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보수가 거꾸로 된 미국

조회 수 2856 추천 수 318 2005.05.11 05:24:34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집권 2기에 가장 역점을 두는 사업은 사회보장제도(Social Security)의 개혁이다. 취임식과 상하 양원 합동회의의 첫 국정 연설을 마치자마자 이 개혁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며 5개 주를 순회했다. 민주당은 벌써부터 적극 반대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이처럼 둘로 나뉜 적이 없다고 걱정할 만큼 여론 조사 결과도 찬반이 거의 반반이다.

미국의 사회보장제도의 운영원리는 간단하다. 젊어서 일을 많이 하는 자들의 소득에서 사회보장세로 징수한 기금을 불린 것으로 노인층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이 세금을 많이 낸 사람은 은퇴 후에 혜택이 비례해서 많이 돌아가는 대신에 세금을 기여하지 못한 빈곤층도 최소한의 기본적인 노후 생활을 그 기금으로 충당케 한다.

그런데 전세계적인 현상이지만 미국도 인구 분포상 노인이 노동 가능한 청장년보다 더 많아진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말하자면 먹여 살려야 할 인구가 부양 받아야 하는 인구보다 적어지고 있다. 현 추세대로 가면 2018년이면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게 되고 2040년이면 기금의 잔고가 바닥이 나 완전 파산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래서 4년 전과는 달리 확고하게 재선에 성공한 부시가 그 특유의 추진력으로 지금부터 근본적으로 개혁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는 것은 앞으로 13년 후의 일이고 더구나 파산이 되는 것은 35년이나 후의 일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벌써부터 곧 닥칠 일로 생각하고 준비해 나간다. 이들은 9.11 같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양간을 미리부터 튼튼하게 만든다. 간단하게 도로 공사 하나만 보아도 지겹도록 오래 한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돌다리가 무너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테스트해보고 나서야 지나간다. 외양간이 튼튼하지 않으면 아예 소를 키우지 않는 사람들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공화당은 보수를 민주당은 진보를 대변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개혁을 진보측인 민주당은 반대하고 보수인 공화당이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이해가 안 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보수는 기본 제도를 보완만 하고 진보가 근본적으로 뒤 엎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미국의 진보와 보수는 한국에서처럼 이데오르기적인 좌우대립의 개념이나 각종 제도를 급진적으로 개혁하느냐 마느냐로 나누는 차원이 아니다. 미국은 처음부터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대의민주주의의 확고한 바탕 위에 세워진 나라라 이념적인 논쟁이 발 붙일 여지가 전혀 없다. 미국에서의 보수와 진보는 크게 보아 경제 발전을 성장과 분배 측면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많이 주어 달성해 내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세부적으로 서로 겹치거나 반대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공화당은 일을 많이 하는 자들에게 혜택을 더 주어 계속 경제 활동을 더 열심히 하도록 하자는 주의인 반면에 민주당은 소수 인종과 사회의 낙오된 계층에게도 부를 분배해 균등하게 살게 해주자는 주의다. 민주당이 선거 때마다 부자들 편든다고 부시를 비난하고 소수인종이나 지식층이 많이 사는 대도시에서 지지를 많이 받는 이유가 바로 이런 까닭이다.

미국의 현 사회보장제도는 간단하게 말해 부자들의 돈을 세금으로 거두어 가난하고 능력 없는 자들에게 나눠주자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민주당으로선 현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문제점만 보완하자는 보수측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반면에 공화당은 현체재대로 두어선 노인 인구가 늘면 파산이 되니 개인이 열심히 일해서 자기 스스로 은퇴 후를 보장하는 식으로 그 핵심을 바꾸자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어떤 조직체이건 간에 가장 먼저 그 집단의 장기적 목표(Mission Statement)를 구체적으로 정하기를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말은 사실은 어폐가 있다. 목표가 정해지지 않으면 아예 다른 일을 시작도 하지 않는다. 세상의 어느 집단 치고 목표 없는 곳이 있나 싶겠지만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 아무리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더라도 다 같이 합의할 수 있는 공통된 목표를 세우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일단 목표가 세워지면 어느 정도 불만이 있더라도 절대로 승복하고 세워진 목표를 위해 모든 힘을 합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방법론에선 온갖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며 박이 터지게 싸우더라도 세워진 목표가 흔들리는 법은 없다. 또 아무리 싸워도 동일한 목표를 이뤄내고자 하는 열심과 소속된 집단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에 집단 자체가 나눠지거나 그 구성원끼리 서로 원수가 되는 법은 거의 없다. 한 마디로 세부적인 정책 토론에는 열심이지만 다수결로 결정되면 반발이 생길 수 없다. 모두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에 대해 이의가 없기 때문이다.    

