기도, 가르침 등 모든 활동에 해당된다.
이 권면은 또 교회 밖에서의 신자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고 반드시 적용되어야만 한다. 약혼이 리모컨을 다투지 않도록 준비 연습하려 해도 서로 사랑을 해야 한다. 지금 서로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하려고 약속을 하는 판국에 또 사랑하라고 하니까 너무 진부하고 단순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너무 흔하게 사용하다보니까 사실은 그 정확한 뜻을 모르고 있다. 또 정확한 뜻을 모르니까 삶에 적용하는 모습도 불완전한 모습의 사랑인 경우가 많다. 젊은 청춘 남녀는 아무 노력 없이도 몸과 정신이 자동적으로 상대에게 끌리고 좋아지는 반응을 보인다. 육신적 본능의 발로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또 그런 상대를 만난 것도 실은 자기 노력이라기보다 하나님이 붙여 주셨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훨씬 진지하고 심각하고 경건하고 숭고하고 신령한 것이다. 성경은 믿음과 소망보다 더 중요하다고 선언했다. 믿음과 소망은 인간관계를 올바르고도 아름답게 유지할 수 있는 핵심이다. 정확히 말해선 최후의 마지노선이다.
믿지 못하는 자와는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 특별히 남녀 관계와 부부 사이는 더 그렇다. 연인이나 배우자를 속이는 것은 용납 받을 수 없다. 상대의 믿음에 훼손이 가게 하거나 배반을 하면 그 가슴에 너무나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인격적 살인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소망은 믿음보다 더 중요하다. 사람은 그리 선하거나 강하지 않다. 연약하고 어리석은데다 고집과 욕심은 물론 죄의 본성까지 펄펄 살아있는 존재다. 한두 번 믿음을 배반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또 저 사람이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닌데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럼 서로 함께 노력하여 다시 얼마든지 아름다운 관계로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은 있어야 한다. 믿음이 소진되어 무력화되면 소망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사랑이 이 둘 보다 더 중요하다면 어떤 뜻인가? 상대에 대한 믿음과 소망 둘 다 완전히 소진되었을 때에 사랑의 힘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재산 외모 건강 명예 권세 지성 다 사라졌어도 끝까지 품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바꿔 말하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두 사람 사이를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이어가게 할 수 없을 때에 정말로 모든 것이 무용지물 되었을 때에 두 사람을 묶어주는 것이 사랑이어야 한다. 인간적이고 현실적 소유와 수단을 다 동원해서도 벌어진 틈새를 이을 수 없어도 사랑만으로 회복할 수 있어야 그것이 비로소 사랑이다.
모든 것이 없어졌을 때라는 것은 상대가 맨몸 하나 남았을 때다. 상대라는 그 존재 자체를 현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다. 한 사람의 완전한 인격체가 다른 이를 한 사람의 완전한 인격체로 대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고귀한 피조물이자 그분 사랑을 받는 자녀로 하나님 나라 가는 그날까지 그 아름다운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
결혼하기로 서약한 두 분에게 사랑하는 연습을 하라는 것은 바로 이 마지막 사랑을 하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힘을 들여서 사랑할 필요가 없다. 사랑해서 약혼을 했는데 지금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사랑하게 된다. 대신에 고난이나 문제나 다툼이 생기면 맨 마지막에 반드시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없어야 한다.
물론 이런 사랑은 어렵다. 우리 중에 그 어떤 이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 하나님 주시는 사랑으로만 사랑해야 한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여호와를 아는 이스라엘은 물론 불신자들마저도 서로 사랑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불신세상이 꼭 사악했던 것은 아니다. 인간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바꾸려고 나름의 노력을 했다. 그러나 먼저 사랑부터 하려고 했지 마지막 사랑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 모든 노력이 실패했다.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하셨는가? 인간들의 모든 모멸 비방 핍박 상처 고난 수치 다 감당하셨다. 그리고 끝까지 한 마디 항변하지 않으시고 골고다 십자가에 오르셨다. 인간이 갖고 있는 어떤 문제도 참 사랑이 아니고는 해결이 안 됨을 그분은 잘 아셨던 것이다.
인간은 참 사랑을 스스로는 결코 할 수 없다. 주님은 정말로 맨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참 사랑을 보여주셨다. 마지막에 하는 사랑 즉 참 사랑만이 인간구원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또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도 우리를 받아주신다.
두 약혼자에게 두 가지만 당부하고 싶다. 처음부터 사랑하려 하지 말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사랑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 바란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언젠가 꼭 체험하여서 받아 누리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기 바란다. 각자의 존재 그 자체가 각자에게 자신의 전부로 받아들이는 사랑을 말이다.
11/23/2017
어제 추수감사 주일에 한 교인 집에서
또 다른 교인의 따님 약혼예배를 거행하면서 행한 주례설교입니다.
함께 나누고자 올립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