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너무나 간단한 방법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삼중고(三重苦)의 인생
인생은 참으로 고달픕니다. 단 한명의 예외 없이 다 겪어야 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 하나만 봐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최고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건강까지 갖춘 자라도 늘그막에 병들어 죽는 것은 절대 피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의 이런 탄식에 공감하지 못할 자는 바보나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 아무도 없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1:3)
세상에서 형통하여 크게 성공한 것 같아도 실상은 수많은 고난의 숲을 힘겹게 헤치고 나온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왕 다윗의 생애만 해도 온갖 시련이 쉴 틈 없이 이어졌지 않습니까? 나아가 욥처럼 아무 이유 없는 환난이 도저히 감당 못할 정도의 크기로 졸지에 덮치기도 합니다. 욥은 순전한 믿음으로 그 환난을 이겨내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 자살해 죽었거나 죽음과 방불한 상태로 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보다 더한 인생의 비극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겪는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어려움입니다. 세상살이에 큰 어려움 없이 풍요롭게 일생을 마치는 사람마저 예외 없이 절감하는 어려움입니다. 누구나 안고 있는 숙제이지만 안타깝게도 아주 많은 사람이 거의 평생 동안 답을 알지 못하는 인생 최고의 딜레마입니다.
우리 모두 실감하듯 인생이 자기가 꿈꾸는 대로만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또 그럼에도 반드시 특정한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얄궂고 억울하지 않습니까? 내가 진정으로 소원하고 정말로 좋아서 선택한 길인데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니 말입니다. 말하자면 미래가 자기가 정한 코스에서 우회 내지 이탈할 것이 십중팔구 예정되어 있는데도 자기가 정한 길로 계속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지닌 숙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가장 큰 고난은 자기가 선택한 길에서 벗어났거나, 그 길을 가로막는 장애들입니다. 자기 꿈대로 일이 진전되면서 겪는 어려움이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처음 선택했던 때의 계획, 기대, 예상, 소망이 쇠퇴 내지 실종되고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억지로 이끌리고 고난마저 늘어나니까 진짜로 고달픈 것입니다.
나아가 도대체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그 방향조차 종잡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고통 중이라도 자기가 잡고 있는 삶의 운전대만은 결코 놓고 싶지 않는데, 매사가 거의 자기 손을 떠나 통제 불능이 되어버립니다. 컴컴한 터널의 끝이 나타날 시기나 방식이라도 알 수 있다면, 아니 미세한 힌트라도 있으면 훨씬 나을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원상회복하자니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자신의 삶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떠내려가는 중이며 또 다른 고난의 미래가 자기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거침없이 다가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인생에는 삼중고(三重苦)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선 인생은 꿈꾸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그 선택대로 자기 삶이 굴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도 짐작하지만 순간순간 선택은 해야 하고 또 그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거의 모든 사람이 실패로 예정된 선택을 하여 수행하면서도 자기만은 절대 실패하지 않으리라 착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인생의 3차방정식을 풀어낼 방도는 도무지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 뜻과 내 생각의 차이
어떤 사안에 대한 판단과 결정이 힘든 이유는 선택한 방안에 따라 발생 가능한 요소들을 너무 많아 예측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택을 하면 온갖 부작용이 예상되고, 저런 선택을 해도 여전히 수많은 폐해들이 따를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판단력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상식적으로 빤히 보이는 부정적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최선의 해결책은 문제가 복잡할수록 문제를 단순화 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너무 의존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수록 더 복잡해지기만 합니다. 아무리 심각한 결단이 요구되는 중대 고비라도 신자가 고려할 요소는 정작 두 가지뿐입니다. 쉽게 짐작하겠지만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 자기 생각대로 할 것인지 여부인데 당연히 전자여야 합니다.
그런데 막상 현실에선 누구나 체험하듯이 그 분별이 아주 애매하고 힘듭니다. 우리의 믿음이 적거나 영적 분별력이 얕아서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이 단계에서 신자들이 자칫 간과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자꾸만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결정이어야 하고 반드시 종교적 모습마저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영적으로 거룩한 선택이어야 한다는 선입관에 너무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신자가 되고 나선 경박하고 비천하고 악한 선택은 하지도 않고, 또 그런 방안은 쉽게 깨달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 신자의 선택이 요구되는 주된 영역이 실은 현실의 일상적 사안이라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하든 하나님 뜻 안에서 선하고 거룩한 일이 됩니다. 악한 것은 이미 고려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종교적으로 거룩하고 신령한 색채를 구태여 가미해서 따져볼 필요나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꾸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찾고자 하니 어느 쪽이 그에 합당한지 분별하기 아주 힘들어집니다. 둘 다 나쁜 것은 아닌데 즉, 둘 다 좋은데 더 좋은 것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더 좋은 것을 찾으려는 시도가 신자 본인의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아들이 운동도 하고 싶고 음악도 하고 싶다면 부모로선 아들이 더 좋아하는 것을 하라고 할 것 아닙니까? 자식이 꼭 부모더러 골라달라고 하면 부모가 조종하는 꼭두각시가 되겠다는 뜻이며, 혹시라도 나중에 잘못되면 부모 탓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교회 봉사하거나 이웃에 선행을 베푸는 일에 하나님 뜻을 묻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 자체가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 뜻이기에 그냥 시행하면 그만입니다. 현실적 문제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해달라는 것은 나중에 잘못되면 하나님 탓을 하려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내지 욕심을 품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인생을 우회 이탈할 가능성을 최대한 없애자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의도는 선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어떤 신자라도 매사에 당신 뜻대로만 움직이는 로봇이나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습니다. 신자가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 시행하기를 원합니다. 또 그 선택한 길을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며 당신과 상의하며 걸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나아가 설령 신자의 선택과 걸음걸이에 하자가 있어도 당신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십니다. 요컨대 처음부터 확정된 당신의 한 가지 길을 미리 가르쳐주는 법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
그래도 기어이 하나님의 뜻에 더 합당한 것을 찾기를 원한다면 아주 간단한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나의 유익을 위할 것인가, 아니면 상대의 유익을 위할지 여부만 따져보는 것입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만약 신자가 당면한 현실적 선택에서 둘 다 하나님의 뜻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더 이상 개입시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인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판단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사가 나에게 좋고 상대에게도 좋다면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복잡다단한 인생살이에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내가 좋아지면 필연적으로 상대가 손해 보는 측면이 생깁니다. 그 반대로 내가 희생하면 상대에 유익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서로 도우며, 정확히 말해선 서로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상 이익이 줄더라도 쌍방이 조금씩 양보하자는 것도 이상 내지 탁상공론에 그칠 뿐입니다. 어느 쪽이 얼마를 손해 보며, 어느 쪽이 얼마를 이익 볼 것인지 누가 판단 결정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서로 조금씩 이익과 손해를 나눠 갖자고 해도 자기 손해가 더 커보이게 마련입니다. 또 그런 상의와 판단 과정 중에 또 다른 시기와 분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아무도 보장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상대의 유익은 거의 고려치 않고 자신의 유익만 염두에 두고 판단 결정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타락한 이후 모든 인간은 자연히 자기중심으로 판단합니다. 다른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신자도 이런 본성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며 심지어 하나님마저 그래야 한다고 여깁니다.