부시가 아무리 급진적으로 개혁하자고 하고 민주당은 천천히 보완하자고 해도 아직은 토론 단계다. 이 토론이 얼마나 오래 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소시민이 방송 인터뷰에서 “반드시 개정은 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인들 (스스로) 자기 돈을 통제해야만 한다.(Changes must be made. Americans must get control of their money.)”라고 반응했듯이 ‘국민의 안정된 노후 생활 보장’이라는 절대 변동될 수 없는 목표에는 모두 동의하고 있다. 그래서 그 수행 방법을 두고는 온갖 논란이 있겠지만 언젠가는 서로 합의하여 개정 내지 보완이 이뤄질 것이다.

한국의 사회 집단간 토론을 보면 거의 대부분 싸움과 분열로 끝을 맺는다. 국민성이 너무 감정적이라 아직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것이 그 일차적 이유가 아니다. 무엇을 위해 토론하는 것인지, 어떤 결론을 도출해 나가야 할지 정하지 않고 무작정 순간적으로 생각나는 대로 목소리만 높이기 때문이다. 토론의 목적과 범위뿐 아니라 이견(異見)의 조정 절차 및 의사 결정 수단 같은 토론 자체의 규칙부터 먼저 정해야 하고 그 한도 내에서만 토론해야 하는데도 전혀 그렇지 못하다. 말하자면 토론을 위한 토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이해 관계가 다른 두 집단이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의기투합하여 끝까지 그 어려움을 극복하며 함께 갈 의사가 있는 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흑백 이분법 논리에 사로 잡혀 처음부터 함께 갈 마음이 없는 자끼리는 아무리 논쟁해 보아야 시간 낭비다. 가장 먼저 마음에 교감이 이뤄져서 서로 의지하고 사랑해야 한다. 단적인 예로 영호남 사람끼리 진심으로 서로 포용하고 좋아하고 위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단순하게 서로 인정해주어 하나가 되자는 식의 구호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다음에 할 일은 목적지를 정하는 것이다. 목적지가 다른 것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물을 서로 마시려 쪽박을 깰 수는 없고 빈대 때문에 초가를 태울 수는 없지 않는가? 목적지가 같으면 가는 방향을 정해야 하고, 방향이 정해지면 어떤 방법으로 갈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는 속도를 정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순서를 오히려 거꾸로 하는 것 같다. 마음만 급하다. 속도와 방법을 먼저 논쟁하다 보니 나중에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두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맨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갈 수 밖에 없다. 토론자가 많은 것보다 토론의 룰은 안 정하고 아무 규정이나 이론을 끌어 맞추려 드는 것이 더 골치 아픈 사공이다.  

한국에서 최근 가장 유행하는 화두(話頭)는 쌍방이 윈윈(Win-Win)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한 개의 돌로 두 마리 새를 잡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일은 우연의 일치일 따름이지 실제로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윈윈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당사자간에 갖고 있는 서로 다른 목표를 상대로 인해 손상되지 않고도 각각 충실히 이뤄내는 것이다. 한 쪽 목표를 위해 다른 목표를 없애는 것은 희생이다. 두 목표를 합쳐서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 내는 것은 타협이다. 윈윈하기 위해 가장 먼저 요구 되는 것은 각자의 분명한 목표가 수립되어 있고 상호간에 그 목표가 변동 될 수 없음을 진정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분열을 치유하자고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대충 타협해 넘어가선 안 된다. 근본적인 치유 없이 일시적으로 봉합하면 상처가 속으로 곪아 더 도질 수 밖에 없다. 단순하게 상대에게 자신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기에 앞서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밝혀 그 목표를 인정 받는 일부터 먼저 힘써야 한다. 목표가 서로 다른 두 가지 일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다수결로 찬반을 가릴 수는 더구나 없다. 둘 중 어느 것을 희생할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지키거나 포기할 것인지부터 먼저 결정해야 한다.

필자는 박통 시절의 공과를 감히 논할 입장이 아니며 오직 먼 훗날 역사가들의 몫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때는 ‘잘살아 보세’라는 하나의 장기 목표에 모두 합의했었고 또 그 길을 함께 가기 위해 서로 양보하고 희생 했다. 지금이 박통 시절보다 다원화된 사회라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는 불가능하다고 무시해선 안 된다. 미국만큼 온갖 인종들이 몰려 살며 여러 의견으로 다원화된 나라가 어디 있는가? 또 가장 원론적인 대책말고는 시대와 상황에 상관 없이 적용될 수  있는 길은 없다.    

미국은 현재 사회보장제도 개혁에 대해 분명히 국민과 정파간에 의견이 둘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토론 중이지 절대 분열된 것은 아니다. 공통의 목표가 분명히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토론은 없고 분열만 있다. 상호 간에 함께 가야 할 그것도 최소 10년 후에 도달할 목적지가 합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정말 솔직하게 물어 볼 질문은 과연 세대간, 지역간, 학연간, 이념간, 정파간 더불어 함께 갈 마음이 있는가? 그래서 이 세대가 먼 장래의 후손에게 자랑스런 유산을 남겨주기 위해 서로 양보하고 희생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부터 확실하게 ‘예스’로 대답할 수 없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고 어느 당이 정권을 잡든지 한국의 고질적인 사색당파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2/21/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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