예수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즉,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모든 가치관과 그 기준이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하나님 중심적 사고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선택은 신자에게만은 아예 처음부터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을 함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혼자만 관여되어서 자기 혼자 주관하고 다른 이에게 그 일의 과정 중이나 결말이 난 후에도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이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는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4-40) 단순히 신자가 따라야 할 첫째와 둘째 가는 계명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첫째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당연히 이웃도 사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도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4:12)고 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증거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무슨 일에서나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 증거가 드러나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룻의 선택과 결단의 기준
본문의 모압 여인 룻의 경우를 봅시다. 가나안 땅의 기근을 맞아 이방으로 피난 간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었습니다. 졸지에 시어머니와 두 며느리 모두 과부가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선택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고향에 남아 재혼하라고 권합니다. 오르바는 그 권고대로 남기로 합니다. 반면에 룻은 시어머니를 모시기로 결정합니다.
룻이 그런 결정을 내린 근거는 오직 나오미를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그녀가 나오미를 통해 여호와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표현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시어머니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어머니라는 단어가 항상 먼저 나올 뿐 아니라, 이 짧은 구절 안에 무려 8번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두 번입니다.
아무리 그녀가 여호와 신앙을 가졌다 해도 아직은 초보단계이고, 이스라엘의 계대결혼법에 대한 구체적 지식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이스라엘 땅이 생전 처음 가보는 이방 땅이 됩니다. 문화, 관습, 언어, 제도, 법률 모두가 너무나 생소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자기 인생이 대체 어떻게 진행될지 전혀 짐작할 수 없습니다. 모든 상황을 보면 시어머니 권고대로 고향에 남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보다 나오미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일생의 중대결단을 내려야할 때에 자기를 위하지 않고 다른 이를 위한 결정을 한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그 결정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권능을 풍성히 누리며 살게 된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살이가 가장 고달픈 까닭은 선택한 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신자의 삶이 갈급하고 허망한 이유도 자기 욕심대로 채워지지 못한 탓만은 아닙니다. 자기 인생에 절대적 가치와 의미를 주는 방향성이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선택 결정해서 시행할 수밖에 없지만 결국은 거의 그 길에서 우회 내지 이탈됩니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욕심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가 되어서 항상 갈급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선택의 기준도 없고, 선택해도 그 길로 정확하게 인도해줄 절대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자기가 선택 결정한 꿈을 완전히 자기 힘으로만 이루어내는 자는 극히 소수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로 타락한 인간의 결정과 성취인지라 온전한 기쁨과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그들이 잘못되고 악한 선택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만을 위하거나 자기중심적인 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런 불합리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서두에서 말한 인생의 삼중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매사에 선택을 해야 하는데 신자도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고난을 많이 겪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인생의 절대적이고 온전한 방향성을 확보했습니다. 또 그 방향대로 하나님이 반드시 이끌어 주십니다.
무엇보다 현실의 삶에서 그분의 뜻을 분별할 간단하고도 확실한 기준을 가졌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도덕적 종교적 영적으로 심각하게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바로 나 자신보다 이웃의 유익을 위한 결정을 내려 그대로 준행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그런 선택을 신자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의미로 받아들이시고 당신의 모든 권능으로 그 일을 이뤄지게 해주십니다. 룻에게 보아스를 예비해 놓았듯이 말입니다.
역으로 말해 신자가 자기만을 위한, 혹은 자기중심적인 선택을 하고서 하나님의 힘만 빌리려 하면 어지간해선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신자 시절의 인생의 삼중고가 여지없이 다시 닥치는 것입니다. 바른 길에서 이탈됨으로써 문제만 자꾸 쌓이기에 오직 그 해결을 위한 기도만 뜨겁게 끈질기게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해보기는커녕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마저 평생 가도 알지 못합니다. 예수 믿어 구원 받았다는 것 외에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요컨대 신자의 경우 인생의 선택과 결단이 요구될 때에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자기는 손해 볼지라도 진정으로 이웃을 살리는 방향으로만 결정 시행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쪽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그 인생을 반드시 당신의 계획대로 성공으로 결론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핑계로 어느 쪽이 현실적으로 번창할 가능성이 높은지 가르쳐달라고 자꾸만 떼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1/27/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